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강진읍 사의재길의 사의재 - 다산 선생의 유배지로 널리 알려져있다.
▲ 사의재-맑은 생각의 공간 강진읍 사의재길의 사의재 - 다산 선생의 유배지로 널리 알려져있다.
ⓒ 강진군청

관련사진보기


전남 강진군 강진읍 사의재(四宜齋)는 널리 알려진 곳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1801년 유배 와서 처음 5년 동안 묵은 곳. 사의재는 '맑은 생각의 공간', 그때나 지금이나 맑은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기는 참 어려웠나 봅니다. 머문 곳은 유배지의 골방이었지만, 생각은 갇히지 않았지요.

선생이 유배지에서 쓴 자기 성찰의 '수오재기'나, 자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늘 탁트인 느낌을 받습니다. 유배지에 대한 선생의 평가도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과학적입니다. 다산 정약용 문집 '편지글'의 한 부분을 보면, 선생의 강진에 대한 평가는 이렇습니다.

"어떤 북방 사람이 나를 걱정하며, "강진은 탐라로 가는 나루이며 장독(덥고 습한 기운에서 생기는 병)이 서린 고장으로서 죄인을 귀양 보내는 곳인데 그대가 어떻게 살 수 있겠소?" 하기에, 내가 말했다. "아, 탐라의 원통함이 여기에까지 이르렀단 말입니까. 내가 5년 동안 살아보니 더위는 북방보다 약하고, 겨울 추위가 그리 심하지 않습니다. 강진 땅은 중국의 회남과 위도가 거의 같고, 북쪽의 한양과 8백 리 거리로서 북극과의 위차가 한양과 3도 정도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여름을 쪼개다가 겨울에 붙이고 싶어 하는 것이 북방 사람들의 소망인데, 지금 강진이 이와 같습니다. 한 겨울에도 땅이 얼지 않아 농부는 들에서 밭을 갈고, 배추가 새파랗게 자라며 노란 병아리가 노닙니다. 사람들이 이런 것을 보면서도 굳이 장독이 서린 곳이라고 하는 것은 여름 해는 짧으면서도 오히려 서늘한 기운이 높은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유배지라고 습하고 병이 돈다는 고정 관념을 사실에 기반해서, 한마디로 일축하고 있습니다. 자연 환경이 사람을 살고 못살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조선시대 적지않은 유배문학이 "님(임금이지요)과 떨어져 이곳에서는 한시도 살 수 없다"면서 한양을 향해 끊임없이 '구애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과 견주어 본다면, 참 색다른 유배지 평가입니다. 구태여 고르고 골라 오지로 유배를 보낸 성의(聖意)를 간단하게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생의 낙천성과 탄력성도, 조선 사회로 시야를 돌리면 인내심을 잃었나 봅니다. 별로 여유가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널리 알려진 '구우(久雨)'를 보면, 선생의 답답함과 초조함이 느껴집니다. 구우는 '오랜 비'니까, 그대로 해석하면 '장마 비'겠지만, 내용은 '오랜 조선 사회 모순'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실려있지요.

 窮居罕人事  궁거한인사
 恒日廢衣冠  항일폐의관
 敗屋香娘墜  패옥향낭추
 荒畦腐婢殘  향휴부비잔
 睡因多病減  수인다병감
 秋賴著書寬  추뢰저서관
 久雨何須苦  구우하수고
 晴時也自歎  청시야자탄

 궁벽하게 사노라니 사람 보기 드물고
 항상 의관도 걸치지 않고 있네.
 낡은 집엔 향랑각시 떨어져 기어가고,
 황폐한 들판엔 팥꽃이 남아 있네.
 병 많으니 따라서 잠마저 적어지고,
 글짓는 일로써 수심을 달래 보네.
 비 오래 온다 해서 어찌 괴로워만 할 것인가
 날 맑아도 또 혼자서 탄식할 것을.

마지막 구절을 보면, 자연의 비는 언젠가 그치겠지만, 사람이 만드는 비는 그치지 않는 현실에 대한 탄식이 담겨 있습니다. 사고 방식이 이러니 유배지를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선생의 분노가 극에 달한 순간을, 어쩌면 강진의 사의재에서 선생이 쓴 작품에서 느껴볼 수 있습니다. 따뜻한 봄날, 돌담의 잡초하나까지 제 것을 피워내려는 계절이기에 선생이 '애절양'이 더 와 닿습니다. '다산시문집'에 실려 있고, 역시 잘 알려진 이야기지요. 선생의 원문에 조금 상상력을 더하면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한 농부가 아이를 낳았습니다. 전라도 지역의 농부가 아닐까요. 사내아이였지요(하지만 벼슬아치에게는 병역세를 미리 거두어 들일 수 있는 다시 없는 기회입니다). 아마 농부는 고추와 숯을 섞어 금줄을 달고, 덩실덩실 춤을 추고, 마을 사람들은 앞다투어 산모의 건강과 아이의 무병장수를 기리는, 축복의 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나 봅니다. 출산과 동시에 아이 몫의 '세금 고지서(정확히는 미래 병역세 선납 고지서)'가 날아들고, 축복은 좌절과 분노와 절망으로 순식간에 변했던 것입니다. 이제나 그제나 현금이 없다면, 차압을 당하기 마련입니다. 농부에게 차압대상은 이른바 경운기 격인 황소였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택시기사의 '택시'이고, 자영업자의 '가게'인 셈이지요. 그 절망과 분노가 어떠했을지 쉽사리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기껏해야 이런 정도의 유추를 해 봅니다. 용감하게 둘째 아이를 낳은 맞벌이 부부가, 결국 외벌이가 되면서 아파트 할부금을 넣지 못해 이사를 해야된다는 정도지요. 그래서 사실만을 전달하겠습니다. 농부는 바로 자신의 성기를 자르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피로 물든 남편의 속고의를 본 산모의 충격과 죄책감은 상상도 하기 싫습니다.

전해 들은 농부의 사연을 선생은 애절양에 담습니다. 1803년 강진 유배 기간, 사의재에 머물던 시기입니다. 유배 기간에도 근신하지 않고, 사대부의 고상한 필체를 다 내던지고  이런 글을 썼으니, 당시 사대부에게 '미운털'이 하나 더 박혀 쉽사리 풀려나지 못했거나, 풀려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18년 유배생활이 이상하지 않습니다. 글솜씨보다는 어떤 글을, 어느 시기에 쓸 수 있는지도 잘 배워야할 것 같습니다.

  蘆田少婦哭聲長(노전소부곡성장) 갈밭마을 젊은 아낙 통곡소리 그칠 줄 모르고
  哭向縣門號穹蒼(곡향현문호궁창) 관청문을 향해 울부짖다 하늘 보고 호소하네
  夫征不復尙可有(부정불복상가유) 정벌 나간 남편은 못 돌아오는 수는 있어도
  自古未聞男絶陽(자고미문남절양) 예부터 남자가 생식기를 잘랐단 말 들어 보지 못했네 

  舅喪已縞兒未澡(구상이호아미조) 시아버지 상에 이미 상복 입었고 애는 아직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三代名簽在軍保(삼대명첨재군보) 조자손 삼대가 다 군적에 실리다니
  薄言往愬虎守閽(박언왕소호수혼) 급하게 가서 호소해도 문지기는 호랑이요
  里正咆哮牛去皁(이정포효우거조) 향관은 으르렁대며 마구간 소 몰아가네    

  磨刀入房血滿席(마도입방혈만석) 남편 칼을 갈아 방에 들자 자리에는 피가 가득
  自恨生兒遭窘厄(자한생아조군액) 자식 낳아 군액당했다고 한스러워 그랬다네
  蠶室淫刑豈有辜(잠실음형기유고) 무슨 죄가 있어서 잠실 음형당했던가?
  閩囝去勢良亦慽(민건거세양역척) 민땅 자식들 거세한 것 진실로 역시 슬픈 일이네    

  生生之理天所予(생생지리천소여) 자식 낳고 사는 건 하늘이 내린 이치기에
  乾道成男坤道女(건도성남곤도녀) 하늘의 도는 아들 되고 땅의 도는 딸이 되지
  騸馬豶豕猶云悲(선마분시유운비) 불깐 말 불깐 돼지도 서럽다 할 것인데
  況乃生民思繼序(황내생민사계서) 하물며 뒤를 잇는 사람에 있어서랴 

저는 특히 '남녀가 만나, 자식 낳고 사는 건 하늘의 이치'라는 구절이 와닿습니다. 왜냐하면 이 이치가 이제 현대에는 과연 잘 통하느냐는 의문이 가시지 않는 탓입니다. 조선시대 농부는 자신의 성기를 '낫'으로 잘랐습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는 '피임약'이라는 점잖은 문명의 이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늘 저출산의 문제가 제기됩니다. 물론 저출산을 농부의 선택과 같은 절망적인 경우와 연결지을 수 없습니다. 다양한 가치관이 공존하고, 여성과 남성 모두,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젊은 맞벌이 부부가 '우리 아이'를 떠올리는 순간, 회사나 생계 그리고 양육의 과제가 무의식적으로 겹친다면, 현대인도 농부의 낫에 자유롭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추신1) 다산 선생은 유배지에서 자녀들에게 소소하면서도, 진심어린 편지를 많이 보내십니다. 그런데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입에 맞는 음식은 너를 속인다"라는. 사실 부친이 유배지에 있는데 자식들이 호의호식하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추신2) 5월은 많은 분들의 결혼 기념일이 있는 달이지요. 저 또한 그렇습니다. 제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는 5월 18일 전후로 결혼하는 신부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최루탄에 신부 화장과 눈물이 범벅이되어 신혼여행을 가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조선시대나 그제나, 세상살이 만만치 않다는 첫 경고를 신혼부부에게 했던 셈이지요. 요즘은 만만해 졌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6,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