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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선언으로 '가보지 않은 길'이 열린 지금,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한 국가보안법의 존재 이유를 묻습니다. 평화협정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기소돼 지난해 12월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선고를 받기까지 수년간 싸워온 백창욱 목사를 지난 4일 대구새민족교회에서 만났습니다. [편집자말]
 평화협정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지난해 12월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를 선고 받은 백창욱 대구새민족교회 목사가 4일 오전 대구 달서구 자신의 집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한 국가보안법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평화협정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지난해 12월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를 선고 받은 백창욱 대구새민족교회 목사가 4일 오전 대구 달서구 자신의 집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한 국가보안법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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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시가 조금 안 된 시각이었다. 아내가 운영하는 어린이집 아이들을 등원시키려고 아파트 현관문을 열었을 때였다. 복도 벽에 붙어서 현관문을 노려보는 웬 남성과 문틈 사이로 눈이 마주쳤다. 누군가가 현관문을 거칠게 열더니 20평 남짓 작은 집에 30여 명이 우르르 들이닥쳤다. 대구지방경찰청 보안수사대라고 밝힌 사람들은 압수수색 영장을 내밀고는 집을 들쑤셨다. 2012년 9월 20일, 백창욱 대구새민족교회 목사의 길고 긴 법정투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발 디딜 틈 없는 집에서 백 목사는 경황없이 서 있었다. 압수수색은 오전 내내 이어졌다. 그러나 집은 "오로지 잠만 자는 공간"이었다. 보안수사대가 원하는 자료라면 아마도 교회 안 서재에 있을 터였다. 어린이집 등하원용 노란 승합차까지 뒤진 수사관들은 급기야 10년 전 대학원생 때 쓰고 처박아 둔 구형 노트북을 꺼내왔다. 자료를 뽑아낸다고 수선을 피우는 수사관들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기 아무것도 없는데.' 수업 과제였던 <불량국가> 독후감과 이미 단종돼 쓰지도 않는 3.5 플로피디스크 5장이 이날의 주요 압수물이었다.

대공분실

"피의자는 목사 신분을 이용해 평통사(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투쟁의식을 버리고 지금이라도 회개해 진정한 목회자의 길을 갈 생각은 없습니까?"(피의자 신문조서)
대공분실에서 쭉 묵비권을 행사하던 백 목사는 이 말 만큼은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꾹 참고 답하지 않았다. 대신 수사관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이날까지 총 다섯 차례 조사에서 수사관은 백 목사에게 북한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평통사 활동을 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했다. 이 단체의 주요 의제인 평화협정 체결 등이 "북한의 대남혁명론과 궤를 같이 한다"는 이유였다. 평화협정은 북한뿐 아니라 보수정당도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내용이었기에 황당했다. 구형 노트북에서 건져온 <불량국가> 독후감은 그가 일찍부터 "북한의 반미투쟁 노선에 동조"했다는 '증거'로 둔갑했다.

"그건 수업 때 교수가 지정해준 책이에요. 지정해준 책을 읽고 리뷰를 썼을 뿐인데 나보고 어쩌라고? 자기들 마음대로 논리를 이끌어 가더라고요. 묵비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얼토당토않은 말을 할 때는 저도 참지 못하고 답하게 되더라고요."

조사실은 드라마에서 본 그대로 음침했다. 그 안에서 백 목사는 "갇힌 새처럼 앉아 있었다"고 기억한다. "00월 00일, 평통사 중앙위원회 회의에 참석했죠?" 수사관 질문에 계속 묵비하는 지겨운 시간이 흘렀다. 압수 수색을 한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내용을 재료 삼아 사생활을 공격하는 '심리전'도 견뎌야 했다. 무엇보다 고역이었던 건 점심이 되면 모욕적으로 신문하던 수사관과 마주앉아 꾸역꾸역 밥을 먹는 일이었다.   

95쪽짜리 공소장



"피고인은 북한이 대남전략 전술의 일환으로 주장하는 바와 같이 식민지론, 평화협정 체결, 평화협정을 가로막는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등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활동에 동조하였다."(검찰 공소장)

사건을 송치받은 검찰은 무려 95쪽짜리 공소장과 함께 백 목사를 재판에 넘겼다. 평화협정 체결과 주한미군 철수, 한미 군사훈련 반대를 위해 그가 지난 수년간 진행한 기자회견, 집회 연설, 언론 인터뷰, 강연 자료를 하나하나 긁어모아 첨부했다. 그리고는 이것이 북한이 <로동신문>에서 주장한 내용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표까지 그려 일일이 비교했다. 이미 학계에서도 널리 주장된 내용인데 검사는 유독 그에게만 북한의 주장을 추종한다는 굴레를 씌웠다.

"평화협정 체결 운동은 2005년 9.19 공동성명과 2007년 2.13 합의가 문서 합의로 그치지 않도록 민간에서 무얼 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시작됐어요. 정권에게만 맡겨두는 게 아니라 민간이 목소리를 내는 게 중요하다는 거죠. 그런데 뭐, 북한의 대남 전략?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저는 목회자예요. 제가 주로 보는 책은 신학책이나 성경책이지, <로동신문>이나 <조선중앙통신>을 어디서 접하겠어요. 그건 공안 검사들이 훨씬 더 많이 접하면서..."

누군가 사석에서 그런 질문을 했다면 면박을 줄 수준의 논리였다. 그러나 재판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유무죄를 다투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하나하나 읽고 소명해야 했다. 검사가 쓴 공소장을 읽는 일에만 엄청난 감정이 소모됐다. 검사는 끊임없이 추가 의견서를 제출했다. 여기에 증거자료까지, 백 목사는 수만 쪽에 달하는 '서류의 늪'에 빠졌다.

"본인들 주장에 조금이라도 이로운 게 있으면 사돈의 팔촌 것까지 다 끌어모으는 수준이었어요. 괴물을 보는 것 같았어요. 기억나는 것 중 하나가, 과거 문규현 신부님이 임수경씨랑 북한에서 판문점으로 귀환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재판 받은 사건이 있었잖아요? 그건 국가보안법상 잠입·탈출에 해당해 유죄를 받은 거니까 제 사건과는 상관도 없어요. 그런데 이 사례까지 가져와 저에게 유죄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더라고요. 그때마다 저희는 또 반론을 펴야 했어요." 

유죄

 백창욱 목사는 인터뷰에 응한 이유에 대해 “제가 겪은 일을 통해서 국가보안법은 정말 있어서는 안 되는 법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라며 “실제로 보수정권에서 되살아난 이 법이 엄한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고 말했다.
 백창욱 목사는 인터뷰에 응한 이유에 대해 “제가 겪은 일을 통해서 국가보안법은 정말 있어서는 안 되는 법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라며 “실제로 보수정권에서 되살아난 이 법이 엄한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고 말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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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을 거치며 느낀 것은 검찰이 제게 벌을 주려고 씌운 혐의보다 긴 재판 자체가 사람을 지치게 한다는 점입니다."(최후진술문)


재판은 2014년 2월 5일에 시작해 결심공판까지 총 1년 8월이 걸렸다. 검사는 백 목사가 대구교도소에 수감 중인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간부를 면회하고 돌아와 페이스북에 남긴 소감까지 신문 재료로 썼다. 국가보안법 처벌 이력이 있는 인물과 만났으니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이라는 억지 논리였다. 북한의 지령을 받아서 활동했다는 근거를 대라고 요구하면 검사는 '공개지령'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내가 북한의 지령을 받았다는 근거를 대라고 했어요. 근거가 있을 리 있나요. 그랬더니 북한이 공개지령을 내렸다는 주장을 들고 나왔어요. 북한이 매체를 통해 발표한 게 공개 지령이라는 거예요. 전문은 우리가 볼 수도 없어요. <통일뉴스>에서 중요한 사안에 대해선 가끔 전문을 내보내요. 다른 매체에서도 중요한 사안은 보도하잖아요. 그게 다예요. 무슨 공개 지령을 어떻게 받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국가보안법 재판은 한마디로 "누구도 건드려서는 안 되는 지성소인 '양심'을 막무가내로 침탈하는" 과정이었다. 검사는 끊임없이 추궁했고, 백 목사는 양심에 문제가 없는 사람임을 변명해야 했다. 그 자체가 구차했다. 그럼에도 버틸 수 있던 건 재판부가 바로 잡아줄 거란 희망이었다. 비슷한 혐의로 비슷한 시기 재판에 넘겨진 평통사 활동가들에게 잇따라 무죄가 선고된 점도 기대감을 높였다. 하지만 대구지방법원 제3형사단독 염경호 판사는 국가보안법 혐의를 거의 모두 인정하며 징역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시쳇말로 '멘붕'이 왔어요. 제가 평통사 중앙위원회 회의에 참석 안 한 날이 두 건 있었는데 검찰은 참석했다고 주장했어요. 이건 알리바이가 확실하니까 무죄가 났죠. 나머지는 모두 유죄였어요. 평통사 활동 자체가 유죄로 인정됐는데 회의 한두 개 참석 안 한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냥 여기서 끝내버릴까 하는 생각이 솟구쳤어요. 항소하면 또 몇 년간 검찰의 주장을 다 소화해서 반론해야 하는데, 그걸 상상하니 앞이 캄캄한 거예요."

"검사의 주장은 이유 없다"

 백창욱 목사는 국가보안법 재판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도저히 수긍할 수 없었다. 개인의 일이 아니라 평화통일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재갈을 물리는 근거가 될 게 뻔했다”라며 “무엇보다 공권력을 총동원해 이적혐의를 덧씌운 검찰이 득의양양해 하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백창욱 목사는 국가보안법 재판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도저히 수긍할 수 없었다. 개인의 일이 아니라 평화통일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재갈을 물리는 근거가 될 게 뻔했다”라며 “무엇보다 공권력을 총동원해 이적혐의를 덧씌운 검찰이 득의양양해 하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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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목사는 도저히 수긍할 수 없었다. 이 판결이 평화 통일을 주장하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 재갈을 물리는 근거가 될 게 뻔했다. 무엇보다 공권력을 총동원해 이적혐의를 덧씌운 검찰이 득의양양해 하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번엔 스스로 '서류의 늪'으로 걸어 들어갔다. 법원 민원실에서 오후 내내 재판 서류를 복사했다. 이날 하루 장당 40원씩 하는 복사비만 총 7만 원이 들었다. 검사도 형이 너무 가볍다며 항소했다.

2017년 5월 10일에 시작한 항소심은 석 달 만에 끝났다. 그해 8월 11일 대구지방법원 제5형사부(부장판사 김경대)는 국가보안법 혐의에 유죄를 선고한 원심을 모두 파기하고 무죄를 내렸다.

"검사는 피고인이 북한의 언론매체인 <로동신문>을 통하여 공개 지령을 받아 피고인이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였다는 취지로도 주장하나 이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 설령 피고인이 북한의 주장에 일치하거나 동조하는 신념이나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근거 없이 피고인이 그러한 신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피고인의 행위가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끼칠 명백한 위험성이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섣불리 추단할 수 없고, 이는 양심과 사상의 문제로서 이를 이 부분 공소사실에 대한 법률규정을 적용하여 처벌할 수는 없다."(항소심 판결문)

검사가 상고했지만 같은 해 12월 5일 대법원 제3부(주심 김창석 대법관)는 "법리를 오해하는 등 잘못이 없다"라며 대법관의 일치된 의견으로 무죄를 확정했다. 같은 시간 백 목사는 사드 기지 길목인 경북 성주 진받교에서 주민들과 공사 인부 출입을 저지하고 있었다. 누군가 텔레그램 메시지를 보냈을 때 비로소 소식을 알았다. 첫 압수수색 이후 1903일 만이었다. 그러나 무죄 판결만으로 지난 시간이 보상되는 건 아니었다. 검사의 신문 재료로 쓰일까 봐 일상에서의 말과 글까지 자기 검열했던 순간도 숱했다. 남북관계가 급진전되면서 '평화협정'이 핵심 의제로 떠오른 지금 돌이켜보면 그가 겪은 일은 더욱 황당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제가 인터뷰를 해요. 제가 겪을 일을 통해서 국가보안법은 정말 있어서는 안 되는 법이라고 얘기하려고요. 실제로 보수정권에서 되살아난 이 법이 엄한 사람들을 얼마나 힘들게 했어요? 평통사가 표적이 된 건 이명박 정부 때 제주해군기지 반대 투쟁의 선두에 섰기 때문이었어요. 안보 위기가 심각해서 그런 거 아니잖아요." 

질문

 백창욱 목사는 “내가 주사파나 북한과 선이 닿은 사람이 아니다. 나는 목회자이다. 내가 주로 보는 책은 신학책이고 성경책이다”라며 “내가 <노동신문>이나 <조선중앙통신>을 접할 수 있겠나”고 이적혐의를 덧씌운 검찰을 비판했다.
 백창욱 목사는 “내가 주사파나 북한과 선이 닿은 사람이 아니다. 나는 목회자이다. 내가 주로 보는 책은 신학책이고 성경책이다”라며 “내가 <노동신문>이나 <조선중앙통신>을 접할 수 있겠나”고 이적혐의를 덧씌운 검찰을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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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검찰청 통계에 따르면 실제로 이명박 정부 마지막 해(2012년)와 박근혜 정부 첫해(2013년) 국가보안법으로 기소된 사건은 각각 59·70건으로 2008년 27건과 비교해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또 대법원 자료에 의하면 이후 국가보안법 집행유예 비율은 ▲2013년 46.7% ▲2014년 54.5% ▲2015년 44.8% ▲2016년 44.8% ▲2017년 65.9%로, 같은 기간 일반 형사사건 전체 집행유예 비율인 29.1%보다 23.1%p 높았다. 검찰이 무리하게 기소했다는 걸 보여주는 증표다.

결국, "이 법의 해석·적용은 필요한 최소한도에 그쳐야 한다"라는 국가보안법 제1조 2는 적어도 이 기간에 통용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시기'에 따라 적용이 달라지는 법은 법인가? 국가보안법 피해자들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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