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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5시간 정도 걸려 도착한 광주 5.18 민주묘지. 민주의 문을 지나 들어선 민주항쟁의 공간에는 12지신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살펴보면 12지신이 아니라 맨 앞에 자(쥐)와 해(돼지)가 빠져있다. 누가 시작했는지,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민주주의의 영원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위에 새겨진 광주시민들은 촛불이었다. 자신은 타들어 가며, 그 빛으로 주위를 밝힌 이들이었다.

민주의 문을 들어서면, 영혼들의 다리를 건넌다.
▲ 광주 5.18 민주화묘지 입구 민주의 문을 들어서면, 영혼들의 다리를 건넌다.
ⓒ 한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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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신청한 오월 길 안내해설사 최유진(57)씨가 인사를 건넨다. 광주에서 나고 자랐다는 그녀는 1980년 5월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 "그 날, 이후로 광주는 특별해졌어요. 이불로 온몸을 감싸고 있었죠. 사실 그렇게 엄청난 요구를 한 것은 아니었어요. 오랜 독재 권력의 먹구름이 걷힐 찰나에, 부정하게 권력을 찬탈하려고 하는 이들에 대한 반대를 한 거죠. 결국,그들에게 광주는 자신들의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본보기'였을 뿐이에요."

'우리가 요구했던 것은 민주화요구, 무력탄압반대.. 그렇죠. 지금은 상식인 그런 것들이요.'

광주에 있었던 이들은 시민을 지키기 위한, 시민군이었다. 그들의 총칼은 자기방어용이었던 것이다.
▲ 나는 공산당이 아닙니다. 광주에 있었던 이들은 시민을 지키기 위한, 시민군이었다. 그들의 총칼은 자기방어용이었던 것이다.
ⓒ 한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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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에 들어가자, 제일 먼저 보이는 문구를 가리키며 다시 말을 이어간다. "5월 21일 애국가에 맞추어 집단 발포된 사격에 시민군들은 '살기 위해' 총을 든 겁니다. 그들은 빨갱이가 아니에요. 아니, 어느 정당 소속도 아니죠. 시민학생수습위원회들은 정부와의 협상 끝에 어린아이들과 여성들을 내보냅니다. 그리고 전남도청에서 최후항전을 시작하죠. 그들은 곧 다가올 죽음을 모르지 않았어요. 다만, 무기를 버리는 것이 순응을 의미한다며, 민주주의를 위해 끝까지 대항했죠."

먼저 아이들과 여성들을 내보내고, 마지막까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던 이들
▲ 광주 5.18 기념관 마지막까지 남은 열사들 먼저 아이들과 여성들을 내보내고, 마지막까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던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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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전남도청 진압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그들의 목숨을 앗아간 계엄군들이 그들이 흩뿌리고 간 민주화의 열망의 씨앗까지는 없앨 수 없었다. 그들의 희생을 기리는 애도는 민주화에 대한 시민적 열망으로 이어진다. 이어지는 민주화 열망의 요구들은 5.18의 진상규명을 외치는 87년 6월 항쟁을 잉태하고, 결국 권력독재를 종식하고 한국의 정치 민주화를 만들어내는데 디딤돌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돌아오지 못한 보통사람들

전시관에서 5분 정도 걸어가면, 가슴이 시릴 만큼 봉긋한 무덤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도대체 저 끝없이 누워 있는 이들은 어떤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

광주 민주항쟁에 희생된 평범한 학생
▲ 故 박금희양 광주 민주항쟁에 희생된 평범한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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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 갈래머리를 하고 교복을 입고 있는 꽃처럼 예쁘고 어린 친구 앞에 먼저 선다. 고 박금희 그녀는 전남여상 3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이다. 어머니는 행상을 하시며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꿋꿋이 살아가려는 평범한 소시민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당시 광주항쟁 진압과정에서 발생했던 많은 부상자들로 인해 부족한 헌혈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병원으로 가서 줄을 서서 헌혈을 마치고 돌아서서 집에 오는 중에 일반인에게도 무자비하게 발포되는 총에 희생당한다. 그녀는 자신이 헌혈로 내어주었던 피보다 더 큰 출혈을 머리와 복부에 당하면서 그 자리에서 운명을 달리 하게 된다.

웨딩드레스 사진으로, 마지막을 장식하게 된 광주영령
▲ 故최미애님 웨딩드레스 사진으로, 마지막을 장식하게 된 광주영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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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웨딩드레스 사진으로 영정사진을 대신한 고 최미애님. 25살의 젊은 나이인 그녀는 5살의 아들과 뱃속에는 8개월 된 생명을 품고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이던 남편이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아 걱정되는 마음에 밖으로 나서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무자비하게 발사된 M16소총탄을 맞고 운명을 달리한다. 엄마가 죽자, 태아는 20분 동안 격렬히 뱃속에서 움직였다. 그녀의 친정엄마는 죽은 딸을 부여잡고, 아이를 어떻게든 살리기 위해 근처에 병원에 데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상황이 너무 급박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결국 딸과 뱃속의 생명은 그녀의 친정어머니 집 화단에 묻혔다가 항쟁이 마무리 되어서야,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를 수 있게 되었다.

꽃바구니 두개. 여전히 그리워 한다라는 어머니의 사무친 이야기가 담겨 있는 곳이다.
▲ 故전영진군 꽃바구니 두개. 여전히 그리워 한다라는 어머니의 사무친 이야기가 담겨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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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 전영진 군. 대동고 3학년이었던 그는 학교에서 휴교령이 내리자, 부모님이 밖에 나가지 말라고 권유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광주의 혼란을 그저 묵과할 수 없었던 그는 부모님 몰래 집을 나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을 잃어버린 그의 일기장에는 "엄마 죄송합니다. 조국이 나를 부릅니다"라는 글만 적혀 있었다고 한다.

당시 14살이던 소년은 아직도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행방불명된 상태의 고재덕군을 어머니는 오늘도 기다리신다.
▲ 故고재덕군 당시 14살이던 소년은 아직도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행방불명된 상태의 고재덕군을 어머니는 오늘도 기다리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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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광주의 묘지 앞에 서서 한분 한분의 삶을 설명하는 최유진 씨는 "보통 광주 5월 항쟁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특별한 동기를 가진 이들이 광주를 지켰다고 생각하지만, 광주에 있었던 이들은 매우 평범한 사람들이었어요. 우리처럼 말이죠.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민주주의를 막는 총칼에 희생된 시민들이 많았어요. 심지어 아이까지도 희생되었죠. 그래서 시민군은 총을 든 거였어요. 그래서 주먹밥으로 시민군을 응원하는 이들도, 헌혈로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려고 했던 이들도 있던 거죠."

지금에 와서야 광주를 지켰던, 그리고 그때의 자신을 지켜주었다는 광주의 영령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는 최유진씨는 우리에게도 광주를 기억할 것을 약속해 달라고 했다. "광주 밖을 나가면, 광주사람인 걸 숨기고 살아야 했던 시절도 있었어요. 어둠에 가려져 있던 광주의 시민들은 여러분이 기억해주는 그 순간에 다시 살아날 겁니다."

시민들이 남겨놓은 광주를 향한 메세지
▲ 광주 5.18 민주화전당 포스트잇 시민들이 남겨놓은 광주를 향한 메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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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5월을 기억하고자 하는 이들은 수많은 포스트잇으로 그 맘을 대신한다. 포스트잇을 붙이던 서울의 사회복지사 강상준(38)씨는 "우리 주변에 여전히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많은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기억한다는 것은 행동한다는 거겠죠. 끊임없는 불편함을 견뎌가며 저도 나름대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마음을 다잡기 위해 광주를 방문했습니다." 아이 손을 잡고 온 김지은(42)씨도 아이에게 민주주의가 만들어지기까지 어떤 희생들이 있었는지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1987년 명동성당에서 민주투사 한분 한분의 이름을 불러, 영령들에게 숨을 불어넣은 것처럼, 광주 38주기를 맞이하여 영령들의 이름 한 자 한 자를 다시 불러본다. '우리는 당신들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영원히 기억한다는 포스트잇이 유난히 많았다.
▲ 광주 5.18 포스트잇 문구 영원히 기억한다는 포스트잇이 유난히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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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광주항쟁, #5월의 광주,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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