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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지사 최종응 생가의 금전고택. 민박도 한다. 독립운동가의 집에서 하루쯤 민박을 해보는 체험도 멋진 일이다.
 독립지사 최종응 생가의 금전고택. 민박도 한다. 독립운동가의 집에서 하루쯤 민박을 해보는 체험도 멋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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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동구의 'K2 비행장' 뒤편에 있는 산골 마을은 고려 태조 왕건의 군대가 산(山) 아래에 주둔(屯)한 이래 둔산동(屯山洞)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본래는 옻이 많이 나는 곳이라 하여 옻골마을로 불렸다. 그래서 최종응(崔鍾應, 1871.8.21.∼1944.1.24.) 독립지사의 생가터도 '둔산동 382번지'라는 구주소에서 '옻골로 195-2'라는 도로명 주소로 바뀌었다.

옻골마을에서 가장 유명한 집은 1694년(숙종 20)에 본채가, 1905년(고종 4)에 사랑채가 지어진 국가 지정 민속자료 261호 백불고택(百弗古宅)이다. 백불은 주자의 어록 중 '百弗知(백불지) 百弗能(백불능)'에서 따온 말로, '모든 것을 알지 못하고, 아무 것에도 능하지 못하다.'라는 뜻이다. 좀 더 줄이면 '항상 겸손하라' 정도로 축약할 수 있겠다.

조선 후기 대선비 최흥원의 역사가 남아 있는 마을

조선 후기의 대선비 최흥원(崔興遠(1705∼1786)의 호가 백불암(百弗庵)이다. 즉 백불고택이라는 당호(집이름)는 최흥원의 호에서 왔다. 최흥원은 저술된 지 70년이 넘도록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못한 채 묻혀 있던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세상의 명저로 빛을 볼 수 있도록 한 대업적을 남겼다. 그는 <반계수록>을 처음에는 백불고택 사랑채의 동쪽 보본당(報本堂)에서, 뒤에는 동화사에서 옮겨 썼다. 보본당은 옻골마을에서 두 번째로 유명한 집이다.

최종응 생가 금전고택
 최종응 생가 금전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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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로 유명한 집, 아니 유명해져야 할 집터는 최종응 생가터이다. 최종응 생가터는 현재 빈 터만 남아 있는 상태가 아니라 훤칠한 얼굴을 뽐내는 한옥을 한 채 품고 있다. 집 가운데 대청마루에는 '琴田古宅(금전고택)'이라는 현판도 붙어 있다.

갓 신축된 집을 고택으로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독립운동가의 역사가 서려 있으니 그 이름으로 복원을 해도 무리는 아니다. 건축된 지 몇 년 안 된 비슬산의 '대견사'보다 신라 고찰이 있었던 자리인 '대견사 터'가 더 유명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금전고택이 당장 백불고택과 보본당처럼 유명세를 떨쳐야 한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대구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민간 주택과 아직 목재에 먼지도 제대로 묻지 않은 새집을 그냥 견줄 수는 없다. 다만 이 집이 독립운동가 금전(琴田) 최종응의 고택을 되살린 역사의 현장이라는 사실만은 모두가 알아야겠다.

1871년 8월 21일 이 집에서 최종응이 태어났다. 1920년 최종응은 대한민국임시정부 후원금을 모으고 있던 윤철(尹喆)의 권유를 받고 독립자금 모금 활동을 시작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그를 경상북도 선정사(宣政使)로 임명했다. 임시정부는 당시 국내에 지방행정기관을 조직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부호들에게 독립군 군자금을 거두어 임시정부로 송금

최종응은 도내 인사들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납부하라는 '군자금 납부 명령서(軍資金納入命令書)'를 발송했다. 영천군 금호면 오계리의 조석환(曺奭煥), 영천군 청통면 상리동의 손계창(孫啓昌), 칠곡군 지천면 금호동의 윤병돈(尹炳敦) 등이 호응하였다. 최종응은 모급된 돈을 임시정부로 보냈다(모금에 협조한 이들의 명단을 이곳에 기록하는 것은 필자가 그들 역시 독립운동에 한몫을 한 것으로 인정되어야 하고, 역사에 이름이 남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종응의 활동이 일제에 노출되지 않을 리 없다. 1922년 3월 30일 최종응은 소위 '공갈 및 제령 제 7호' 위반 혐의로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그에게 1977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 누리집 '독립운동가 공훈록'의 최종응 부분


생몰년도 : 1871.8.21~1944.1.24 / 출신지 : 대구 달성
운동 계열 : 군자금 모집 / 훈격(연도) : 애족장(1990)

공적 내용 : 대구 사람이다. 그는 1920년 임시정부 경북 선정사로 임명되어 동지 고정일·윤철·이태훈 등과 함께 독립운동자금 조달 기반을 조성하였으며 동년 9월 경상·충청·전라도 등지를 순방하며 자산가들의 자산명부를 작성하여 군자금 조달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0년 11월에는 조석환 등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할 것을 요구하여 그들에게 800원을 받아 임정 파견원 고일치에게 전달하였다. 이후 계속해서 군자금 모집을 위해 1921년 2월 경북 칠곡군에 사는 윤병돈 등 경북에 거주하는 부호 수 명에게 2,000원 내지 5,000원을 요구하는 군자금 납입 명령서를 송부하고 윤병돈으로부터 300원을 받아 이태훈에게 전달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일경에 피체되어 1922년 3월 30일 소위 공갈 및 제령 제7호 위반으로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백불고택은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민간 주택으로 국가 지정 민속자료 261호이다. '백불'은 최흥원의 호 '백불당'에서 왔다.
 백불고택은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민간 주택으로 국가 지정 민속자료 261호이다. '백불'은 최흥원의 호 '백불당'에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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옻골마을에 왔으니 백불고택, 보본당, 두 집 사이에 설립되어 있는 가묘(家廟, 집 안에 있는 사당), 최흥원이 제자들을 가르쳤던 수구당(數咎堂), 최흥원의 아들 최주진(崔周鎭)을 기려 1910년에 세워진 동계정(東溪亭) 등을 두루 둘러본다. 수구당과 동계정도 문화재자료 41호와 45호로 등재된 문화유산이다.

마을 안 골목길을 양옆에서 꾸며주고 있는 집집마다의 담장들도 등록문화재 266호로 지정되어 있는 문화재다. 36세이던 1740년에 부인과 사별한 뒤 세상을 떠나는 1786년까지 무려 46년 동안 재혼도 하지 않고 첩도 두지 않았던 대선비 최흥원의 반듯한 인생만큼이나 고운 담장이 사뭇 눈길을 사로잡는다.

여러 집과 마을 담장이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는 둔산동

돌아나오는 길에 '최흥원 정려'를 본다. 마을 안으로 들어설 때는 무심히 지나쳤던 정려다. 선비나 충신으로서가 아니라 '효자' 최흥원을 기려 1789년(정조 13)에 조정에서 세웠다. 독립운동가 최종응도 어릴 때 이 정려를 보며 자랐을 것이다.

최종응 독립지사의 금전고택은 민박 시설로도 지정되어 있다. 왕건, 최흥원, <반계수록>의 역사가 서려 있는 옻골마을에 들어 독립지사의 고택에서 민박 하룻밤을 보내는 체험, 생각만 해도 흥미롭고 재미있을 것 같다. 오늘은 사진만 찍고 돌아서지만 언젠가는 꼭 그렇게 해보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며 발길을 돌린다.

최흥원이 <반계수록> 출간 준비를 했던 보본당
 최흥원이 <반계수록> 출간 준비를 했던 보본당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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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최흥원, #최종응, #반계수록, #옻골마을, #보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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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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