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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까지만 해도 재산목록으로 손꼽던 소
 1960년대까지만 해도 재산목록으로 손꼽던 소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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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까지만 해도 농가에서 재산 목록으로 손꼽던 소는 풍년 농사를 기약할 수 있는 커다란 수단이었습니다. 집집마다 한두 마리씩은 키우던 소였지만 일반 농가에서는 점차 보기 힘들어지게 된 게 소와 송아지입니다.

소는 아무 때나 사고파는 게 아니었습니다. 자식들 시집장가 보낼 때, 대학공부를 시키기 위해 커다란 목돈이 필요한 정도가 아니면 감히 생각할 수 없었던 게 소를 파는 일이었습니다.

소를 마련할 형편이 안 되던 집에서는 남의 집 소를 가져다키워 늘어난 돈을 반반씩 나눠 갖는 어우리 소를 키우기도 했습니다. 키우던 소가 새끼라도 낳으면 졸지에 소 반 마리에 해당하는 재산이 늘어나니 커다란 행운이었을 겁니다.

소가 없어지니 '어더더더~, 워~ 워~' 하며 소를 부리던 모습, 커다란 눈 껌뻑거리며 달구지를 끌던 모습, 되새김질을 하느라 잠시도 입놀림을 멈추지 않던 소도 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소가 없어지니 소를 키우던 외양간이 없어지고, 외양간에 붙박이처럼 설치돼 있던 구영(구우), 아침저녁으로 쇠죽을 쑤던 사랑채 아궁이에 걸려있던 쇠죽솥, 여물을 퍼 담던 여물바가지, 쇠죽을 뒤적이거나 퍼 담을 때 쓰던 여물갈고리, 소를 매놓던 쇠말뚝, 겨울이면 소 등에 입혀 주던 덕석, 딸랑딸랑 소리를 내던 소 방울(워낭), 논밭을 갈 때면 소 입에 씌우던 입망(부리망), 소를 잡아매던 고삐, 소코를 꿰뚫고 있던 코뚜레도 없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를 이용해 논밭을 갈던 쟁기, 쟁기를 목덜미에 걸어 끌던 멍에, 쟁기로 갈아엎은 논을 평편하게 고르던 써레도 이젠 더 이상 보기 힘들어졌습니다. 1960년대 무렵엔 농가의 빈부를 가늠하게 했던 소가 그 이전, 조선 초에는 한 마을의 빈부를 가늠하였다고 하니 소가 차지하는 경제적 비중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점점 커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 초에 소를 키우는 마을은 부자 마을이었고, 소를 키우는 집은 부잣집이었다(有牛馬富戶者). 단종端宗 원년(1453), 도승지 박중손朴仲孫은 한 마을 안에서 농우를 가진 자는 한두 집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한 마리의 소가 있고 없는 것으로써 한 마을의 빈부가 달려있다"라고 했다. 15세기 중엽까지 마을의 빈부가 소를 한 마리라도 가졌는지에 따라 나뉘었다는 의미다. - <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 26쪽


<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

<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 / 지은이 김동진 / 펴낸곳 ㈜위즈덤하우스 미디어그룹 / 2018년 4월 13일 / 값 15,000원
 <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 / 지은이 김동진 / 펴낸곳 ㈜위즈덤하우스 미디어그룹 / 2018년 4월 13일 / 값 15,000원
ⓒ ㈜위즈덤하우스 미디어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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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지은이 김동진, 펴낸곳 ㈜위즈덤하우스 미디어그룹)는 소와 소고기와 관련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역사적 기록들을 바탕으로 소와 조선인의 삶, 조선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에 투영돼 있는 소고기를 실타래 풀 듯 조명하고 있는 책입니다.

소는 한 집안의 빈부를 가늠하는 수단이자 척도였습니다. 요즘이야 논밭을 갈아엎는 일쯤은 트랙터로 쉽게 하고 있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지력을 높이기 위해 논밭을 갈아엎을 일은 소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농사를 지을 때 소 한 마리가 장정 여덟 몫을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장정 여덟이 소가 하는 일, 하루 종일 쟁기 끄는 일을 대신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닐 겁니다.

흙에서는 곡식을 심고 거둔다. 소는 능히 갈 수 있다. 농사는 땅에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 소에 화가 미치면 농사에도 재앙이 된다. 소가 없으면 갈이를 할 수 없고, 갈이를 할 수 없으면 농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농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먹을 것이 없고, 먹을 것이 없으면 인류가 끊어진다. 숙종 6년, 서인의 집권으로 삭탈관직 된 후 안협에서 칩거하던 허목이 쓴 글이다. - <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 84쪽


소는 노동력을 대신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만 중요했던 것이 아닙니다. 먹을 것으로도 중요했습니다. 소고기에는 정치적 의미가 있었고 사회·문화적 상징이 있었습니다. 요즘이야 돈만 있으면 누구라도 언제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게 소고기지만 예전엔 그렇지 않았습니다.

법으로 금했습니다. 자칫 반역을 도모하는 역적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법이 금하고 있다고 전혀 먹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드러내놓고 먹을 수 있는 핑계를 찾았고, 구실이라도 만들어 잡고 먹었습니다.

"소고기는 국왕의 품격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소고기는 왕위를 찬탈하려 모의하는 반역자들의 잔치에 빠질 수 없는 음식이었다. 나라의 허락을 받지 않고 소고기를 먹는 행위는 반역의 징표이기도 했다." - <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 38쪽

"나라님과 양반 사대부가 소고기를 즐길 때 백성들은 소를 먹었을까? '설마 조선시대 백성들이 얼마나 소고기를 먹었겠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역사는 백성들 역시 소고기 잔치를 열기에 바쁘기 그지없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 <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 43쪽


나라에서 매일 잡는 소 500마리와 개인이 매일 잡는 소 500마리를 합하면 전국에서 매일 도살하는 소가 1000마리에 이르던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기록으로 더듬어 챙기는 생활의 지혜

요즘은 시골에서도 보기 힘들어 진게 소가 논밭을 가는 모습입니다.
 요즘은 시골에서도 보기 힘들어 진게 소가 논밭을 가는 모습입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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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긴 소고기 삶는 법
①무릇 소고기나 늙은 닭이나 아무것이라도 이스랏나무(산앵두나무)를 고고와 한데 넣고 뽕나무로 때서 삶으면 쉬 무르고 부드러워진다. ②뽕잎 스무 닢과 살구씨 껍질을 벗기고 보늬(밤같이 겉껍질이 있는 과실 속에 얇은 껍질)를 긁고 대여섯 개를 한데 넣어 삶으면 비록 독한 고기라도 해가 없다. -<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 188쪽


기록과 통계로 읽는 역사, 소와 소고기로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바라보고 있는 책에서는 지금 알아두어도 좋을 생활의 지혜까지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자연인으로의 삶을 꿈꾸는 이들에겐 '소와 소고기로 하는 처방'과 '고기를 말리고 오래두는 법' 등이 자연인으로서의 삶을 좀 더 풍부하게 해주는 훈수가 되고, '질긴 고기를 부드럽게 하는 법' 등은 어느 누구라도 새겨 두면 좋은 삶의 지혜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덧붙이는 글 | <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 / 지은이 김동진 / 펴낸곳 ㈜위즈덤하우스 미디어그룹 / 2018년 4월 13일 / 값 15,000원



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 - 소와 소고기로 본 조선의 역사와 문화

김동진 지음, 위즈덤하우스(2018)


태그:#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 #김동진, #㈜위즈덤하우스 미디어그룹, #쟁기, #송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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