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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8일. 어두운 새벽 혼자 깨서 작은 방에 앉아 있으니 배를 타고 있는 것 같다. 우주선을 타봤다면 우주선에 비유할 수도. 바람이 그쳤다. 약을 지어 먹은 뒤 기침도 상당 잦아들었다. 일찍부터 빨래, 방 청소. 이제 오전 6시 전인데도 밖이 밝다. 오늘은 도시락을 싸서 오름에 가야지. 어느 오름에 올라볼까나.

 두 발 고양이 강호와 낯선 곳에서 한 달 살기
 두 발 고양이 강호와 낯선 곳에서 한 달 살기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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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랑쉬 오름 가는 버스 안. '즐겁게 여행하며, 길에서 만나는 사람과 동식물 모두를 귀하게 대하고, 도움을 줘야 할 때 할 수 있는 만큼 힘을 더하고, 그렇게 수많은 존재들이 같이 살고 살 자격이 있음을 나의 언어로 계속 전하다 보면 세상에 티끌 만큼이라도 이로울까?' 생각했다.

 두 발 고양이 강호와 낯선 곳에서 한 달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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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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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할아버지. 제주 토박이시라고. 제주도가 많이 바뀌었냐 물으니 "그렇다"고. 좋게 바뀐 건 뭐냐 하니 "교통도 생활도 좋아졌다"고. 나빠진 건 "돈 벌기가 어렵다"고. 서비스업이 늘어나 되레 돈 벌기는 쉽지 않을까 싶었지만 여전히 대다수 도민은 "농업"이 주업이라고, "농산물 가격이 제대로 나와야 되는데" 하셨다. 이번엔 할아버지께서 "혼자 왔냐" 물으셔서 그렇다 하니 "혼자 다니다 실어가버리면 어쩌려고" 해서 "좋은 놈이 실어가면 좋은데" 했더니 작은 풍선에 바람 빠지듯 웃음을 터뜨리시며 "그래, 그래" 하셨다.

 두 발 고양이 강호와 낯선 곳에서 한 달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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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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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께서 먼저 온 버스를 타고 떠난 뒤 내가 탈 환승 버스도 도착. 그런데 차에 올라서 보니 교통카드가 없었다. 눈치를 챈 기사가 "천천히 찾아보세요. (정류장)바닥에 떨어졌나도 보시고" 하며 시간을 주었다.

곧바로 기사 뒷자리에 앉은 안내원(제주 관광지 순환버스에는 안내원이 있습니다)이 "저기 있네" 하며 바닥에 누워 있는 카드를 가리켰다. 내가 살던 도시에선 기대하기 어려운 친절과 여유. 집을 나서자마자 기분 좋은 만남이 두 번이나, 게다가 날씨까지 화창하다!

 두 발 고양이 강호와 낯선 곳에서 한 달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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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서 내려 다랑쉬 오름 입구까지는 제법 걸어야 했다. 하지만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서나 들었던 녹음된 새 소리가 사방에서 실제로 들렸다. 이색적이고도 예쁜 제주 특유의 오름과 논밭, 유채꽃, 바다, 그 위에 성산일출봉과 우도까지 보이는 절경 덕에 걷는 내내 설레고 흐뭇햇다. 새삼 제주에 있다는 실감이 들면서 공간 이동을 한 것처럼 신기했다. 큰 오름 옆으로 오름을 닮은 무덤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 모습이 따스하고 정다워 보였다.

 두 발 고양이 강호와 낯선 곳에서 한 달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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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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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 입구에 다 와서야 물과 수저를 챙겨오지 않았음을 알았다. 도시락까지 만들어 가져 왔으면서. 여행 중에 일회용품을 안 쓰려 노력하는데 자꾸만 깜빡깜빡한다. 하지만 그 덕분에 다랑쉬 오름 탐방안내소에서 또 한 번 유쾌한 만남이 있었다.

주변에 매점이 없어 나무 젓가락이라도 구해볼까 싶어 문을 두드렸는데, 진중한 표정의 해설사 분이 뜻밖에 환한 웃음으로 맞아주었다. 사정을 듣고는 도시락까지 가져 다니다니 "알뜰하다"며 이런저런 유용한 조언도 주셨다.

 두 발 고양이 강호와 낯선 곳에서 한 달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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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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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에 오른 지 10분이나 됐을까. 전망 좋은 명당을 발견, 본래는 오름 구경을 마치고 먹으려던 도시락을 급히 열었다. 메뉴는 당근과 감자, 버섯과 함께 슈퍼에서 파는 '모듬 해물'을 넣어 만든 카레밥. 멋진 풍경, 공기, 기분까지 더해져 혼자서, 나무 젓가락 사이로 카레에 젖은 밥알이 자꾸 흘러 내렸음에도 무척 즐거운 식사였다.

여기서 잠깐, 여행 직전 구입해 기대한 것보다 훨씬 유용하게 사용 중인 일인용 밥솥을 소개한다. 손 한뼘 만한 크기로 15~20분 안에 반찬 한 가지와 밥을 동시에 할 수 있고 코드만 뽑으면 깜찍한 도시락으로 변신. 장기간 여행자나 혼밥족에 추천한다.

 두 발 고양이 강호와 낯선 곳에서 한 달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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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랑쉬 오름 정상. 올라 오며 내내 궁금했던 아끈 다랑쉬 오름부터 눈 앞에 펼쳐진 오름 군단들의 제각각 이름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반갑다. 하나하나 이름을 알고 다시 보니 훨씬 친근하게 느껴진다.

오름은 크고 작은 화산체를 이르는 제주 사투리로, 이렇게나 오름이 많다는 것은 옛날옛적 아주 오랜 동안 이 섬 전체가 불바다였음을 증명하는 것. 이런 생각을 하면 주변의 모든 것, 지금을 사는 내 존재가 비현실 같다. 화산쇄설물이 식어 굳은 붉은 바위에 손을 얹으니 여전히 불을 품고 있는 듯 따뜻했다.

 두 발 고양이 강호와 낯선 곳에서 한 달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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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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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분화구를 따라 걷는 길은 마치 다차원의 시간 속을 혹은 나무가 살아 움직이고 말을 거는 환상 속 같았다. 어느새 한 바퀴를 돌아 처음 자리에 와 있음을 알고는 어리둥절했다. 오름 정상에 막 도착해서 본 반려인과 함께 온 개를 다시 보니 현실감이 되살아났다. 다랑쉬 오름은 동물 입장을 따로 금지하고 있지 않아 강호를 집에 두고 온 게 안타까웠다. 제주 명소에는 자연 보호 등을 이유로 동물과의 동행을 금지하거나, 그렇지 않은 곳도 있으니 방문 전 확인이 필요하다.

 두 발 고양이 강호와 낯선 곳에서 한 달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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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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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에서 내려와 다시 차 타러 가는 길. 길가의 동백나무 한 그루가 '제주 4.3 사건'을 떠올렸다. 붉은 꽃무더기가 바닥에 한가득 떨어져 시들어 가고 있는데, 마침 그 앞에 땅이 파헤쳐져 있다. 그 아래로 떨어진 꽃들의 모습이 70년 전, 이 섬 전체에서 자행된 학살 직후를 연상케 했다.

목이 댕강 잘리듯 꽃이 통째로 떨어지는 동백꽃은 4.3 사건의 상징화다. 당시 오름 인근에 오름과 같은 이름을 가진 '다랑쉬 마을'은 가옥이 모두 불 타 사라졌고, '다랑쉬굴'에서는 참화를 피해 굴 속에 숨어 지내다 결국 죽임 당한 주민 11명의 유골이 44년 만에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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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6년 전 귀향해 아주 작은 여행자 공간을 꾸리다 다시 여행자 신분으로. 내 안의 두려움과 무지를 깨고 더 넓은 세상을 만나고 싶어서, 다리가 두 개 뿐인 하지만 씩씩하고 명랑한 고양이 강호에게도 그런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 낯선 곳에서 한 달 살기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첫 목적지는 제주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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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에서 한 달 살기 × 24. 두 발 고양이 강호와 함께. 돌아가면 다시 여행과 여행, 삶과 삶을 잇는 멋진 여행자 공간(게스트하우스)를 열 거에요! 우리의 실시간 여행이 궁금하다면?facebook.com/travelfor...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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