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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도 같았던, 한때는 가족보다 더 뗄 수 없는 사이라고 생각할 만큼 가까웠던 친구가 있다. 많은 시간을 함께 했고, 내 삶의 대소사에는 늘 그녀가 있었다. 나는 우리가 서로를 진심으로 위하고, 사랑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상하게도,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갈수록 그녀와 함께 하는 시간이 고통으로 다가왔다. 서로에 대해 거의 모든 것을 아는 사이니 갈수록 더욱 편안해져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그 반대라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꽤 오랫동안 나 자신을 탓했다. 왜 이러는 걸까. 내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어느 날, 사내 성희롱에 대한 고통을 토로했을 때 그녀가 말했다.

"네가 그런 상황을 만든 건 아닐까?"

그녀의 말은 그 자체로서 일종의 2차 가해이기도 했지만, 내가 우리 관계의 진실을 직면하게 하는 전환점이 되어주었다. 그녀를 만날 때마다 느껴야 했던 숨 막히는 답답함과 막연한 불안함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나는 차츰 알아갔다.

그녀는 늘 모든 것을 내 잘못으로 돌렸다. 내 크고 작은 문제는 물론이거니와 그녀가 약속 시간에 늦은 것 또한 내 잘못이었다. 어떻게 하면 그녀의 짜증을 피해갈 수 있을까, 늘 마음을 졸였다. 사소한 것들이 쌓여 힘겨워졌고, 터놓고 이야기해보려는 시도 또한 번번이 좌절되었다. 그녀는 내가 과도하게 예민하다고, 별 것도 아닌 일을 기억한다고 단정했다.

결국, 그녀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만남을 피할 때마다 그녀가 내 죄책감을 자극했으므로 이조차 쉽지는 않았으나, 나는 다행히 이 이상한 관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를 두려워한 적은 없으나,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그로 인한 혼란을 두려워했던 것도 같다.

오늘에서야 그때의 상황이 뭐였는지 정의내릴 수 있을 듯하다. 그건 바로, 언어폭력이었다.

"언어폭력이란 심리적 폭력의 일부로서, 타인을 공격하거나 타인에게 상처 주는 말, 상대에게 틀린 것을 믿게 하는 말, 또는 상대방을 사실과 다르게 묘사하는 모든 말을 아우른다." (p131)

퍼트리샤 에반스의 <언어폭력> 책표지
 퍼트리샤 에반스의 <언어폭력> 책표지
ⓒ 북바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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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폭력>의 저자 퍼트리샤 에반스는, 피해자 입장에서 경험한 언어폭력의 현실과 뉘앙스를 드러내고, 독자로 하여금 미묘한 언어폭력과 심리 조종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라고 밝히고 있다.

"언어폭력은 멍과 같은 증거가 남지 않을 뿐, 신체폭행과 다르지 않은 일종의 폭행이다. 언어폭력이 남기는 고통은 신체폭력만큼이나 크며, 회복하는 데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린다. 언어폭력의 피해자는 서서히 현실 판단력을 잃고 혼란에 빠진다." (p19)


저자는 이 책이 남녀노소 모두를 위해 쓰였음을 분명히 한다. 가해자는 남성일 수도 있고, 여성일 수도 있다. 다만 상황상 여성 피해자로부터 사례를 수집했기 때문에 언어폭력을 당한 여성이 느끼는 혼란과 고통을 주로 언급했음을 밝힌다. 따라서 부부나 연인 관계가 주로 등장하지만, 독자로서는 언어폭력 그 자체에 주목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저자는 언어폭력이 상대방에게 지배권을 행사하려는 행위라는 점을 반복적으로, 상세히 설명한다. 이는 겉으로 표출될 때도 있지만 매우 은밀하기도 하며, 지속적이고, 강압적이라고 한다. 피해자를 미치게 할 정도로 고통스럽지만, 언어폭력은 그것을 폭력으로 인지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언어폭력은 대부분 은밀하게 이루어진다. 오직 가해자의 파트너만이 언어폭력에 노출된다.
2. 언어폭력은 점차 강도가 높아진다. 따라서 피해자는 서서히 막말에 익숙해지고, 적응한다.
3. 언어폭력은 (폭력처럼 보이지 않는) 다양한 형태의 가면 속에 감추어져 있다.
4. 언어폭력에 대한 피해자의 인식이 가해자에 의해 계속 부인된다. (p30)


언어폭력의 유형은 매우 다양하다. 관심 안 주기, 반박하기, 축소하기, 농담을 가장한 언어폭력, 대화 차단과 말 돌리기, 비난과 책임 전가, 평가와 비판, 하찮아 보이게 만들기, 사기 꺾기, 협박하기, 안 좋은 별명으로 부르기, 잊어버리기, 명령하기, 부인하기, 학대 수준의 분노 등.

"언어폭력이 발생하는 관계에서, 피해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학대를 용인하도록 학습되고, 자존감을 잃어간다.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씌워 희생양으로 삼고, 그녀는 그렇게 피해자가 된다." (p41)


저자가 말하는 언어폭력의 피해는 처참하게 느껴질 정도다. 자신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나 욕구를 불신하게 되고, 삶 전반이나 일에 대한 열의가 감소하거나 없어진다. 항상 경계 태세로 있으며, 어떤 일을 겪게 될지 확신하지 못한다.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닌지 걱정하고,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 수 있기를 바라며 지난 일이나 자기 자신을 계속 되새김질한다. 자신감이 떨어지고, 자신에 대한 의심이 깊어지고, 비난의 목소리가 내면에 자리 잡는다.

저자는 언어폭력을 인지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추어야 하는 것은 피해자 쪽임을 주장한다. 안타깝게도, 가해자에게는 변해야 할 동기가 없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자신의 감정을 인지하고 인정해야만, 비로소 언어폭력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고 한다. 피해자는 가해자로부터 자신의 감정과 느낌 자체를 부정당하는 경우가 많지만, 반드시 그 감정에 주목해야만 상황을 직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고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자기 내면에 깃든 생명력을 인식하고 존중하는 방법이다." (p92)


책은 언어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세계관이 어떻게 다른지, 가해자는 왜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피해자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지했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등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명확히 설명할 수 없지만 고통스러운 관계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다.

책을 읽는 동안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저자의 말은, 내가 이 책을 끝까지 읽도록 만들었다.

"과거의 문제 따위는 잊어버리고 싶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를 통해 배울 수 있고, 이러한 배움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의식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인격이 존중받지 못하면 인간 전체가 존중받지 못하는 것이다." (p21)


많은 사람이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저자는 피해자를 돕기 위한 목적으로 썼고, 가해자가 바뀔 가망성은 적다고 하지만, 나로선 언어폭력이 무엇인지를 널리 알리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한다. 농담처럼 던진 말들,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던 말들도 때로 비수가 되어 꽂힐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인지해야 할 것이다.

저자가 주지하듯, 우리는 호의적인 대우를 받을 권리, 감정적 지원을 받을 권리, 자기 의견을 말하고 그에 대해 예의를 갖춘 응답을 받을 권리, 자신의 감정과 경험을 '사실'로 인정받을 권리 등을 갖고 있다. 우리는 우리 모두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언어폭력 - 영혼을 파괴하는 폭력에 맞서는 법

퍼트리샤 에반스 지음, 이강혜 옮김, 북바이북(2018)


태그:#언어폭력, #퍼트리샤 에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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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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