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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문 앞에서의 의식
 대한문 앞에서의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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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에서 용산 전쟁기념관까지 걸어가는 길

용산으로 가는 조선통신사 길의 출발점은 덕수궁 앞 대한문이다. 우리가 출발지를 대한문으로 정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최초의 통신사인 회답 겸 쇄환사가 1607년 1월 12일 정릉동 행궁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정릉동 행궁은 현재의 덕수궁 석어당(昔御堂) 또는 즉조당(卽阼堂)으로 추정할 수 있다.

둘째, 이번 조선통신사 옛길 걷기의 이슈가 '용산공원의 조선통신사 사행길 찾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한문 앞에서 '서울시장님! 용산공원의 조선통신사 사행길을 찾아주세요'라는 플래카드를 들었다.

여기서 우리는 조선통신사 현창회(顯彰會)를 말한다. 현창이란 드높여 알림을 말한다. 조선통신사 현창회는 조선통신사를 알리고 연구하기 위해 생긴 단체로,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관리들의 후손을 중심으로 2007년 결성됐다.

그동안 조선통신사 관련 행사에 꾸준히 참석해 인지도와 영향력을 높여 왔다. 지난해 제6회 서울-도쿄 조선통신사 한일 우정걷기에 참여했고, 11월에는 연세대학교 열상고전연구회 주관으로 열린 '제2차 통신사 부사 박재선생의 <동사일기> 400주년 학술대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번 행사의 취지를 설명하는 서울시 용산공원전략팀 김홍렬 주무관
 이번 행사의 취지를 설명하는 서울시 용산공원전략팀 김홍렬 주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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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문 앞에서는 매일 오전 11시에 수문장 교대식이 열린다. 교대식이 마치 조선통신사 출발을 축하하고 장도를 기원하는 의식처럼 느껴진다. 조선통신사는 일본 관백에게 전달할 국서를 들고 출발하는데, 수문장 교대식에서도 문서함을 전달하는 의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교대식 과정에서 북도 치고 악기도 연주하며 분위기를 돋웠다. 통신사 행렬은 100명쯤 됐으나, 이번 옛길 찾기에 함께한 사람들은 모두 14명이다. 그중에는 서울시 용산공원전략팀 김홍렬 주무관도 있다.

김 주무관이 이번 행사의 목적과 의미를 설명한다. 목적은 용산공원을 지나는 조선통신사 사행길 찾기고, 의미는 그러한 활동을 알리고 여론을 조성하는 일이다. 이러한 행사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함께 하는 시민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결과적으로 조선통신 현창회 중심의 활동으로 끝난 아쉬움은 있지만, 21세기 조선통신사길을 걷고 기록을 남긴다는 데 의미를 부여하기로 했다.

숭례문 파수의식
 숭례문 파수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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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시 대한문에서의 의식을 마치고 출발한 시각이 11시 20분이다. 일행이 걸어서 숭례문에 도착한 것은 11시 40분이다. 그곳에서 10분 이상 숭례문 파수의식을 보고 낮 12시쯤 한양도성길을 따라 남산으로 올라간다.

남산을 넘으면 용산구 후암동이 된다. 우리는 후암동 주민센터 인근에서 점심을 먹고 전생서(典牲署)터를 찾아간다. 그때 시각이 오후 2시다. 전생서를 확인하고 용산중학교, 용산고등학교를 지나 용산 미군기지를 북서쪽으로 우회한다. 그것은 두텁바위로 남쪽으로 이어지는 옛길이 막혀있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이 전쟁기념관 '용산공원' 전시실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다. 전시장을 한 바퀴 둘러보고 전시실 안에 마련된 토크콘서트 자리에 앉는다. 이곳에서 오늘 행사에 대한 품평회를 갖는다. '용산공원' 전시행사와 연계해서 의미를 더 했다. "용산공원의 조선통신사 사행길을 찾아달라"는 요구를 표현했다. 현창회 회원들의 단합된 의지를 보여줬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용산공원의 반환에 관심을 갖자. 그렇게 의견을 모으고 해산한 것이 오후 4시다.   

숭례문 앞에서 또 한 번 의례를 거치다

조선통신사의 길 표지석 살펴보기
 조선통신사의 길 표지석 살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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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문을 떠나 숭례문을 우회한 우리 일행은 잠시 '조선통신사의 길' 표지석을 확인한다. 조선통신사 400주년을 기념해 2007년 4월 조선통신사 문화사업회가 숭례문 앞에 세웠다. 표지석을 보고 숭례문 안으로 들어가니 파수의식을 준비 중이다. 우리는 숭례문 앞에서 플래카드를 들고 '조선통신사 사행길을 찾아달라'는 뜻을 표출한다. 그리고 이어서 진행되는 파수의식을 살펴본다.

파수란 도성의 성곽을 수비하는 일을 말한다. 그러므로 파수의식은 보통 도성문 앞에서 진행된다. 파수의식은 인정(人定)과 파루(罷漏)에 도성문을 열고 닫는 도성문 개폐의식과 순라의식으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야간과 새벽에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현대의 파수는 보여주려는 것이기 때문에, 숭례문 앞에서 오전 11시 40분부터 10분간 진행된다.

숭례문 파수의식
 숭례문 파수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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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의식은 파수군의 근무 교대가 중심이다. 근무교대를 통해 새로운 수문군이 도성을 지키고, 교대를 마친 파수군은 순라군이 돼 남대문 주변을 순찰하게 돼 있다. 그러나 순라의식은 생략한다. 파수군이 대한문 수문장 교대식 후 숭례문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순라의식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숭례문 파수의식이 끝나면 그들은 다시 대한문으로 돌아간다.

파수의식을 보고 우리 일행은 다음 행선지인 남묘(南廟)를 찾아간다. 남묘는 숭례문에서 남산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 바로 바깥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산육교를 지나 도성을 따라 남산으로 올라간다. 도동삼거리에 이르면 길은 소파로와 소월로로 갈라진다. 우리는 소월로를 따라 힐튼호텔 쪽으로 이동한다. 그것은 힐튼호텔 남쪽에 남묘(중구 도동1가 68번지) 터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12시 15분경 힐튼호텔 주차장 쪽에 있는 남묘에 도착한다.

쓸모 없는 땅으로 남아 있는 남묘터
 쓸모 없는 땅으로 남아 있는 남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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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묘는 남관왕묘의 준말로 관우의 사당이다. 임진왜란 때 원병으로 온 명나라 군이 1598년 관우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관왕묘다. 1602년 동대문 밖에 또 하나의 관왕묘가 생겨 남관왕묘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남묘는 조선통신사들이 배웅을 나온 관료, 친지들과 이별하는 장소다. 그러므로 술과 음식을 나누며 전별하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그것은 도성을 떠나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현재 남묘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기록을 보면 1950년까지 남묘는 이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 중 정문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파괴됐다. 남묘는 관성묘 유지재단에 의해 1956년 재건됐다. 그리고 1979년 서울역앞 도동지구 재개발 때 동작구 사당동 180-1번지로 이전 복원됐다. 우리는 도동 남묘 터 위에서 플래카드를 들고 사진을 찍는다. 이곳이 남묘였음을 알리는 표지판이라도 하나 세워지길 바라면서.

용산에 있던 두텁바위는 어디로 갔을까?

두텁바위 그림
 두텁바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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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묘를 지나 우수현(牛首峴)을 넘으면 용산구가 시작된다. 이 고갯마루를 넘기 전에 후암(동) 삼거리가 있어,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서울역이 나온다. 고갯마루에는 벽화가 있는데, 갓을 쓴 선비가 말을 타고 고개를 넘는 모습이다.

고갯마루에 소나무와 함께 큰 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게 두텁바위(蟾巖)다. 아마 두터비처럼 생겨 그런 이름이 붙은 것 같다. 투터비는 두꺼비의 옛말로 김천택의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실려 있는 사설시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두터비 파리를 물고 두험 우희 치다라안자
것넌山(산) 바라보니 白松骨(백송골)이 떠잇거날
가슴이 금즉하여 풀덕 뛰여 내닷다가
두험 아래 쟛바지거고
모쳐라 날낸 낼싀만졍 에헐질번 하괘라 

도성도에 나타난 우수현, 섬암, 전생서
 도성도에 나타난 우수현, 섬암, 전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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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두텁바위가 나중에 섬암이 아닌 후암(厚巖)으로 바뀌었다. 두텁을 두꺼비가 아닌 두터운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도로명 주소를 사용하면서 두텁바위로라는 이름이 살아나게 됐다.

두텁바위로는 남산 아래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옛길이다. 그리고 두텁바위로 주변에 옛날 전생서가 자리하고 있었다. 전생서란 조선시대 궁중의 제례에 사용하던 가축을 기르던 관청이다. 이곳에서 소 30마리, 양 60마리, 염소 15마리, 돼지 500마리 정도를 길렀다고 하니, 그 면적이 2만 평 정도는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생서에서 거창한 연회가 벌어지기도 했다

전생서 표지석과 영락보린원
 전생서 표지석과 영락보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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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옛날 전생서를 찾아간다. 전생서를 알리는 표지석이 영락보린원 입구에 있어 찾아가기가 어렵지는 않다. 영락보린원의 도로명 주소는 후암로4길 70이다. 영락보린원은 1947년 한경직 목사가 일제가 운영하던 가마쿠라(鎌倉)보육원을 불하받아 운영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됐다. 사회복지 법인으로 중증 장애아 요양시설과 자립을 가능케 하는 교육시설로 이뤄져 있다. 그러므로 아동복지 종합타운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곳에서 우리는 조선통신사 사행길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전생서 앞을 지나 통신사길이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기록이 곳곳에 나타난다. 남용익(南龍翼)의 <부상록>(扶桑錄)을 보면 "정승 등이 전생서(典牲暑)까지 전송하고 한강 가에서 전송하는 사람들로 조정이 거의 빌 정도였다"라고 기록돼 있다. 조엄(趙曮)은 그의 <해사일기>(海槎日記)에서 전생서에서의 전별연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엄기념관(원주)에 있는 조엄의 모습
 조엄기념관(원주)에 있는 조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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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신이 전생서(典牲暑)에서 조금 쉬는데, 영의정 홍봉한(洪鳳漢) 공이 음식을 차려 전송하였으니, 특별히 나에게 사사로운 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실로 옛날부터의 풍속이다."

전생서에서의 연회에 대한 가장 자세한 기록은 김인겸의 <일동장유가>다. 김인겸은 1763년 일본 통신사 종사관 김상익(金相翊)의 서기(書記)로 뽑혀 일본에 다녀왔다. 그리고 1764년 일본에 다녀온 기행사실을 가사형식의 <일동장유가>로 기록했다.

이 때난 어느 땐고, 계미(癸未) 팔월 초삼이라
북궐(北闕)의 하딕(下直)하고 남대문 내다라셔
관왕묘(關王廟) 얼픗 지나 젼생셔(典牲署) 다다르니
사행을 젼별(餞別)하랴 만됴(萬朝) 공경(公卿) 다 모닷네.
곳곳이 댱막(帳幕)이오 집집이 안마로다.
좌우 젼후 뫼와 들어 인산인해(人山人海) 되여시니
졍 잇난 친구들은 손 잡고 우탄(憂嘆)하고
쳘 모르는 소년들은 불워하기 측량(測量)업네.

전쟁기념관 전시실에서 마지막 정리를 하다

용산 미군기지 앞에서의 의사 표현
 용산 미군기지 앞에서의 의사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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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서 앞으로 난 후암로4길 아래로는 만초천이 흐른다. 지금은 복개되어 길이 났지만, 그 아래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옛날 같으면 전생서 동물들이 이 물을 먹었을 것이다. 길은 두텁바위로31길을 통해 용산중학교 앞으로 이어진다.

조선시대 같으면 이 길이 남단을 거쳐 동남쪽 이태원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길은 미군기지로 막혀 있다. 그러므로 동쪽의 신흥로나 서쪽의 한강대로로 우회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옛길 걷기는 서쪽 한강대로를 지나 전쟁기념관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전쟁기념관에서 쉬어가면서 중간점검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기념관은 전시 교육 행사가 이루어지는 복합기념관이다. 우리는 <용산공원, 시민에게 길을 묻다> 전시가 열리고 있는 2층 기획전시실로 들어간다. 입구에 미군기지 담벼락과 철조망이 재현되어 있다. 금단의 땅임을 알리기 위해서다 우리는 그 담벼락을 따라 걸어왔다. 안으로 들어가면 용산 미군기지의 역사가 1882년 임오군란 때부터 연대순으로 정리돼 있다.

용산공원에 대한 시민들의 소망
 용산공원에 대한 시민들의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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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공원에 대해 시민들이 답한 광고 포스터와 그림도 걸려있는데 흥미롭다. 타이틀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용산의 미래를 상상하라. 즐겨라 용산공원. 용산공원에 녹색불이 켜집니다. 국가대표 No. 1 Park 용산공원. 용산기지가 용산공원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단절되어 있던 용산기지가 자연스러워집니다. 남산과 한강을 연결하는 녹색지대 용산공원. 어린이들이 그린 그림도 사람과 공원 그리고 자연이 함께 하는 주제를 표현하고 있다.

이번에 조선통신사 옛길 걷기 행사를 정리하며 전시실에서 나눈 이야기는, 옛길을 찾아 복원하자는 것이다. 통신사들이 일본을 오가며 남긴 기록을 토대로 옛길을 찾아내 선으로 연결하는 작업을 했다는 점에서 이번 행사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의미 있는 점을 연결하면 자연스럽게 선이 되는데, 그 선이 용산공원에서 단절되었다는 사실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다. 출발시각을 11시로 정해 자연스럽게 수문장들이 통신사 장도를 축하해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는 얘기도 했다. 그리고 올해는 조선통신사 한일우정걷기가 없는 해여서, 이번 행사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 같다.


태그:#용산의 옛길, #덕수궁 대한문, #숭례문, #남묘, #전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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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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