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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보 다리'라는 시로 유명한 아폴리네르가 몽마르트의 뮤즈인 화가 로랑생을 만났다는 피카소의 아틀리에는 몽마르트르의 라비냥로(Rue Ravignan) 13번지에 있었다고 안내서들은 전한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 가보니 라비냥로 13번지는 존재하지 않고, 실제 있는 것은 에밀구도광장(Place Émile Goudeau) 13번지였다. 헷갈리게 만든 것은 그 번지 다음에 세워진 빌딩이 무슨 호텔로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에밀구도광장 피카소의 아틀리에가 있던 라비냥로 13번지는 존재하지 않고, 실제 있는것은 에밀구도광장(Place Emile Goudeau) 13번지였다.
▲ 에밀구도광장 피카소의 아틀리에가 있던 라비냥로 13번지는 존재하지 않고, 실제 있는것은 에밀구도광장(Place Emile Goudeau) 13번지였다.
ⓒ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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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광장 맞은편 가게에 가서 영어로 피카소의 아틀리에가 있던 바토라부아르(Bateau Lavoir) 건물에 대해 물어보았으나 잘 모르는 듯했다. 이상한 점은 파리 어디서나 보이는 관광객 모습이 여기선 별로 보이지 않았고, 옆을 지나가던 한 떼의 미국인 관광객도 눈길을 주지 않은 채 밑으로 내려갈 뿐이었다. 39년 전 이곳을 방문한 일이 있는 아빠가 기억을 더듬으며 말씀하셨다.

"여긴가보다."

바토라부아르

가서 보니 짙은 녹색 칠을 한 출입문과 그에 잇달린 커다란 진열장 위에 'Le Bateau Lavoir'란 글자가 쓰여 있었고, 진열장 밑쪽에는 '몽마르트르박물관'이란 글씨가 작게 쓰여 있었다. 더구나 출입문 오른쪽에는 건물의 유래를 알리는 '파리의 역사(Histoire de Paris)–바토라부아르'라는 사적 푯말도 세워져 있었다. 벽을 보니 역시 에밀구도광장 11번지였다.
 
바토라부아르 피카소의 아틀리에가 있던 바토라부아르는 원래 피아노 공장이었다고 한다.
▲ 바토라부아르 피카소의 아틀리에가 있던 바토라부아르는 원래 피아노 공장이었다고 한다.
ⓒ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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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건물은 1970년 화재로 없어졌고, 지금 보는 건물은 복원한 거다. 예전 것보다 훨씬 쾌적하게."

"바토라부아르는 '빨래 배'라는 뜻이죠?"

대학 때 불어를 약간 배운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 '세탁선'이라 번역한 책도 있다. 본래는 피아노 공장이었다는데 이곳에 살던 시인 막스 자코브가 낡고 흉한 건물이 세느 강에 정박해 빨래를 하던 배 곧 세탁선을 닮았다고 해서 그런 별명을 붙였다더라."

"그럼 막스 자코브가 이곳에 먼저 살고 있었군요."

"무슨 전시회에서 만나 의기가 서로 투합했던 모양이야. 스페인에서 올라와 거처가 없던 피카소를 단칸방에 데려와 일인용 침대를 나눠 사용하면서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더라."

"결국 피카소도 이곳에 둥지를 틀게 된 거네요?"

"그런 셈이지. 바스크 출신의 화가 파코 두리오가 귀국하면서 넘겨준 방을 인수 받았다거든. 월세 15프랑에."

그 시점이 1904년이다. 

당시 바토라부아르엔 셋방을 얻어 사는 시인과 화가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를테면 바다를 주테마로 그리던 화가 막심 모프라, 네덜란드에서 온 화가 키스 반 동겐, 시인 앙드레 살몽, 스페인에서 온 입체주의 화가 후안 그리스, 시인 피에르 르베르디, 이탈리아에서 온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큐비즘의 창시자인 조르주 브라크, 야수주의의 창시자인 앙리 마티스 등이 다 이 건물에 살았다.

"하필 왜 이 건물이었을까요?"

"이유는 간단하다. 이 사진 좀 봐라."

아빠는 핸드폰 갤러리를 열어 피카소가 살았던 20세기 초의 바토라부아르 사진을 보여주셨다.
 
바토라부아르 피카소가 살았던 20세기 초의 바토라부아르 사진.
▲ 바토라부아르 피카소가 살았던 20세기 초의 바토라부아르 사진.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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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쓰러져 가는 낡은 건물이다. 그러니 월세도 쌌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열정과 정신세계만은 높았다. 그 무렵 이탈리아에서 건너와 합류한 아폴리네르는 피카소의 작품을 보고 이렇게 평가했다.

"부정할 수 없는 피카소의 재능은 감미로움과 끔찍함, 비참함과 섬세함을 적절히 배합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미술사에서 가장 혁신적인 화가로 피카소를 꼽는다면 그의 그림을 높이 평가한 아폴리네르는 현대시의 혁신가였다. 한 살 차이인 두 사람은 서로 죽이 맞았던지 날마다 함께 지내다시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폴리네르는 피카소의 아틀리에를 방문한 여류 화가 지망생 마리 로랑생에게 눈길이 갔다. 데생학교에서 만난 화가 조르주 브라크가 그녀를 데리고 온 것이다. 눈이 크고 코와 입술의 선이 뚜렷한 그녀가 마음에 들었으나 아폴리네르는 아무런 표시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자크 라피트로의 갤러리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옆에 있던 피카소에게 눈짓해 로랑생을 정식으로 소개받는다. 이를 계기로 아폴리네르는 연애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오, 마리! 이제부터 나는 당신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사랑한다'고 외치고 또 외치면서 살아가는 운명이 되겠지요." 

이 무렵 스물세 살의 피카소에게도 애인이 생겼다. 페르낭드 올리비에라는 동갑나기 프랑스 여성이었는데, 키가 크고 용모가 매혹적인 그녀는 피카소의 모델 겸 불어 선생 노릇을 하다 그와 동거생활에 들어가게 되었다.

세관원 루소, 50세에 화가 루소가 되다
 
피카소 바토라부아르에 살고 있었던 1908년경의 피카소.
▲ 피카소 바토라부아르에 살고 있었던 1908년경의 피카소.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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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을 차린 곳은 피카소의 허름한 아틀리에. 질투심 많은 피카소는 그녀의 단독외출을 허락하지 않고 자신과 함께 붙어 다니도록 했다. 그래서 식당이든 술집이든 항상 붙어 다니는 이 커플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오히려 부러워했다고 한다.

한동안 우울증에 빠져 겨울처럼 쓸쓸하고 절망적인 청색만을 고집하던 피카소의 화풍이 '청색시대'에서 '장밋빛 시대'로 바뀐 것도 밝고 쾌활한 성격의 올리비에 때문이었다. 현대 미술사에서 최초의 입체주의 작품으로 평가받는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에 모델이 되어준 것도 올리비에였다.
 
아비뇽의 처녀들 현대 미술사에서 최초의 입체주의 작품으로 평가받는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에 모델이 되어준 것도 올리비에였다.
▲ 아비뇽의 처녀들 현대 미술사에서 최초의 입체주의 작품으로 평가받는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에 모델이 되어준 것도 올리비에였다.
ⓒ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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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커플은 아폴리네르 커플과 자주 어울렸다. 가난했지만 젊음과 사랑과 예술이 있었던 거다. 이들 두 커플의 즐거운 한때를 화폭에 담은 로랑생의 <예술가 그룹(Groupe d'artistes)>을 구입해준 사람은 미국 출신의 유태인으로 파리에 건너와 살고 있던 여류작가 거트루드 스타인이었다.
 
 미국 출신의 유태인으로 파리에 건너와 살고 있던 여류작가 겸 미술 수집가 거트루드 스타인.
 미국 출신의 유태인으로 파리에 건너와 살고 있던 여류작가 겸 미술 수집가 거트루드 스타인.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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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그려도 무명화가의 그림은 잘 팔리지 않던 시대다. 그런데 자기 그림의 구매자를 처음 만나니 로랑생의 기쁨이 어떠했겠는가? 작품이 팔렸다는 건 화가로서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다.

비슷한 사례론 앙리 루소를 들 수 있다. 먹고 살기 위해 세관원으로 일했기 때문에 '세관원 루소'라는 별명으로도 불린 그는 세관을 그만두고 나이 50세에 화가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세관을 그만두고 나이 50에 화가생활을 시작했던 앙리 루소의 자화상. 1903년작.
 세관을 그만두고 나이 50에 화가생활을 시작했던 앙리 루소의 자화상. 1903년작.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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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리네르의 소개로 '피카소 사단'에 들어가게 된 루소는 자신이 전에 그렸던 <여인의 초상화(Portrait de femme)>란 작품을 처음으로 팔게 되었다. 잡화상에 팔린 그림 값은 단돈 5프랑. 하지만 이제 화가가 되었다는 자부심에 루소는 뛸 듯이 기뻐했다.

이를 축하해주기 위해 피카소는 당사자인 루소를 비롯해 아폴리네르와 마리 로랑생 커플, 막스 자코브와 조르주 브라크, 앙드레 살몽, 모리스 레날 등의 문인과 장 메쳉저, 후안 그리스 등의 화가, 그리고 화상 다니엘 헨리 칸바일러, 거트루드 스타인 남매 등을 자기 방으로 초대했다. 방 벽엔 루소의 그림이 걸리고 그 밑에 '루소 만세'라는 글씨가 쓰여졌다. 

일행은 와인을 마시고 춤을 추었으며, 얼큰해진 아폴리네르는 루소를 대(大)화가로 추켜세우는 시를 읊었다. 예술을 논하고 술을 마시며 왁자지껄 떠드는 '피카소 사단'의 중심엔 늘 피카소가 있었다. 만일 피카소가 파리에 오지 않았다면 파리가 예술의 수도가 될 수 있었을까?

쉽진 않았을 거라고 아빠는 추측하신다. 그만큼 피카소의 활약은 두드러졌고 주변에 끼친 영향력 또한 막대했다는 것이다. 부리부리한 눈에 체구가 단단한 피카소에겐 사람을 끌어들이는 묘한 흡인력 같은 게 있었다. 그 때문에 주변에는 아폴리네르 커플을 비롯한 많은 문인과 화가들이 모여들었다.

몽마르트르를 떠나는 피카소

그 중에서도 특기할 만한 인물로는 로랑생의 그림을 처음 구입해준 미국의 여류작가 겸 그림 수집가 거트루드 스타인을 들 수 있다. 뒤에 하버드대학에 편입된 래드클리프대학을 거쳐 존스홉킨스 의대에 진학했던 그녀는 중도에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남동생과 함께 파리로 건너왔다. 그리고 수많은 문인 및 화가들과 교유하면서 글도 쓰고 평도 하고 미술품을 수집했다. 아빠는 그녀를 이렇게 평하셨다.

"스타인은 현대미술의 중요한 흐름을 주도하게 될 천재 화가 피카소의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보고 그의 여러 작품들을 8백 프랑 어치나 사들였던 인물이다. 이때 작품 당 몇 십 프랑을 주고 산 피카소 그림이 훗날 몇 천 만 달러를 호가하는 고가품이 될 정도로 뛰어난 안목을 갖고 있었던 거지."

그날 피카소는 자신의 작품이 팔린 것을 자축하기 위해 '피카소 사단'을 이끌고 라팽아질로 향했다. 호기롭게 들어간 그 술집은 지금도 솔르로(Rue des Saules) 22번지에 있는데, 2층 건물 벽에는 배를 내민 토끼가 술병을 흔들며 냄비에서 뛰쳐나오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캐리캐처 화가 앙드레 질이 1875년에 그린 그림이다. 원래는 자기 이름을 따서 술병을 든 채 '질에게로 오는 토끼(Lapin à Gill)'라는 상호였는데, 그 후 발음이 같은 '민첩한 토끼(Lapin Agile)'로 바뀌어져버렸다.

초록색을 칠한 싸리담장을 끼고 돌아가자 말라비틀어진 고목나무 밑으로 출입문이 보였다. 집 자체는 허름해도 스토리가 있는 관광 포인트라 입장료를 내야 한다. 아빠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니 20세기 초엽 풍의 검붉은 실내장식에 옛날을 보여주는 사진 액자들이 죽 걸려 있었다. 입장료에 포함된 기본 음료가 한잔씩 나왔다. 

"아까 그 토끼가 들고 있던 술일까요?"

"토끼가 들고 있던 술은 당시 예술가들의 혀를 사로잡았다는 압생트(Absinthe)일 게다. 고흐가 마시고 자기 귀를 잘랐다는 독주인데 환각성분이 있어 지금은 판매 금지야."

"모이는 데는 이곳뿐이었어요?"

"더 있었겠지. 물랭루주도 있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변해. 그림을 팔아 경제적 여유가 생긴 피카소도 몽마르트르를 떠나거든."

"어디로요?"

"세느 강 남쪽의 몽파르나스(Montparnasse)로. 피카소 그림을 8백 프랑 어치 샀다는 거트루드 스타인 말이다. 그 여자가 살던 동네가 바로 몽파르나스야. 수많은 화가들의 그림을 한 장소에서 볼 수 있어 사상 최초의 현대미술관이었다는 평을 받은 스타인 집이 바로 그곳에 있어."

"그럼 다음 행선지는 몽파르나스네요?"

아빠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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