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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아파서 누워있을 자유도 없어!" 엄마들끼리 모이면 흔히들 주고받는 말입니다. 더 이상 이 말이 사실이 아닌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엄마들도 돌봄받는 세상을 위해 지극히 개인적인 독박돌봄노동 탈출기를 시작합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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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넌 진짜 좋겠다. 남편 잘 만나서 외국 생활도 해보고. 아들도 영어 배우고 좋네. 부럽다 부러워! 너 남편한테 잘해!"

남편이 캐나다 밴쿠버에서 근무하게 됐다는 소식을 들은 내 지인들은 대부분 이렇게 반응했다. 난 외국 생활이 기대되면서도, 동시에 씁쓸한 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밴쿠버에서 남편은 자신의 경력을 계속 쌓아갈 수 있지만, 나로서는 또 다시 커리어를 중단하고 아이와 남편 뒷바라지에 온 시간을 써야 함을 의미했다.

남편은 워킹비자, 아이는 학생비자를 발급받았지만 내 비자는 가족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동반한 사람이라는 의미의 동반비자였다. 또 다시 나의 사회적 정체감에 손상을 받는 느낌이었다.

1년 반. 정해져 있는 시간이니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말고 즐겁게 열린 세상을 볼 수 있는 기회로 만들자고 마음을 다 잡고 출국준비를 했다. 무척 분주한 가운데 여기저기서 연락이 왔다. "그래도 1년 반이나 떨어져 있는데 우리 얼굴 한 번 보자!" 나도 그랬다. 친구들, 상담소동료들, 같이 공부하는 선후배들 한 번씩 다 만나서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내가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날은 남편이 약속을 잡지 않은 날, 남편 회사에서 회식을 하지 않는 날, 남편이 골프모임에 가지 않는 날, 아이를 봐 줄 누군가가 있는 날이어야 했다.

대부분 맞벌이를 하는 친구들과 동료들인지라 만나는 시간은 평일 저녁 늦게 혹은 주말이어야만 했다. 아이를 혼자 놔둘 수는 없었기에 나는 최소 한 달 전부터 남편과 시간을 조율했다.

조심스레 묻고, 몇 번이나 확인을 하고 남편의 허락을 받는 것 같은 기분으로 약속을 잡았다. 왠지 좀 불공평한 느낌이 들었지만 지인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좋았다. 주말에 모임이 있을 땐 반나절 독박육아도 해주는 남편에게 고맙고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나는 허락받기, 남편은 통보하기

 누군가 만나자고 해오면 나의 대답은 늘 "남편한테 물어볼게요"였다. 머릿속엔 '또 집을 비워도 될까? 아이는 어쩌지?' 하는 온갖 걱정들이 가득 찼다.
 누군가 만나자고 해오면 나의 대답은 늘 "남편한테 물어볼게요"였다. 머릿속엔 '또 집을 비워도 될까? 아이는 어쩌지?' 하는 온갖 걱정들이 가득 찼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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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약속을 잡아놓고도 막상 남편에게 갑작스런 회식, 골프약속 등이 생기면 내가 양보해야 했다. 남편 역시 해외 파견 직전이라 각종 모임과 단체, 직장의 각 부서에서 환송회를 해야 한다는 건 이해가 됐다. 그런데 난 한 달 전부터 의논해서 약속을 잡는 반면, 남편은 모든 약속을 거의 통보하듯 해버렸다.

혹시라도 "나 그날 약속 있다고 했잖아. 저번에 아이 봐줄 수 있다고 해서 약속 잡은 건데?" 라고 반문하면 돌아온 대답은 "어머님 부르든지"가 전부였다. 난 또 매우 미안해하면서 어머님께 전화를 드리거나, 친구들에게 사정을 설명하며 약속을 변경해야 했다.

전통적인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방법은 남편과 아들을 성공시키는 길뿐이었다. 물론, 요즘엔 여성의 사회활동이 장려된다. 하지만 여성의 사회적 성공이 인정받는 것은 가정에서 돌봄 노동까지 잘 해내고, 남편과 아이들을 출세시켰을 때에 한해서다.

아무리 사회에서 성공을 한 여성이라 해도 남편과 자녀에게 충실하지 못했다면, 이 여성의 성공은 평가절하 된다. 반대로 남성의 성공 기준에 가정에서 얼마나 충실한 남편이자 아빠였는지는 거의 반영되지 않는다.

이 당시(불과 1년 전이다) 우리 가정은 이런 가부장적 논리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의 사회적 성취나 관계보다 늘 남편의 사회적 성공이나 관계가 우선이었다. 때문에 나는 모든 약속을 남편에게 맞춰야 했고, 남편 역시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내가 자처한 면도 없진 않았다. 누군가 만나자고 해오면 나의 대답은 늘 "남편한테 물어볼게요"였다. 머릿속엔 '또 집을 비워도 될까? 아이는 어쩌지?' 하는 온갖 걱정들이 가득 찼다. 이때까지도 난 스스로를 가부장적 논리에 가둬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들이 무척 숨막혔다. 함께 노력해보자고 약속한 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실제로는 별로 달라진 게 없다고 생각하니 한숨만 나왔다. 출국 준비로 분주한 가운데 남편과 감정소모를 벌이고 싶지 않아 잠자코 있었지만, 이전부터 쌓아온 부당함과 억울함은 턱 밑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이런 갈등 속에 지난해 여름. 우리 가족은 캐나다 밴쿠버에 도착했다.

 캐나다에서 정의하고 있는 가정폭력의 범주. 신체적 학대 뿐 아니라 경제적인 능력을 통한 억압, 사회활동을 제약하는 것, 아이에게 죄책감을 들도록 하는 것, 정서적인 학대 모두가 가정폭력으로 간주된다.
 캐나다에서 정의하고 있는 가정폭력의 범주. 신체적 학대 뿐 아니라 경제적인 능력을 통한 억압, 사회활동을 제약하는 것, 아이에게 죄책감을 들도록 하는 것, 정서적인 학대 모두가 가정폭력으로 간주된다.
ⓒ 송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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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사회활동 제약은 일종의 폭력

캐나다에 도착한 후 살 집이 정리되고, 아들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자마자 나는 밴쿠버 외곽의 한 다문화 여성/아동 지원센터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여성리더십워크숍에 등록을 했다.

서툰 영어에도 불구하고, 선뜻 이 워크숍에 참여했던 건 어떻게든 내 마음 속의 분노와 갈등을 풀고 싶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리고 이 워크숍은 내게 진짜로 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먼저, 남편의 스케줄에 맞춰주느라 나의 사회생활을 양보해야 했던 한국에서의 상황은 이곳에선 가부장적 사회의 폐해 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갈 일이 아님을 알게 됐다. 배우자의 사회활동에 제약을 주는 것. 캐나다에선 분명한 가정폭력의 한 종류였다.

가정폭력하면 대부분 신체적 학대를 떠올리는 한국과 달리, 캐나다에서 가정폭력은 매우 범위가 넓다. 경제적인 능력을 이용해 배우자를 억압하는 것, 파트너의 경제적 활동을 막는 것, 사회적 관여를 제약하는 것, 말이나 행동으로 정서적인 상처를 주는 것 등이 모두 가정폭력에 해당한다. 이런 폭력들은 남편이 아내에게 행하는 것만 뜻하지 않는다. 남편과 아내 쌍방향에서 모두 가능한 폭력들이다.

또한, 아이에게 죄책감이 들도록 유도하는 행동도 가정폭력의 범주에 들어간다. 한국에서 아이문제가 생겼을 때 부부들이 흔히 하는 말 "당신이 그러니까 애가 이 모양이지!"라는 말도 일종의 폭력이다.

즉, 육아에 대한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하는 것 역시 폭력이라는 것이다. 이런 것들로 인한 피해신고가 접수되면 가정폭력은 철저하게 공적인 영역에서 다뤄지며 심리상담가, 경찰, 법률전문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함께 해결책을 모색해 간다.

이런 관점에서 나를 돌아보니, 그동안 느껴왔던 분노와 억울함이 타당하게 느껴졌다. 내가 부당하다고 느껴왔던 일들은 오래된 가부장제 문화 속에서 굳어진 관행이니 어쩔 수 없이 참아야 될 일이 아니라, 명백하게 개선해가야 하는 것이었다.

'enabler'가 되지 않기로 다짐하다

 'enabler'라는 개념 안에는 상대방을 돕는 것으로 타인을 망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포함된다
 'enabler'라는 개념 안에는 상대방을 돕는 것으로 타인을 망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포함된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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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가지 유용한 배움은 'enabler'라는 개념이었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조력자' 나 '도와주는 사람' 정도로 해석된다. 하지만 이 개념 안에는 상대방을 돕는 것으로 타인을 망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포함된다.

'enabler'들은 도움을 제공함으로써 상대방이 내게 의존토록 하고 결국엔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없도록 한다. 이런 행동에는 상대방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은 무의식적 의도가 담겨있다.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양분화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내는 집안일을 도맡아 한다. 남편의 식사와 옷가지들을 모두 챙겨주면서 남편으로 하여금 기본적인 자기 돌봄조차 아내에게 의존하도록 만든다.

또한, 남편은 직·간접적으로 아내의 사회활동을 제약함으로써 경제적으로 자신에게 의존하도록 만든다. 이 같은 가부장적 성역할에 근거한 결혼생활은 서로를 서로의 'enabler'가 되게 하고 결국 각자를 독립적인 인격체로 존중하지 못하게 만든다.

내가 아이의 양육을 홀로 책임지며 남편의 옷을 챙기고 퇴근 시간에 맞춰 저녁을 차려놓기 위해 애를 쓰면서 전전긍긍했던 마음 안에는 이런 'enabler'의 심리가 담겨 있었다. 이런 일들을 그만두는 것은 전혀 미안해 할 일이 아니었다.

반대로 남편이 스스로 옷을 챙겨 입고, 식사를 준비하며 함께 낳은 아이를 돌볼 수 있도록 과도한 돌봄 제공을 중지하는 것. 이것이 독립적인 한 사람으로서 남편의 성장을 돕는 일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 워크숍을 통해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에게 부과한 돌봄노동을 거부하고 싶을 때마다 올라왔던 내 안의 죄책감을 걷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enabler' 가 되지 않기로 다짐하며 지나친 돌봄행동을 거둬들이기로 결정했다. 다행히도 한국과는 많이 다른 캐나다의 사회분위기는 나의 이런 다짐을 실천할 수 있는 적절한 환경을 제공해 주었다.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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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사람은 물론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하며 평등과 생명존중을 담은 글을 쓰고 소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