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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이른바 땅콩회항 사태를 경험했던 대한항공 직원들은 이번에는 그때 침묵을 반복하지 않겠다며 단체 메신저 창 밖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들의 무기는 촛불과 가면. 2006년 영화 <브이 포 벤데타>가 2018년 대한민국에서 촛불을 만나 <대한항공판 브이 포 벤데타>가 시작됐습니다. <오마이뉴스>는 긴급 캠페인을 통해 그들의 용기를 응원합니다. 여러분의 응원(좋은 기사 원고료)은 대한항공 직원들의 저항에 사용됩니다. (응원하기) http://omn.kr/r5sw [편집자말]
 대한항공 이규남 기장
 대한항공 이규남 기장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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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렇게 쉽게 알아봐 버리면..."

기자가 다가가 악수를 청하자, 그는 멋쩍은 듯 웃었다. 흰머리와 다부진 체격. 수많은 가면들 사이에서 이규남 대한항공 기장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저항의 상징인 '벤데타 가면'을 쓰고 동료들과 목소리를 높인 그는 집회가 마무리된 후 가면을 벗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생각보다 많이 오셨네요."

4일 대한항공 직원들의 첫 촛불집회 현장에서 이 기장을 만났다. 잘 다려진 흰색 셔츠에 정갈한 넥타이, 그리고 그 위에 단단히 고정된 '태극마크' 넥타이핀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입술을 꽉 깨문 그는 "이 열기가 식지 않고 (대한항공 직원들이) 끝까지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 기장은 간절해 보였다. "(집회가) 일회성으로 끝나면 안 될 텐데"라는 말을 연신 반복했다. 이날 500여 명의 대한항공 직원과 200여 명의 시민이 모여 집회가 잘 마무리됐음에도, 그의 말에선 약간의 초조함이 느껴졌다(관련기사 :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저항의 가면 쓴 '을의 반란').

1991년 대한항공에 입사한 이 기장은 2016년부터 2년 동안 대한항공 조종사노조 위원장을 지냈다. 회사를 바꿔보기 위해 노력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자신은 부기장으로 강등되는 고초를 겪었고, 그를 따르던 노조원들도 피해를 보고 말았다. 이런 경험들 때문에 첫 촛불집회의 성공도 그에겐 마냥 기쁨으로 다가올 수 없었다.

어쨌든 이 기장은 다시 광장으로 나섰다. 지금의 그는 한 명의 대한항공 직원일 뿐이지만,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까지 확산된 '을의 반란'에 힘껏 몸과 마음을 보탤 계획이다. 집회 하루 전날 만나 들었던 그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함께 하면 결국 다치지 않습니다. 다치더라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후배들에게 이기는 모습 보이고 싶었다"

 대한항공 직원들과 가족, 지지하는 시민 등이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옆 계단에서 대한항공 조양호 회장 일가 및 경영진 퇴진과 갑질 근절을 위한 1차 촛불집회를 열고 있다.
 이규남 대한항공 기장이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옆 계단에서 진행된 '대한항공 조양호 회장 일가 및 경영진 퇴진과 갑질 근절을 위한 1차 촛불집회'에 참석해 가면을 쓴 채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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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인터뷰를 위해 <오마이뉴스> 본사에서 만난 이 기장은 "함께"와 "뭉치자"는 말을 강조했다. 다음 날 집회가 예고된 상황에서 동료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청하자, 답을 내놓으며 꺼낸 말들이었다.

"(노조위원장 시절) 우리의 첫 쟁의가 '대한항공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라'라는 배너를 곳곳에 다는 것이었습니다. 회사 측에서 채증에 나섰죠. 그러자 노조원들이 '나도 배너 달기에 참여했다'는 의미로 사원증과 배너 사진을 찍어 메신저 채팅방에 올렸습니다. 거의 1000장의 사진이 모였고 이것 때문에 회사는 어느 누구를 개인적으로 처벌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본보기로 누군가에게 불이익을 줄 수 있겠죠. 개인이 그걸 이겨내긴 쉽지 않거든요. 회사는 그걸 잘 알고 그런 식으로 공격합니다. 하지만 (저처럼) 이미 (불이익을) 경험하고 극복한 사람들이 끝까지 (회사의)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약간의 손해는 감수해야겠지만 함께 뭉치면 크게 다치지 않습니다."

이 기장은 이미 '불이익 경험자'다. 그는 총 두 차례나 기장에서 부기장으로 강등된 바 있다. 노조위원장 시절, 그리고 보다 앞서 노조 단체협상팀에 있을 때 겪은 일이다. 법원은 두 번 모두 이 기장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두 차례 합쳐 모두 3년 동안 법정에서 회사와 다퉈야 했고, 회사의 처분뿐만 아니라, '대한항공을 떠나야 하나'라는 자문이 그를 힘들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그가 떠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내가 그때 물러났다고 생각해 봐요. 안 좋은 사례만 남잖아요. '거봐, 결국 회사와 싸우면 피해만 보잖아'라는 생각이 후배들 사이에 자리 잡을 거 아니에요. 후배들에게 '좋다, 싸우면 이기는 거구나'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법정에서까지 싸움을 이어갔습니다. 사실 많이 힘들었죠."

이 기장은 여러 직원의 용기가 뭉쳐 있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는 "불의에 일어나는 모습이 지속되고 유지된다면 내가 은퇴할 때 뿌듯한 자랑으로 남을 것 같다"라며 "행여 결실을 보지 못하더라도 함께 하는 것 그 자체로 우리는 의미 있는 일은 해낸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국민 여러분, 정말 부끄럽지만..."

 대한항공 이규남 기장
 지난 3일 <오마이뉴스> 본사에서 만난 이규남 대한항공 기장은 "함께"와 "뭉치자"는 말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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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장은 최근 불거진 대한항공 사태의 원인으로 "회사 내 직원을 통제하는 시스템은 엄청난데, 회사를 감시하는 시스템은 전혀 없다"는 점을 꼽았다. 경영 능력이 없는 총수 일가가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지만, 이를 제지할 장치가 없다는 설명이다. 그는 지난해까지 자신이 수장으로 있던 조종사노조를 비롯해, 대한항공의 3개 노조(일반노조, 조종사노조, 조종사새노조)를 향해 비판의 날을 세웠다.

"3개 노조가 있지만 조합원들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죠. 일반노조의 경우 지난해 조종사노조가 시위하는 현장에 와서 노골적으로 '여러분 때문에 일반 직원들까지 망할 수 있다'라고 말하며 방해했어요. 조종사새노조도 우리가 함께하자고 할 때마다 '민주노총이 끼어서는 안 된다, 회장 퇴진을 요구해선 안 된다' 등을 이야기하며 거부했죠. 지금 조종사노조는 제가 위원장 시절 조양호 회장을 배임·횡령, 단협(단체협상) 위반, 부당노동행위 혐의 등으로 고소해놓은 것을 전부 다 취하했어요. 어용이란 게 꼭 회사가 만들었다고 해서 어용인가요. 노조원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고 집행부가 맘대로 노조를 이끌면 그게 어용이죠. 지금의 노조가 스스로 어용 소리를 들을 여건을 만든 거죠."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이 노조위원장 시절 주주총회에서 벌어진 일을 떠올리며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조종사노조가 주식을 보유하고 있어 노조위원장이 주주총회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2016년 주주총회에서 '회사가 1조 원 상당의 이익을 내면서 자발적으로 법인세 한 번 내지 않고, 5년 이상 주식 배당도 못 하냐'고 지적했습니다. 또 기존 이사를 재임용하려고 하는 안건에 반대했죠. 그런데 사회자는 그냥 '만장일치로 통과됐습니다'라며 넘어가더군요. 그러면서 당시 인력관리본부장이 제게 귓속말로 '그렇게 한다고 뭐 달라질 것 같아?'라고 말했습니다. 부장급 인사들은 제 몸을 밀치고요. 조종사노조가 보유한 주식을 생각해봤을 때 권한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어요. 그래도 최소한 목소리를 듣는 시늉이라도 해야죠.

2017년 주주총회에는 입장 자체를 못 했습니다. 제가 사무실에 들러 주주확인증을 들고 주주총회장으로 가는데 운항부 임원들이 모여 있더라고요. 저를 본 운항본부장이 '아유 위원장, 우리가 개선할 부분 개선할 테니까 불만이 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저런 걸 설명하면서 '승무원 불만을 이해한다면 무기명으로 뭐가 문제인지 이야기를 들어라'라고 답했죠. 저는 주주총회에서 발언 수위를 좀 낮춰달라는 거로 이해했어요. 근데 자꾸 시간을 끌더라고요. '아차' 싶어서 주주총회장에 가보니 줄이 길게 늘어져 있더라고요. 주주 신분을 확인한다며 시간을 끌었고 결국 저는 주주총회장에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경영을 감시할 수 있겠어요."

이 기장은 이런 구조에서 나온 조양호 회장의 사과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조 회장 한 마디로 조현아·조현민을 사퇴시키는 모습을 보며 역설적으로 회사의 폐쇄적 분위기를 다시금 느꼈다. 앞서 조 회장은 사과문을 발표하며 두 딸인 조현아·조현민을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게 한 바 있다.

그는 "조 회장이 1999년 세금 포탈로 실형을 받았을 당시 '절대 경영일선에 돌아오지 않겠다'라고 약속했지만, 지금 대한항공을 넘어 한진 계열사 전체를 좌지우지하고 있다"라며 "가깝게는 땅콩회항 사태 후 결국 한진그룹 계열사 칼호텔네트워크 사장으로 복귀한 조현아 사례가 또 있지 않나"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 기장은 "어찌 됐든 조현아·조현민을 사퇴시키려면 형식적으로라도 이사회 등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며 "이는 조 회장이 임용도 자기 마음대로 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이며, 이 문제를 바로 짚지 않으면 총수 일가의 경영 복귀는 또 반복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인터뷰 말미, 이 기장은 "국민 여러분에게 죄스러운 마음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영공은 어느 개인이 가질 수 없다"라며 "지상운송업과 비교해 보면 국민 여러분이 자기 집 마당에 고속도로를 허락해준 것이다"라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이 기장은 "그렇게 국민 개개인의 허락과 양보에 의해 대한항공이 기업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라며 "그러면 당연히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게다가 마크도 태극마크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국민 여러분에게 지금 어떤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정말 부끄럽습니다. 저도 내부인이고, 여태까지 회사의 잘못을 시정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우리 중 상당수가 (총수 일가의 횡포에) 가담했고, 침묵했습니다. 그럼에도 송구스럽지만 감히 국민 여러분께 부탁드립니다. 이번 기회에 함께해 주신다면 대한항공뿐만 아니라 사회 도처의 갑질 문화와 재벌의 적폐를 고치는 데 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죄스러운 마음과 함께 조심스레 희망을 걸어봅니다."

 대한항공 이규남 기장
 이규남 대한항공 기장은 "국민 여러분에게 죄스러운 마음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국민 개개인의 허락과 양보에 의해 대한항공이 기업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라며 "그러면 당연히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게다가 마크도 태극마크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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