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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5.18 유공자 차욱준씨 차욱준씨는 아직도 5월만 되면 그날의 기억에 트라우마를 겪는다고 한다.
▲ 장성 5.18 유공자 차욱준씨 차욱준씨는 아직도 5월만 되면 그날의 기억에 트라우마를 겪는다고 한다.
ⓒ 최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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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그날의 기억이 떠오를 때면 몸서리가 쳐지고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아직도 꽉 막힌 공간에 있노라면 공황장애에 시달리곤 합니다."

5·18 38주기를 앞두고 38년 전 항쟁 당시 도청 사수를 호소하며 항쟁 마지막 날 새벽에 가두방송을 펼쳤던 김선옥 씨가 당시 계엄군 수사관에게 모진 고문을 당한 후 성폭행을 당했다는 폭로가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가운데 우리 지역 장성에서도 광주의 아픔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5월 희생자가 있어 찾아갔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박정희의 유신 장기집권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이 믿었던 측근의 단 2발의 총탄에 의해 종말을 고하고 80년은 찬란(?)한 '민주화의 봄'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호사다마라 했던가? 아님 우리 국민에게 민주화란 결코 앉아서 맞이하는 것이 아님을 상기시키려 함이었나?

신군부는 감춰두었던 발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른바 작전명 '화려한 휴가' 그리고 그 재물이 된 것은 바로 광주였다.

80년 당시 광주의 작은집에 기거하며 재수학원에 다녔던 차욱준(당시 20살. 장성읍 상오리)씨는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도 정의감이 투철하고 민주에 대한 의식을 키워왔다고 한다. 봇물처럼 들끓었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청년 욱준 씨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한다.

5월 초부터 산발적으로 이어져오던 청년들의 시위는 5월 중순으로 접어들자 점차 늘어나고 격해지기 시작했다. 욱준 씨 역시 80년 5월 16일부터 광주공원에서 집결해 시위대열을 정비하고 도청 등 시내로 향하는 시위대에 합류했다 한다. 그러다 17일 새벽을 기해 계엄령이 선포되고 광주는 고립되기 시작했다. 욱준 씨가 계엄군을 처음 본건 19일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주둔하자마자 닥치는 대로 시민들을 연행하고 무차별 폭행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광경을 눈앞에 보면서도 욱준 씨는 피 끓는 청춘의 양심으로 도저히 묵인할 수 없어 거리로 나왔다가 결국 21일 계엄군에게 끌려가게 된다.

무차별 연행 그리고 구타와 고문

"곤봉과 개머리판으로 얼마나 맞았는지 몰라요. 그들은 그야말로 개 때려잡듯 휘둘렀으니까요. 나중에 풀려나고 나서야 두개골이 함몰되고 갈비뼈가 부러졌다는걸 알게 됐지만 당시엔 그걸 느낄 수조차 없었어요. 한 대라도 덜 맞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 외엔 없었던 것 같아요."

욱진 씨는 당시 계엄군들은 마치 사냥감을 쫓아다니는 사냥꾼처럼 시민들을 '인간사냥' 했다고 한다.

"대인파출소에서 연행되자마자 트럭에 실려 갔어요. 아마 2.5톤 군용 트럭이었던 것 같아요. 스무 명 정도 되는 인원을 싣고 처음엔 조선대 운동장으로 갔었는데 그곳에도 끌려온 시민들로 대만원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바리캉으로 머리를 삭발 당하고 원산폭격과 얼차려 등의 기합을 받다가 해질 무렵에서야 당시 광주경찰서(현재 동부경찰서)로 이송돼 왔는데 경찰을 보니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이때 경찰이 준 음식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욱준 씨는 이 날 먹었던 빵이며 김밥 등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한다. 이후 잡혀왔던 시민군들은 광주의 여러 곳으로 분산 수용됐다고 한다. 그중 일부는 광주교도소로 가고 욱준 씨는 31사단으로 끌려갔다가 다시 상무대 지하 영창에 수용됐다.

"상무대로 온 뒤부터는 마치 굴비 엮듯 한 줄로 나란히 줄 세워져 고개를 숙이고 움츠린 채로 오로지 앞사람의 허리만 잡고 굼벵이처럼 웅크린 자세로 지냈습니다. 화장실을 갈 때도 정해진 시간에 줄줄이 한꺼번에 가고 음식을 먹을 때로 바로 그 자세를 취한 채 먹었습니다. 잘 때도 그렇게 웅크린 채 잤습니다. 자세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거나 지시대로 따르지 않으면 가차 없이 곤봉을 맞곤 했으니까요. 아니 지시대로 따르더라도 일단 때리고 시작했습니다."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버텨

그렇게 끌려온 시민들은 하나둘씩 불려 나가 취조를 받았는데 군인들은 한결같이 주동자가 누군지 또 누구의 지시를 받았는지 집중적으로 캐물었다 한다. 욱준 씨는 "친구들이랑 어울리면서 휩쓸리게 됐을 뿐 배후도 조직도 없다고 일관되게 진술했지만 당시 구타에 못 이겨 허위진술했던 분들도 꽤 있었을 것"이라면서 그 때문에 그분들은 더욱 고초를 겪었을 것이라고 한다.

욱준씨의 일관된 진술 때문이었을까? 훈방으로 풀려난 욱준씨는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마을 주변 주민의 도움을 받아 상무대 인근 군인들 초소에 담배 한 보루를 상납하고 나서야 겨우겨우 집으로 올 수 있었다고 한다. 이때도 일그러진 모습의 욱진 씨를 위해 시민들이 내주었던 우유며 딸기 맛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한다. 시간이 지난 후에야 장성 집에 돌아온 욱진 씨가 다친 몸이나마 이끌고 무사히 돌아왔노라며 부모님이 돼지 한 마리를 잡아 마을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지금도 여전히 온몸에 남은 당시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욱준 씨지만 육체적 아픔보다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그는 "5·18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형이며 이 시대, 아니 다음 세대 역시 잊지 말아야 할 아프고 소중한 역사"임을 강조하고 "이런 비극이 이 땅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한 목소리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외쳐대도 부족할 판에 정치인들뿐 아니라 5월 단체들 마저도 5월을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는데 이용하려 하는 모습을 보면 개탄스러울 뿐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장성투데이 누리집에도 게제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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