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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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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에게 부치는 편지'

아버지가 매일 잔소리만 하는 것 같아 오늘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구나. 예전에 대학로에서 맨정신에 악을 써가며 노래를 하니까 너는 창피하다며 도망간 적이 있었지. 노래 한 곡이 끝나고 두 곡째, 한 사람 두 사람 이십여 명 모여 손벽을 치니까 슬그머니 와서 사진을 찍었지. 이 사진이 네가 찍어준 사진이다. 대학로의 해프닝이야 너도 아는 이야기니 그만두고.

네가 열 살이나 됐을까? 지금은 없어졌지만, 책 한 권이 필요해서 종로서적을 가는데 육교 위에 텃밭 떠난 시든 배추 같은 거지 한 분이 엎드려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고 있었다. 주머니를 뒤적이다가 만 원짜리밖에 없어 발길을 돌려 빵과 우유 그리고 담배 한 갑을 사다가 거지 앞에 내려놓고 쪼그려 앉았다. 한 시간 정도 영업을 대신해줄 테니 육교 밑 시원한 응달에 가서 편히 먹고 오라고 했다. 씨익 웃더니 그러마 한다.

거지 사장님이 내려가고 차마 엎드려 있기가 쑥스러웠지만 한 번 보고 스쳐 가면 그만인 인연인데 창피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겠나 싶어 시멘트 바닥에 머리를 쿡 박고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살짝 고개를 들어 사람들 눈치를 보니 "웬 거지냐?" 하는 표정이다.

그런데 한참을 엎드려 있다 보니 처음엔 재미있더니 웬걸? 슬픔이 복받치면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구걸을 하느라 엎드려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내 설움에 겨워 통곡을 하고 말았다. 통곡 속에 고개를 들어보니 깡통에 지폐가 수북하다. 깡통의 돈을 본 순간 통곡은 흐느낌으로 변했고 흐느낌은 어느새 미소로 바뀌었다.

히죽거리며 시멘트 바닥에 깡통을 엎어놓고 돈을 세어보니 삼만 원이 넘었다. 아무리 인정 없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따듯한 구석이 있으니 아직은 살아볼 만한 세상이구나 싶었다. 잠시 후 육교 위 원래의 사장님이 올라오더니 깡통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다 알고 있다는 눈치다. 미리 반으로 똑같이 나누어 놓았던 깡통의 돈을 거지 사장님께 드렸다.

당연히 반은 내 몫이었다. 거지 사장님 빵값 우윳값 빼고 나면 크게 남는 장사는 아니었지만, 책 한 권 값은 충분했다. 그 후 육교 위 사장님과 오랫동안 친구로 지냈는데 사장님이 영업이 잘 되어 돈 좀 만지더니 사무실 집기라야 거적때기와 깡통뿐이지만 사무실 집기 모두를 챙겨서 어느 날 갑자기 홀연히 사라졌다. 그리고는 끝이었다.

지금은 어떻게 사는지 가끔 궁금할 때도 있지만, 혹시 아버지처럼 턱 괴고 앉아 시 쓴다며 혼자 히죽거리며 있거나 나이로 봐서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나 둘 중에 하나이지 싶구나.

지금은 아버지가 나이가 들어 예전만은 못하지만, 그동안 아버지하고 다니며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아버지 때문에 너희가 고생이 많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평소 생각은 그렇다. 대학로 이름 없는 가수도 좋고 육교 위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손바닥을 내밀어도 좋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만 아니라면 그까짓 것 남의 눈치 볼 거 있겠나? 남들 하는 거 나도 해보고 싶으면 하는 거지.

이수종 시인의 시 한 편 감상하자. 이래서 아버지가 시를 좋아한다. 부정을 긍정으로 만들어 놓지 않더냐? 찬찬히 읽어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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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장사

이수종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는
금언에 이의를 달고 싶다
교보문고 앞 사내
요지부동 돌부처처럼 엎드려
두 손 공손히 돈 모으는 일도 일
장사되느냐고 묻지도
깡통 안을 들여다본 적도 없지만
수년째 직업을 바꾸지 않는 걸 보면
장사는 되나 보다
일생을 팔며 깡통을 떠받들도록
견고하게 만들어준 깡통회사에 찬사를 보낸다
두 손 공손히 돈 모으는 일도 일



태그:#모이, #딸바보, #아버지, #딸사랑,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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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 단어로 짧고 쉽게 사는이야기를 쓰고자 합니다. http://blog.ohmynews.com/han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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