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판문점 선언으로 '가보지 않은 길'이 열린 지금,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한 국가보안법의 존재 이유를 묻습니다. 북한영화를 소지했다는 이유로 기소돼 법정싸움 끝에 최종 무죄를 선고받은 북한영화 전문가 유영호씨의 이야기를 싣습니다. [편집자말]
북한영화 전문가 유영호씨.
 북한영화 전문가 유영호씨.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2016년 봄, 서울서부지방법원 308호 법정에서는 북한영화 <심장에 남는 사람>이 상영되고 있었다. 판사와 검사, 서기, 변호인 그리고 법정경위까지 아홉 명이 빔프로젝터에서 쏘아져 나온 장면을 말없이 감상했다. 피고인석에는 지금 상영 중인 영화를 포함, 총 20편 북한영화를 보관했다는 이유(국가보안법 위반)로 기소된 '북한영화 전문가' 유영호씨가 앉아 있었다.

이 자리는 유씨가 소지한 북한영화가 과연 이적표현물에 해당하는지 따져보기 위해 마련됐다. 검사와의 공방 끝에 "직접 보고 판단하자"라는 변호인의 제안을 재판부가 받아들인 것이다. 영화가 상영되는 중간 유씨는 피고인석에서 법정 안을 쓱 훑어봤다. 대한민국 법정에서 북한영화를 본다는 사실이 생소하게 다가왔다. 동시에 허탈했다. 검사가 이적표현물로 지목한 이 영화는 당장 유튜브에 검색만 하면 누구든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 북한 연구가인 그는 어쩌다 이 법정에 서게 됐을까. 시작은 2011년 12월 6일이었다.

종북세력과의 전쟁 선포했던 검찰

북한영화 전문가 유영호씨. 그가 압수당했던 책들에는 아직도 '압수물' 스티커가 그대로 붙어 있다.
 북한영화 전문가 유영호씨. 그가 압수당했던 책들에는 아직도 '압수물' 스티커가 그대로 붙어 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한상대 검찰총장은 2011년 8월 11일 취임하며 '종북좌파 세력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리고 같은 달 25일 검찰은 '왕재산 간첩단' 수사결과를 발표한다. 북한 노동당 대남기구인 '225국'의 지령을 받아 지하당을 결성, 간첩활동을 한 '조직'을 적발했다는 것이다. 단원으로 지목된 5명이 구속됐고, 그 외 40여 명이 수사망에 올랐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유씨였다.

유씨는 처음으로 압수수색 겪은 날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당시 그는 대학원에서 북한학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북한영화 속 주체사상을 연구하는 논문을 준비 중이었다. 오전 7시경, 초등학교 6학년 딸에게 아침밥을 차려주고 담배 한 대를 피우려 현관문을 열었을 때였다. 경찰청 보안수사대 직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압수수색 영장을 내밀었다.

"경찰이 막 들어오려고 하는 거예요. 그때 아내는 샤워를 하고 있었고, 초등학생 딸은 밥도 못 먹고 황당해하고 있었죠. 일단 경찰에게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했어요. 현관문을 열어둔 상태에서 아내는 출근 준비를 하고, 딸아이에게도 너는 일단 학교에 가라고 했죠. 그리고 압수수색이 시작됐어요."

경찰은 능숙하게 압수물을 선별했다. 책장 앞에선 내용이 아니라 제목과 저자를 기준으로 뽑아갔다. "6.25는 통일전쟁"이라고 주장했다 국가보안법으로 수사를 받은 강정구 교수 책은 물론, 대학원 수업 교재였던 <조선로동당약사> 역시 압수물 박스에 담겼다. 이 책을 수업 교재로 선정한 강사는 바로 서훈 현 국정원장이었다. 책상 위에 쌓아둔 명함도 마치 돈 세듯 빠르게 훑어보더니 몇 개를 툭툭 뽑아냈다. 유씨 눈에는 이 모든 장면이 "가져갈 게 미리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일단락

북한영화 전문가 유영호씨. 그가 압수당했던 책들에 붙어 있는 '압수물' 스티커.
 북한영화 전문가 유영호씨. 그가 압수당했던 책들에 붙어 있는 '압수물' 스티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이후 약 6개월 동안 유씨는 인천 만수동에 위치한 대공분실을 오가야 했다. 수사관의 질문은 왕재산 사건으로 이미 구속된 인물과의 관계와 그들로부터 특정 지시를 받았는지 캐묻는 데 집중됐다. 압수물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일체 묵비했지만, 1988년 대학 시절 만든 역사 기행 동아리 협회보를 증거로 추궁당한 일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80년대 회보라는 게 아주 조악하잖아요. 프린트한 종이를 '호치키스'로 집은 거였어요. 기념으로 가지고 있었는데, 보안수사대가 창립선언문에 '본 동아리는 우리 사회 자주, 민주, 통일에 기여한다'라는 문장을 문제 삼았어요. 자주, 민주, 통일, 이 세 단어가 북한이 주장하는 내용과 똑같아서 문제라는 거예요."

조총련계 재일조선인 학교를 조명한 영화 <우리학교> 촬영지를 방문하고 돌아와 유씨가 인터넷 카페에 쓴 후기도 추궁 대상이었다. 복도에 쓰여 있던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문구가 이 학교를 잘 나타내준다는 내용이었다. 수사관은 해당 문구가 북한 헌법 63조와 동일하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유씨는 낡은 책상 하나를 두고 마주앉은 수사관을 황당한 얼굴로 바라봤다.

느닷없는 기소, 그리고 '일부 유죄'

그로부터 약 3년 후, 유씨는 검찰청으로부터 등기 우편을 하나 받았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2015년 2월 17일에 기소했다는 처분 결과였다.

검찰은 유씨가 외장형 하드디스크에 보관한 북한 영화 20편과 이메일 계정에 저장해 둔 북한 출간물 43건이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에 해당한다고 했다. 또 그가 이를 소지한 건 "북한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할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검찰 공소장에는 대공분실에서 유씨를 황당하게 만들었던 신문 내용도 그의 이적목적성을 입증하는 근거로 제시됐다.

"어우, 황당했죠. 보안수사대 조사받고 아무 말 없다가 몇 년 뒤에 기소됐으니까요. 심지어 그때는 왕재산 사건으로 만기 출소한 사람도 있었어요. 나를 왕재산 간첩단 조직원으로 엮으려다 실패한 검찰이 불기소 처분하면 자신들 잘못을 인정하는 꼴이 되니까 억지로 기소한 게 아닌가 싶어요."

북한영화 전문가 유영호씨. 그가 압수당했던 책들에는 아직도 '압수물' 스티커가 그대로 붙어 있다.
 북한영화 전문가 유영호씨. 그가 압수당했던 책들에는 아직도 '압수물' 스티커가 그대로 붙어 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검찰의 느닷없는 기소로 유씨는 한 달에 한 번 꼴로 법정에 출석해야 했다. 그해 5월 21일 첫 공판을 시작으로 총 22번의 재판이 열렸고, 이 중에는 이적표현물 여부를 감별하기 위해 북한영화만 보고 끝나는 기일도 여러 번이었다. 해가 두 번 바뀌고, 마침내 열린 선고공판(2017년 6월 21일)에서 서울서부지법 형사4단독 남현 판사는 그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피고인석에서 선고를 듣던 유씨는 한 가지 부분에서 귀를 의심했다.

"선고 공판 때 판사가 판결에 대해 한참 이야기하는데, 법률용어도 어렵고 무슨 말인지 잘 집중도 안 됐어요. 앞에선 긍정적으로 얘기해서 무죄인가 했는데 뒤에서는 또 부정적으로 얘기하고. 결과적으로 책(이메일 계정에 소지한 자료)에 대해선 무죄, 영상물(외장하드에 소지한 영화)에 대해선 유죄였어요. 나는 북한 영화를 전공하는 사람인데 영화는 유죄, 책은 무죄, 이게 정말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남 판사는 유씨가 소지한 자료들은 모두 이적표현물이라고 봤다. 이를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려면 '이적목적성'까지 입증돼야 한다. 그런데 이 이적목적성을 두고 '이메일 계정 자료'와 '외장하드 속 북한영화'에 대한 판단이 엇갈렸다. "피고인의 가족 또는 친인척 관계를 살펴보더라도 북한을 이롭게 할 만한 의심스러운 사정을 찾을 수 없다"라며 이적행위의 목적이 없다고 판단을 내리고도, 외장하드 부분에서는 판단이 180도 달라졌다. 동일한 사실관계가 각각 유죄와 무죄의 근거로 제시되기도 했다.

"피고인은 이른바 '왕재산 간첩사건'으로 형이 확정된 임OO과 가까이 지내면서 위 사람이 조직한 '통일OO'이라는 단체의 정기 후원회원이 되기도 하였다."

"피고인과 임씨는 대학 동기로서 북한의 지령을 주고받는 일이 아니어도 가깝게 지낼 충분한 이유가 있다." (1심 판결문)


"원심판결 중 유죄 부분을 파기한다"

북한영화 전문가 유영호씨.
 북한영화 전문가 유영호씨.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양측 모두 불복해 열린 항소심에서 서울서부지방법원 제1형사부(부장판사 지영난)는 "이적목적으로 활용했다는 별다른 근거가 없다"라며 1심 재판부가 유죄로 판단한 외장하드 부분에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면서 이적목적성의 근거라며 검사가 주장하고 1심 재판부가 받아들인 부분을 하나하나 반박했다.

무엇보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인이 소지한 영상물 등 상당 부분은 이미 인터넷이나 통일부 북한문화자료센터에서 일반인들이 쉽게 관람할 수 있는 자료"라며 "연구자로서 해당 문건과 영상물을 수집할 동기가 있는 반면, 이를 이적목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에 대한 별다른 입증은 없다"라고 판시했다. 검찰이 문제 삼은 동아리 협회보 속 '세 단어'에 대해서도 "자주나 민주, 통일의 가치가 그 자체로 이적성과 연결된다고 볼 수 없다"라고 선을 그었다. 압수수색 날로부터 2208일이 흐른, 2017년 12월 21일이었다. 이 판결은 검사가 상고를 포기하면서 확정됐다.

지난 5일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기자와 만난 유씨는 6년 1개월 동안 자신을 괴롭힌 국가보안법을 "최고의 분단적폐"라고 정의했다. "법을 어긴 사람을 잡아넣는 게 아니라, 얘를 잡아넣어야겠다고 마음먹을 때 적용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종 무죄가 확정되고, 최근 남북관계가 급진전되면서 한 가지 확신이 들었다.

"만약 지금 어떤 검사가 동일한 내용으로 기소하겠다고 한다면? 아마 윗사람이 미쳤냐고 할 거예요. 시대가 바뀌었어요. 국가보안법이 사라져야 한다는 건 더 이상 당위가 아니에요. 이제는 살아남을 수 없는 법이에요." 


태그:#국가보안법, #유영호, #북한영화, #심장에남는사람, #평화협정
댓글4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좋은 사람'이 '좋은 기자'가 된다고 믿습니다. 오마이뉴스 정치부에디터입니다.

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