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엄마는 아파서 누워있을 자유도 없어!" 엄마들끼리 모이면 흔히들 주고받는 말입니다. 더 이상 이 말이 사실이 아닌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엄마들도 돌봄받는 세상을 위해 지극히 개인적인 독박돌봄노동 탈출기를 시작합니다. [편집자말]
이전 기사 : 나는 허락, 남편은 통보... 여기선 가정폭력이었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을 떠나 완전히 새로운 곳에서 사는 경험은 익숙해진 삶의 방식들을 돌아보게 한다. 캐나다의 직장문화, 가정문화, 사회시스템은 한국과는 많이 달랐다. 이곳에서 태어나서 자라거나 오랫동안 살고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은 불평등이 있다고 이야기 하곤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40년을 살아온 우리 부부에게 이곳의 환경은 부당하게 여겨왔던 가정에서의 돌봄문화를 바꿀 수 있는 충분한 양분을 제공했다.

캐나다가 제공해준 환경들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저녁 시간이 있는 이곳에선 부부가 함께 가사와 육아를 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저녁 시간이 있는 이곳에선 부부가 함께 가사와 육아를 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 pexels

관련사진보기


캐나다의 직장문화는 남편에게 변화에 동참할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허락했다. 이곳은 대부분의 직장이 8시간 근무를 엄격히 지킨다. 아침 9시에 출근하면 오후 5시 퇴근, 아침 7시에 출근하면 오후 3시에 퇴근하는 식이다. 점심시간은 따로 없고 근무 중에 스스로 잠시 짬을 내어 먹으면 된다. 상사의 눈치를 보느라 퇴근을 못하는 일은 전혀 없다.

캐나다에서 술은 약물보다도 엄격히 관리된다. 처음 도착했을 때 낯설었던 것 중 하나가 마트나 편의점에서 맥주조차 구입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알코올이 들어간 음료는 주류전문점에서만 판매하며, 가정이나 주류 판매가 허용된 식당에서만 마실 수 있다. 야외 공원이나 등산로 등에서 술을 마시는 건 처벌 대상이다.

한국에선 술을 마시고 한 행동에 대해 관대한 문화가 있지만, 여기서 술을 마시고 범법행위를 하면 음주에 대한 책임까지 물어 가중 처벌된다. 연말이나 특별한 날 동료들끼리 식사를 하더라도 우리나라처럼 술을 권하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남편이 회식을 하고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은 1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여기서 남편은 오후 5시면 어김없이 퇴근하고 오전 7시쯤 출근한 날엔 오후 3시에 퇴근, 아이 학교에 들러 아이를 픽업해 함께 집에 온다.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저녁 시간이 있는 이곳에선 부부가 함께 가사와 육아를 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이웃집 부엌에서는 아침, 저녁이면 늘 부부가 함께 식사 준비를 하는 모습이 연출된다.

가족 모임에 초대를 받아 가더라도, 초대한 가정의 남편이 함께 음식을 준비하고 설거지도 같이 한다. 어느 모임이든 집에서 식사를 할 경우 여자들은 부엌에서 일을 거들고, 남자들은 거실 TV앞에 앉는 한국과는 다른 모습이다.

변화를 실천하다

 우리는 가족이 함께 있는 시간에는 각자 할 수 있는 만큼 가사에 참여하기로 했다
 우리는 가족이 함께 있는 시간에는 각자 할 수 있는 만큼 가사에 참여하기로 했다
ⓒ pexels

관련사진보기


이런 환경 속에서 우리는 가족이 함께 있는 시간에는 각자 할 수 있는 만큼 가사에 참여하기로 했다. 물론, 여기엔 만 9살 난 아들 녀석도 함께했다.

먼저 실천하기 시작한 건 스스로 자신의 옷을 정리하기였다. 한국에선 빨래를 한 후 모든 가족의 옷을 다 갠 후 옷장에 정리하는 것까지 모두 내가 담당했었다. 그런데 그 결과는 각자 자기 옷을 찾아 입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난 옷을 정리해주고 아침에 챙겨주는 돌봄을 중단하기로 했다.

남편과 아이가 직장과 학교에 있는 낮 시간 동안 빨래를 분류하고 세탁하는 일은 내가 했지만, 건조시킨 옷들은 그대로 두었다. 남편과 아들은 귀가 후 건조기를 확인하고 자신의 옷을 챙겨서 정리했다. 덕분에 남편은 아침에 스스로 옷을 찾아 입을 수 있게 되었고, 아이는 자신의 옷장을 스스로 정리하며 뿌듯해했다.

남편과 아이가 정리해 놓은 옷장이 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난 관여하지 않았다. 주부로서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각자의 옷장이니 당사자들이 불편하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마음먹자 훨씬 편안했다.

다른 하나는 식사 준비 시 다함께 부엌에서 거들기였다. 이전까지 내가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남편과 아들은 각자 자기 할 일을 하거나 휴식을 취했고, 난 혼자서 식탁을 차려놓고 남편과 아들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그 결과는 내가 없을 때 냉장고에 무엇이 있는지, 조미료는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몰라 스스로 밥을 해먹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난 식사를 '대접하는 것'을 포기하고 함께 만들어 먹기로 마음 먹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쉽지 않았다. 남편은 내가 "식사준비 하자"고 말을 해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다. "양파를 이런 크기로 잘라줘" 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말하면 딱 그것만 하고 다시 소파로 돌아가 앉았다.

반면 아들은 변화를 빨리 받아들였다. 마침 이곳 학교서 양성평등과 젠더 다양성에 대해 배우고 있던 아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수저를 놓고 재료 준비를 도우며 집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진 것에 뿌듯해했다. 아마도 아들은 가부장적 문화의 습관들이 아직 몸에 배지 않았기에 더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게다. 하지만 남편은 일일이 구체적으로 알려주어야 했고, 딱 그 순간에만 움직였다. 난 나도 모르게 잔소리가 많아져 가고 있었다.

남편에겐 더 어려운 변화

그러던 어느 일요일 낮이었다. 남편에게 냉장고에서 반찬을 좀 꺼내서 식탁에 놓아달라고 부탁을 한 후 나는 밥과 국 등 뜨거운 요리를 마무리 하고 있었다. 남편은 식탁에 반찬을 가져다 놓고 앉아서 반찬들을 집어 먹기 시작했다. 나는 한 마디 했다.

"나 지금 국이랑 밥 뜨고 있는 거 안 보여? 와서 좀 거들고 같이 먹기 시작하면 좋잖아."

그러자 남편이 버럭 화를 냈다.

"난 도대체 내가 어디다 맞춰야 하는지 모르겠어. 맨날 너한테 혼나고 교육받는 느낌이야. 나도 안다고. 너 혼자 다하는 게 부당한 거라는 거. 나름 노력하고 있는데 내가 오랫동안 그렇게 안 해와서 머리로 아는 만큼 몸으로는 안 된단 말이야!"

이 날 우리는 잠시 냉전의 시간을 보낸 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남편의 입장을 좀 더 알게 되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헌신적인 어머니를 둔 남편에게 이런 변화는 참으로 낯선 것이었을 테다. 나에게도 오래된 습관을 바꾸는 일이라는 점에서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변화의 의미는 서로에게 매우 상반된 것이었다.

내게 가사 일을 함께 하고, 보다 평등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변화는 그동안 채워지지 않았던 돌봄 받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반면 남편에겐 과다 충족됐던 돌봄 욕구를 내려놓는 일이었다. 나는 결핍된 것을 인지하고 요구하며 채워 가면 됐지만, 남편은 그동안 자동적으로 충족되어 왔던 것들을 스스로 해야 했으며 편안함을 포기해야 했다. 나보다 남편에게 이런 변화가 더 힘든 건 당연했다.

나는 남편에게 힘든 입장은 이해한다고 공감해 주었다. 하지만 변화를 중단할 수는 없다고, 이전처럼 계속 억울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면 우리 부부 사이가 멀어질 것 같다고 이야기 했다. 결혼 10년 차쯤 된 한국의 내 친구들과 이웃들은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남편은 큰 아들"이라고 표현하곤 했다. 이들은 남편을 아이처럼 생각하고 대하면 이런 갈등에서 벗어날 수 있다며 나한테 그만 싸우고 포기하라는 충고를 많이 해줬다.

하지만 난 우리의 관계를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남편에게 "나는 당신을 내 큰 아들로 대하고 싶지 않다"고, 서로를 존중하고 보살피면서, 함께 성장하고 늙어가길 진심으로 바란다고 이야기 했다.

그 날 저녁 남편은 내게 낮에 화를 낸 일에 대해 미안하다며 그동안의 돌봄에 대해 고맙다고 쪽지를 남겼다. 나 역시 남편을 가르치려 들지 않고, 보다 존중해주며 노력해 주는 점에 대해 '고맙다'고 말해주기로 다짐했다.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댓글1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심리학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사람은 물론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하며 평등과 생명존중을 담은 글을 쓰고 소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