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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수정: 2018년 5월 29일 오전 9시 8분]

피카소 등의 화가들이 가난을 벗어나자 몽마르트르를 떠나 정착한 곳이 몽파르나스다. 그곳은 센강 남쪽 좌안에 있다. 파리 중심부를 동서로 관통하는 센강 북쪽은 우리 감각으로 강북이고 남쪽은 강남이지만, 프랑스식은 그렇게 그려진 지도를 놓고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강북은 우안(Rive Droite)이 되고, 강남은 좌안(Rive Gauche)이 된다.

좌안을 가로지르는 몽파르나스 대로가 있다. 그 대로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 뤽상부르 공원이 나오는데, 아빠와 나는 그 왼쪽 중간쯤에 있는 플뢰뤼스로(Rue de Fleurus) 27번지를 찾아갔다. 인근 메트로 역은 셍 플라시드(Saint-Placide)다. 칸살이가 큰 저택을 상상했던 나는 거투르드 스타인 집이 아파트였다는 것에 약간 실망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출입문이 큰 5층 아파트 벽에는 다음과 같은 팻말이 붙어 있었다.

"거트루드 스타인, 1874-1946, 미국 작가. 여기서 오빠 레오 스타인 및 앨리스 B. 토클라스와 함께 살았던 그녀는 이곳에서 1903년부터 1938년까지 수많은 화가와 작가들을 맞았다."

아빠와 함께 팻말을 읽어보고 있는데, 아파트 건물의 대형 철문에 난 쪽문을 열고 백인 할머니가 나왔다. 그분에게 자초지총을 설명하고 내부를 잠깐 구경해도 되겠냐고 물으니 흔쾌히 문을 열어주었다. 그곳은 지금도 사람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였으므로 외부인이 마음대로 들어가 구경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기에 행운이었다.

대문과 같은 넓이의 널따란 통로 왼쪽 중간엔 천장 높이의 대형 현관문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현관문에 달린 유리를 통해 안을 들여다보니 집안으로 통하는 또 다른 통로 안쪽에 응접실로 들어가는 2차 현관문이 보였다. 문이 닫혀 있어 집안 내부를 살펴볼 수는 없었지만 규모로 보아 거트루드 스타인이 살았던 아파트 내의 저택임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의 설명을 들으면, 파리 시가지는 5∼7층 높이의 건물들이 도로에 면해 죽 잇대어 지어진 형태이기 때문에 단독주택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저택은 아파트 건물 1층에 큰 대문을 설치하고 그 대문을 중심으로 1층 또는 어떤 경우엔 2층까지 저택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흥미로운 건 대문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출입구 통로 끝에 50평 남짓한 옥내 정원이 따로 있다는 점이었다. 건물 전체의 채광과 통풍을 위한 공간이기도 했다. 구경하고 밖으로 나온 아빠가 말씀하셨다. 
 
아파트 출입구 통로와 현관문 아파트 대문을 들어서면 안으로 통하는 통로가 있고, 좌측에 보이는 문이 '스타인 살롱'으로 들어가는 현관문이다. 통로 끝에는 건물 전체의 채광과 통풍을 위한 50평 정도의 옥내정원이 보인다.
▲ 아파트 출입구 통로와 현관문 아파트 대문을 들어서면 안으로 통하는 통로가 있고, 좌측에 보이는 문이 "스타인 살롱"으로 들어가는 현관문이다. 통로 끝에는 건물 전체의 채광과 통풍을 위한 50평 정도의 옥내정원이 보인다.
ⓒ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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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인 살롱(Stein Salon)이라 불릴 만하더구나."

"스타인 살롱이라고요?"

"그래, 수많은 작가와 화가들이 들락거려 그런 이름이 붙었다더라. 하지만 프랑스엔 본래 '살롱문학'의 전통이 있었다. 그 전통을 스타인이 자기 스타일로 복원시켰던 셈이지."

"수많은 작가와 화가라면 구체적으로 누굴 말하는 거예요?"

"처음엔 피카소와 애인 페르낭드 올리비에, 시인 아폴리네르와 애인 마리 로랑생, 화가 조르주 브라크, 시인 막스 자코브, 화가 앙리 루소, 화가 안드레 드렝 등이었던 것 같아."

"결국 '피카소 사단'이었네요."

"그렇지. 매주 토요일 저녁에 만나곤 했다더군. 그밖에도 많아."

피카소부터 헤밍웨이까지... 거장을 만든 거장

피카소와 비슷한 시기에 살롱을 자주 드나들던 사람들 가운데는 프랑스화가 앙리 마티스, 미국화가 조셉 스텔라, 프랑스작가 엘리자베뜨 드 그라몽, 프랑스 작가 프랑시스 피카비아, 미국작가 밀드레드 알드리치, 미국작가 칼 밴 벡텐 등 수백 명에 달했다.

"왜 그렇게 많이들 모인 거예요?"

"당시 스타인 살롱에 출입한다는 건 화가나 작가로서 출세를 보장받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스타인은 벨 에포크(Belle Epoque)의 거장이었다고 볼 수 있어."

아빠가 말씀하신 벨 에포크란 보불전쟁 후부터 1차대전 전까지 문학·미술·공예가 꽃피었던 시절을 가리킨다.

"그렇게 대단했어요?"

"그럼, 스타인에겐 안목이 있었다. 예술적 안목이란 가치를 처음 알아보는 눈이야. 스타인 살롱 벽에는 피카소 같은 거장들의 작품이 즐비하게 걸려 있었는데, 당시 그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명화가 내지 삼류 화가에 지나지 않았거든. 두 남동생의 재정지원도 사람들을 그녀에게 몰리게 한 원인의 하나였고."

"아까 대문 옆 팻말에 보니 스타인 자신이 작가였던데요?"

"그렇지. 평론가이기도 했고. 하지만 단순한 평론가 차원을 넘어 작가들의 정신적 멘토이자 구루(guru) 역할을 했지. 파리 예술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여걸이었어. 그 때문에 그녀가 살던 몽파르나스 지역으로 이사 온 예술가들이 많아."

우선 피카소가 왔다. 그가 거처를 옮긴 1910년경부터 프랑스 현대예술의 발상지인 몽마르트르 시대가 끝나고 사실상 몽파르나스 시대가 열린다. 전부터 앙리 마티스도 스타인 살롱을 드나들고 있었다. 그가 앙드레 드렝, 모리스 블라멩크 등과 함께 벌인 야수파의 강렬한 색채 폭발이 스타인의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원색의 대담한 병렬을 강조하여 강렬한 개성적 표현을 기도한 이 운동은 20세기 회화의 일대 혁명이기도 했다. 스타인은 마티스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이것이 독점의식이 강한 피카소의 질투심을 불러일으킨다. 어느날 그는 스타인 살롱의 벽 위에 마티스의 그림이 걸린 것을 보고 분기탱천했다. 그래서 마티스보다 더 멋진 그림을 그려 스타인의 마음을 사로잡겠다는 생각으로 바친 그림이 바로 스타인의 초상화였다.

"피카소에게 그런 질투심이 있었군요."

"하지만 세월은 흐른다. 1920년대로 들어서면 스타인 살롱을 출입하는 새 얼굴이 보이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어니스트 헤밍웨이야."

"헤밍웨이라고요?"

"그래, 이거 볼래?"

아빠는 핸드폰을 꺼내 구글 드라이브에 저장해둔 헤밍웨이의 <이동축제일(A movable feast)>에서 발췌한 글을 보여주셨다.

오후 늦은 시간이 되면 따스함과 좋은 그림과 대화를 찾아 플뢰뤼스로 27번지에 들르는 습관이 이내 생기고 말았다. 그 시간대에는 손님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스타인 여사는 늘 친절했고 오랫동안 내게 다정히 대해주었다. 내가 일하던 캐나다 신문사나 통신사를 위해 여러 가지 정치회담을 취재하고 돌아오거나 또는 근동이나 독일 출장을 다녀오면 재미난 사건을 모두 들려달라고 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스타인 살롱을 자주 출입하던 1924년경의 헤밍웨이.
▲ 어니스트 헤밍웨이 스타인 살롱을 자주 출입하던 1924년경의 헤밍웨이.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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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들락거렸나 봐요."

"그랬던 모양이야. 당시 몽파르나스 지역엔 수많은 문인과 화가들이 살았다. 여기서 가까운 마담로엔 <위대한 개츠비>의 저자 스콧 피츠제럴드 부부가 살았고, 인근 동네에 제임스 볼드윈, 리처드 라이트, 체스터 하임즈, 헨리 밀러, 에즈라 파운드, 존 스타인벡, 윌리엄 포크너 등이 살았지."

"모두 미국 문인들 아녜요?" 

"그뿐이냐? <고도를 기다리며>를 쓴 아일랜드 출신의 사무엘 베케트, <율리시스>를 쓴 아일랜드 출신의 제임스 조이스, <황무지>를 쓴 미국 출신의 귀화 영국인 T. S.엘리엇, <멋진 신세계>를 쓴 영국 출신의 올더스 헉슬리도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어느새 뤽상부르 공원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공원을 끼고 지어진 아파트 건물들의 위치와 모양이 마치 뉴욕 센트럴파크 옆에 지어진 아파트들과 흡사했다. 지어진 연대를 보면 뉴욕이 파리를 모방한 것임이 틀림없었다.

공원 안에는 뤽상부르 궁전이 있었고, 그 앞 대형 분수대엔 많은 젊은이들이 물장난을 하고 있었다. 멀리 잘 정비된 숲도 보인다. 휴식과 여유와 낭만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공원이었다.
 
뤽상부르 공원 반쯤 드러누울 수 있게 만든 정원 앞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파리시민들. 오른쪽 뒤에 보이는 건물이 뤽상부르 궁전이다.
▲ 뤽상부르 공원 반쯤 드러누울 수 있게 만든 정원 앞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파리시민들. 오른쪽 뒤에 보이는 건물이 뤽상부르 궁전이다.
ⓒ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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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나는 반쯤 드러누울 수 있게 만든 정원 앞 의자에 앉아 남쪽으로 이어지는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발밑으로 작은 공이 날아들었다. 공을 던져주자 예닐곱 살 난 남자아이가 공을 받으며 답례했다. 귀여웠다. 금발은 아니다. 그러고 보니 파리엔 금발보다 검은 머리가 더 많은 듯했다.

미국 작가들이 왜 파리에서 살았을까

"우리가 둘러본 스타인 살롱 말이다. 거기 드나들던 1920년대의 미국 작가들을 뭐라 하는지 아니?"

아빠가 웃으며 물으시기에 여행 전 파리에 대한 자료를 섭렵할 때 어느 책자에서 본 기억이 나서 넘겨짚었다.

"Lost Generation?"

"그래. 그럼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도?"

"뭔가 길을 잃었나 보죠?" 

"길을 잃었던 건 맞지. 이거 봐라."

아빠는 구글 드라이브에 저장된 헤밍웨이 글의 다음 부분을 보여주셨다.
 
스타인 여사가 '잃어버린 세대'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우리 부부가 캐나다에서 돌아와 노트르담데샹로에 살면서 아직 그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그녀가 몰고 다니던 낡은 T형 포드의 점화장치가 고장 나자 수리를 맡았던 정비공은 1차대전에 참전했던 젊은이였는데 솜씨가 없었던지 아니면 접수받은 순서대로 다른 차량부터 수리하느라고 그랬는지 곧바로 수리하지를 못했다. 그러자 스타인 여사가 항의했고 정비소 주인은 성실치 못한 젊은이가 된 그 정비공을 호되게 꾸짖었다.

"자네들은 모두 Génération Perdue야."

그러자 스타인 여사가 말했다.

"맞아, 그게 자네들 모습이야. 그게 자네들 모두의 모습이라구. 자네 젊은이들은 모두 전쟁에 참가했었지. 자네들은 Lost Generation이야."

'잃어버린 세대'라는 용어가 생기게 된 배경을 그린 글이다. 정비소 주인은 Génération Perdue라는 불어로 말했고, 이 말을 받은 스타인이 Lost Generation이란 영어로 바꿔 사용한 것이다.

"여기서 유래하여 헤밍웨이를 비롯한 미국 작가들을 '잃어버린 세대'라고 하는데, 사실 그 용어는 잘된 번역 같지는 않아. 1차대전 중 대량 살상자를 겪으면서 옛 가치관을 잃고 방황하게 된 세대라는 뜻에서 '길 잃은 세대'가 더 본뜻에 가깝지."

"근데 왜 미국 작가들은 파리에 와서 살게 된 거예요? 그것도 떼로."

"좋은 질문이다. 아빠도 늘 궁금해하던 점이다. 1차대전 후 기성도덕이나 가치관을 상실한 미국의 실업사회를 혐오해서 파리로 건너와 쾌락적이고 허무적인 생활을 살았다는 것인데.그 점을 살펴보려면 우선 시테섬 부근의 고서점부터 가봐야 할 것 같다."

"아빠, 거기 혹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Shakespeare and Company) 아녜요?"

"어?"

아빠가 놀란 표정을 지으셔서 내가 웃었다.

비디오를 몇 번이고 돌려 보았던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의 후속편인 <비포 선셋(Before Sunset)>. 이 영화에서 남녀 주인공이 9년 만에 우연히 재회하는 운명적인 무대가 바로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이다. 들꽃 향이 날 것 같은 서점 풍경이 애틋한 두 사람의 감정과 어우러져 깊은 잔상을 남겼고, 그것이 바로 내가 고민 없이 파리를 여행지로 택한 또 다른 이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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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부 에디터. "쓰는 일에, 그렇게 해서 당신을 만나는 일에 나는 어느 때보다 욕심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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