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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전, 옥수수밭에서 아버지와 나
 10년전, 옥수수밭에서 아버지와 나
ⓒ 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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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가을, 아버지는 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연세 여든일곱이었다. 장례가 끝나고 가족들이 화장터에서 순서를 기다려 아버지 유골을 받았다. 아직 식지 않은 유골 상자를 받아 안고 엄마는 당신의 뺨을 부비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여보~ 이제 새처럼 훨훨 날아서 고향에 가세요. 거기서 부모님도 만나구요... 그리고 우리 다시 만나요."

우리는 아버지의 유골을 팔공산 자락에 훠이훠이 뿌렸다. 아니 던졌다. 찰밥을 지어 유골과 섞어 작은 주먹밥처럼 만든 것이었다. 새들이 아버지의 유골을 날라 고향땅이라도 밟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생전에 아버지가 말씀하신 풍장(風葬) 혹은 조장(鳥葬)을 상징으로나마 따랐던 것이다.

지난 4월초에 평양에서 열린 '남북합동공연'을 화면으로 보고 또 보았다. 남과 북의 가수들이 함께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노래를 부를 때 가슴 한쪽이 뻐근했다. 남편과 나는 "아, 정말 좋다"라는 말을 수없이 되뇌었다. 그리고 가수 강산에의 노래를 들으면서는 나도 아버지의 애창곡이 새삼 떠올랐다.

'두만강 푸른물에 노젓는 뱃사공을 볼 수는 없었지만~~'

내 입에서 절로 흥얼거려진 노래는 강산에의 '두만강 푸른물에' 버전이었다. 아버지의 두만강버전을 듣지 못한 게 얼마나 됐다고 내 입에서 절로 강산에 식의 두만강 푸른물(라구요)이 절로 나오는 것일까. 아버지의 애창곡은 몇 곡이 정해져 있었다. 두만강뿐만 아니라 이별슬픈 부산정거장, 굳세어라 금순아, 또 '이풍진 세상을 만났으니~'로 시작하는 '희망가'는 당신의 18번이었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너의 희망이 무엇이냐/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니/희망이 족할까/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곰곰히 생각하니/세상 만사가 춘몽중에/또 다시 꿈 같도다."

평양의 남북합동공연을 보다가 내 입에 달라붙은 노래 한 가락이 있다. 공연 마무리 때 나왔던 노래 가사중의 한 소절, '안녕히~ 다시 만나요'. 이 짧은 가락에 나는 아버지 유골상자에 얼굴을 부비며 엄마가 했던 말 "우리 다시 만나요"가 자꾸 오버랩 되었다.

엄마가 아버지에게 절절히 전하고 싶었던 말, 그 말은 남북이산가족의 한결같이 소원했던 기도였다. 화면에 나오는 남과 북, 그리고 북과 남의 가수들 노래가 내게는 "우리 다시 만나요!"로 귀결되었다.

어릴 때 기억으로 우리 집 명절은 이웃의 다른 집과 달랐다. 친척이 서로 오가는 친구들의 집과 달리 누가 찾아오거나 어디 갈 곳이 없었다. 엄마가 제사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아버지는 집안 청소를 했다. 제사가 끝나면 아버지는 어디론가 사라지셨다.

홀로 임진각에 가서 고향땅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돌아오는 것이었다. 명절 때 우리는 아버지가 으레 임진각에 가시겠거니 했다. 당신이 술이라도 하는 분이었다면 친구들도 사귀고 좀 덜 외로운 삶을 살았을까. 명절날만큼은 아버지의 애창곡이 계속 돌아가는 카세트 테잎처럼 같은 레퍼토리로 반복되었다.

아버지가 임진각에서도 풀지 못한 그리움은 지도책을 보는 걸로 대신했다. 우리들이 학교에서 새 학기에 받는 '사회과부도'는 아버지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특별한 책이었다. 하루 종일이라도 지루해하지 않고 지도책을 들여다보는 아버지를 아무도 간섭하지 않았다. 그때는 당신의 고향을 자유롭게 여행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2018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27일 오후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선언'에 서명하고 발표했다. 서명을 마친 두 정상이 잡은 손을 들고 있다.
▲ 남북 정상 '판문점 선언' 서명 2018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27일 오후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선언'에 서명하고 발표했다. 서명을 마친 두 정상이 잡은 손을 들고 있다.
ⓒ 2018남북정상회담 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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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 남북정상회담이 시작되는 아침부터 나는 화면을 떠날 수 없었다. 두 정상이 손을 맞잡고 남과 북의 경계에서 함께 걸음을 옮길 때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 뜨거움이 벅차올랐다.

60년대 후반,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반공'은 너무 당연했다. 반공이 아닌 것은 '빨갱이'였다. 나는 집에서는 아버지로부터, 학교에서는 선생님으로부터 반공이 세뇌된 세대였다.

아버지는 한국전쟁으로 혈혈단신 월남한 거제도 반공포로였다. 휴전이 되면서 아버지는 북에 돌아가지 않았다. 남쪽에 홀로 남은 아버지는 남대문시장의 과일을 취급하는 가게에서 일하게 되었다. 혼자인 걸 안 주변 사람들이 아버지의 혼처를 물색했다. 그렇게 만난 인연이 엄마이다.

외롭기는 엄마도 마찬가지로 일제치하에서 부모를 잃고 남동생마저 행방불명이 된 처지였다. 큰 집에 의탁하고 살던 엄마가 아버지를 만나면서 살림을 시작했을 때 엄마는 행복했다고 한다. 가난했지만 서로 의지하고 사랑하며 신혼의 살림을 꾸려가면서 언니와 나, 남동생을 낳았다.

아무런 기술도 없고 건강한 체력도 아닌 아버지를 만난 엄마는 점점 강력한 생활전사가 되었다. 두 분이 힘겹게 마련한 집은 보증을 잘 못 서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날아갔다. 식솔들은 비닐을 씌운 창고에 거쳐하게 되었다.

뒤늦게 아버지가 목수 일을 시작하면서 그나마 밥을 먹게 되었지만, 노동자의 생활은 고되었다. 인생말년에 텃밭을 가꾸게 되었으나 그것도 잠시 였다. 아들 직장 문제로 고층아파트에 거의 갇히다시피 한 생활은 당신의 기억을 알츠하이머에 빼앗기게 된 단초가 되었다.

아버지의 고향은 평안남도 강서군 남포면으로 누나들 맨 아래 2대 독자로 태어났다. 내가 어릴 땐 잘 몰랐지만, 크면서 어렴풋이 북한에 당신의 부모가 정해준 배필 사이에 3남매가 있다는 걸 알았다. 남북이산가족 찾기가 한창이던 1983년, 아버지는 당신의 조카(나에겐 고종오빠)를 찾았다. 아버지와 조카가 서로 찾는 사람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아버지 큰 누나의 아들이 아버지가 넘어 온 엇비슷한 시기에 월남했고, 같은 서울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와 조카의 나이는 서너 살 차이로, 어릴 적 고향에서는 삼촌과 조카가 서로 이름을 부르며 같이 놀았다고 한다. 그때 만난 아버지의 조카, 즉 내게 고종오빠는 지병이 있어 아버지보다 3년 먼저 돌아가셨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7일 오후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에서 열린 ‘2018남북정상회담 환영만찬’에서 옥류관 요리사들이 직접 요리한 평양냉면을 먹고 있다.
▲ 옥류관 평양냉면 먹는 남-북 정상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7일 오후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에서 열린 ‘2018남북정상회담 환영만찬’에서 옥류관 요리사들이 직접 요리한 평양냉면을 먹고 있다.
ⓒ 한국공동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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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 장면을 지켜보면서 냉면 얘기를 하는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농담 한마디는 아직 내 안에 가라앉아 있던 '반공'을 가볍게 날려버렸다. '평양냉면' 얘기를 꺼내는 그 순간도 뭔가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 있었는데, 게다가 "멀리서 평양냉면을... 멀다구 말하면 안 되갔구나~"라는 말을 들으니 '뿔 달린 빨갱이'가 비로소 내 형제로 실감되었다. 그리고 다시 솟구치는 아버지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웠다.

아버지와 냉면은 특별했다. 언제부터의 기억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엄마가 만든 냉면은 아버지에게 최고로 인정받는 음식이었다.

"이야, 네 엄만 고져 냉면 참 맛나게 한다우."

때마다 임진각을 가는 것으로 그리움을 풀고 그 헛헛한 가슴을 아버지는 냉면으로 달랬던 것 같다. 아버지는 체질상 술을 한모금도 못하는 분이었다. 술꾼이 술을 찾아 나서듯 아버지는 엄마가 집을 비울 때면 남대문시장의 단골로 사먹는 냉면집을 다녀오곤 했다. 엄마는 계절에 따라 열무냉면, 오이냉면, 동치미냉면 등을 아버지 입맛에 맞춰 다양하게 만들었다.

"내래 고져~ 평양냉면 한 그릇 먹고프다."

언젠가 겨울, 아버지가 편찮아서 누워계실 때 어리광하듯 엄마를 바라보며 아버지가 말했다. 엄마는 아버지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아유, 몸도 성찮은데 찬 냉면이 그리 드시고 싶우?'라고 물었다.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 냉큼 대답했다.

"고럼!!"

아버지는 자리를 걷고 엄마가 정성껏 만든 냉면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국물까지 남기지 않고 맛나게 다 드시고 어린애처럼 만족스러워했다. 아버지 목소리는 지금 내 귀에도 생생하다.

"동치미냉면 국물이 아주 쨍, 하누만!"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발 빠르게 움직이는 일정들이 감지된다. 뭔가 통 크게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분위기다. 11년 전,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 때와는 또 다른 신념이 생긴다. 이념이 아니라 존엄을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뉴스를 들으면서 문재인 정부의 '대담한 상상력'에 박수를 쳤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은 사실 눈에 보이지 않은 것들로 만들어졌다. 상상은 결코 환상이나 사라질 허상이 아니다. 상상력이야말로 진정한 실체이다'라고 누가 말했던가.

조카를 얼싸안으며 평안도 사투리로 벅찬 감정을 나눴던 아버지의 사연은 뭉클하긴 했으나 내게 그리 절박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문득 절실해진다. 북쪽에 남긴 당신의 혈육, 또 내 혈육이기도한 그들이 북한에 살고 있는 것이다. 지금 나는 이산가족의 당사자가 된 걸 새삼 깨닫는다. 살면서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얼굴, 그러나 우리는 당장에 알아볼 것만 같다. 달리 핏줄이겠는가.

나는 상상해본다. 북쪽의 오빠와 언니 3남매, 남쪽의 언니와 나, 남동생, 이렇게 6남매가 한데 모여 서로 아버지의 얘기를 나누고, 아버지고향의 평남 강서에서 평양냉면을 함께 먹는 모습을. 강력한 힘이 숨어 있는 상상력은 간절히 바라는 것들을 실제로 이뤄지도록 우리를 움직이게 할 것이다. 판문점회담이 평화의 씨앗이 되어 나와 우리의 상상력이 현실이 될 것을 믿는다. 요즘 아버지가 사무치게 그립다.


태그:#남북정상회담, #아버지, #판문점, #냉면,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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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가면을 줘보게, 그럼 진실을 말하게 될 테니까. 오스카와일드<거짓의 쇠락>p182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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