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권과 신권(신하권력)의 관계는 어느 나라에서든 간에 역사학의 주요 쟁점이다. 둘은 항상 긴장과 대립의 관계를 보였다. 한국 역사에서는 신권이 대체로 우세를 보였다. 신하 그룹을 형성하는 귀족들이 왕실을 능가했던 것이다.

그것은 귀족 숫자가 왕족 숫자보다 많아서만은 아니었다. 그 원동력은 귀족들이 보유한 노비·토지·사병에서 일차적으로 나왔다. 거기에 더해, 결정적 요인이 더 있다. 대부분의 귀족을 하나로 묶어준 요인이 있었다. 바로 맥(脈)이다. 귀족들의 네트워크, 특히 혼맥이 이들을 단단하게 결합시켰다.

불과 100여 전만 해도 중매 없이는 결혼하기 힘들었다. 연애결혼도 없지 않았지만, 그렇게 결혼하면 지역 사회에서 왕따를 당하기 쉬웠다. 산속에 들어가 단둘이 살지 않는 한, 연애결혼 당사자들이 평탄하게 살기는 쉽지 않았다.

중매혼은 같은 계층끼리의 결혼을 촉진시켰다. 일종의 족내혼을 부추긴 것이다. 조선 시대 양반을 포함한 각 시대 귀족들은 이런 문화 속에서 촘촘한 혼맥을 구축했다. 이 네트워크를 통해 왕권도 능가하고, 재물과 권력도 불리고 지켰다.  

현대판 귀족인 재벌도 마찬가지다. 이들도 옛날 귀족을 답습하고 있다. 혼맥으로 힘을 키우고 있다. 정계·재계·관계·학계의 권세가들과 혼맥을 구축하면 큰 뇌물을 쓰지 않고도 사업상 지원을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결혼이 깨지기 전까지는 인맥 관리에 과도한 비용을 지출하지 않아도 된다. 재벌은 이런 혼맥을 사업의 방편으로 활용해왔다.

재벌과 옛날 귀족의 차이점은 정부 관직의 유무다. 옛날 귀족들은 경제력을 발판으로 관직을 획득하는 예가 많았다. 하지만 재벌은 경제력만 있을 뿐, 대개의 경우에 관직은 없다. 정당하게 돈을 벌었다고 떳떳하게 자부하기 힘든 재벌들의 입장에서는 이는 매우 위험한 일이다. 정치권력의 후원 없이는, 떳떳하지 못한 재산을 오래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라도 한국 재벌은 혼맥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고위 공직자와 결혼동맹을 체결해 정치적 보호막을 형성하거나 다른 재벌과의 혼맥을 촘촘히 짜서 대중 및 정권에 맞설 힘을 키우려고 시도할 수밖에 없다. 

재벌이 누구와 결혼하든, 그것은 일차적으로 그들 소관이다. 하지만 재벌의 혼맥은 이들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구세주 역할을 했다. 재벌은 부도덕한 정경유착에 힘입어 국민 세금을 사업 자금으로 펑펑 사용했다. 다른 불법도 많았다. 그러고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정·재·관·학계에 포진한 혼맥이 번번이 그들을 위기에서 건져냈기 때문이다.

재벌의 혼맥이 이처럼 국민경제에 역기능을 했다면, 이 혼맥은 재벌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 전체의 문제가 된다. 따라서 이 혼맥에 관심을 갖고 그것의 사회적 영향을 따지는 것은 지극히 정당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명희·조현아·조현민을 배출한 한진그룹 역시 막강한 혼맥을 구축했다. 이 작업은 창업주 조중훈 회장 때부터 시작됐다. 이 혼맥을 통해 한진은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보수적 기득권층과 이래저래 연결됐다.

조중훈(1920년 생)은 다섯 자녀를 낳았다. 딸 하나, 아들 넷이다. 장녀 조현숙 씨(1945년 생)의 남편인 이태희 씨(1940년 생)는 흥아타이어(넥센타이어) 감사 이상묵의 아들이다. 이상묵은 대법원 판사를 지낸 한봉세와 사돈 간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행한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한봉세는 일제 치하에서 전주지법 판사를 지냈고 여러 건의 독립운동사건 재판에 참여한 친일파다. 박정희 정권 때인 1969~1973년에는 대법원 판사였다. 조중훈은 이상묵을 매개로 한봉세와 연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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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1년 당시의 조중훈 회장(오른쪽). 김종필 국무총리와 손을 잡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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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그룹 회장인 장남 조양호(1949년 생)는 동갑인 이명희와 결혼했다. 조현아·조현민 두 딸과 함께 갑질 파문의 중심에 있는 이명희는 이재철 전 교통부 차관의 딸이다. 이명희와 조양호가 결혼한 1973년 당시, 이재철은 현직 교통부 차관이었다. 1976년까지 이 자리를 지켰다. 운수업계 재벌가가 주무부처 차관과 사돈을 맺은 것이다.

차남 조남호(1951년 생)는 동갑 여성과 결혼했다. 이 여성은 고등학교 교장의 딸이다. 그리고 3남 조수호(1954년 생)의 결혼은 이 집안 혼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배우자 최은영씨(1962년 생)는 최현열 CY그룹 명예회장의 딸이다.

최현열은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매제다. 신격호의 동생인 신정숙씨가 최현열의 부인이다. 롯데물산·롯데캐논 사장을 역임한 최현열은 남경사를 차려 독립한 뒤 CY그룹 총수가 됐다.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에는 신격호의 그룹 경영에 상당히 많이 관여했다. 

신격호 집안의 혼맥을 추적하면, 박남규 조양상선 창업주, 김치열 내무장관(박정희 정권), 김종대 대전피혁 회장, 신덕균 신동방 창업주, 이희상 한국제분 회장, 조홍제 효성 창업주에 이어 이명박 전 대통령이 나온다. 이런 인맥이 신정숙과 최현열의 결혼, 최은영과 조수호의 결혼을 통해 한진그룹 혼맥과 접목됐다. 

4남 조정호(1958년 생)의 부인인 구명진씨(1964년 생)는 구인회 LG 창업주의 아들인 구자학 아워홈 회장의 딸이다. 구자학 집안의 혼맥에는 오자복 국방장관(노태우 정권), 심재석 장기은행할부금융 부회장, 황순필 대한도시가스 사장이 등장한다. 이런 혼맥이 조정호의 결혼으로 한진 혼맥과 이어졌다.

장남·차남의 배우자보다 3남·4남의 배우자가 훨씬 더 유력한 가문의 딸이라는 점은, 세월이 흐를수록 높아진 한진그룹의 위상 변화를 반영한다. 한편, 조중훈의 손자이자 조양호의 아들인 조원태는 김미연씨와 결혼했다. 김미연은 김재춘 전 중앙정보부장(박정희 정권)의 손녀다.

조중훈에게는 형제들도 있었다. 이들도 만만치 않은 혼맥을 구축했다. 예컨대, 동생 조중건은 이상실 상공은행장의 딸인 이영학씨와 결혼했고, 조카 조지호는 이병호 상공장관(박정희 정권)의 딸인 이숙희씨와 결혼했다. 조중훈의 조카이자 조중건의 딸인 조윤정은 이동원 외무장관(박정희 정권)의 아들인 이정훈씨와 결혼했다.

이 같은 한진 혼맥을 추적하다 보면,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보수적 기득권층의 상당부분이 나타난다. 참여사회연구소와 인하대 산업경제연구소가 공동 기획하고 동의대 경제학과 김동운 교수 외 5인이 공저한 <재벌의 경영지배구조와 인맥 혼맥>은 이 점을 이렇게 정리한다.

"한진의 혼맥 관계는 관·재계 고위층 가문과 연결되어 있다... 조중훈 가(家)는 최현열 가를 매개로 롯데(신격호 가), 신동방(신덕균 가)과 이어지면서, 노태우 가와 선경(SK, 최종현 가)과 연결된다... 한편 구자학 가를 통해 재계 혼맥의 중심인 LG(구인회 가)와 연결되면서, 삼성과 현대 등 대부분의 재벌과도 연결된다."

지금 한진그룹 총수 일가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해 있다. 일반 국민들은 물론이고 직원들까지 그들의 퇴진을 희망하고 있다. 직원들은 박근혜 탄핵을 외쳤던 그 자리에서 조양호 일가 퇴진을 외치고 있다. 

과거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혼맥의 도움을 받았을 수도 있다. 이맘때쯤, 사돈이나 사돈의 사돈들이 음으로 양으로 구원의 손길을 보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재벌 혼맥보다 무서운 국민들의 네트워크가 재벌 체제를 옥죄고 있다. 국민의 힘은 불과 1년 전, 박근혜 탄핵으로 위력을 과시했다. 지금 한진가는 그 막강한 위력 앞에 노출돼 있다. 

옛날 귀족들은 평소에는 혼맥을 매개로 단결력을 보였지만, 사돈 중 하나가 결정적 위기에 빠지면 실용주의와 현실주의로 돌아섰다. 극히 일부 귀족들은 사돈을 위해 의리를 지켰지만, 그런 의리가 실리로 연결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한진그룹이 거의 전 국민의 공세에 노출된 지금 상황에서 이 집안의 사돈, 사돈의 사돈들이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줄지 주목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