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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0월 25일 고대집회 이후 민청련은 회원총회를 열어 대통령후보 문제에 관한 입장을 정리하기로 했다. 11월 2일 저녁 영등포 성문밖교회 회의실에서 60여 명의 회원들이 모였다.

민청련 총회에서 '비지' 결정

민청련은 의사결정을 위해 6개월마다 총회를 열었다.
 민청련은 의사결정을 위해 6개월마다 총회를 열었다.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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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의 평민당으로의 분당 선언으로 양김 단일화가 거의 물 건너 간 분위기 속에서도 비판적 지지, 후보 단일화, 독자 후보 3파의 논전이 밤늦게까지 뜨겁게 전개됐다.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표결에 붙였다. 독자 후보론을 지지하는 회원은 상대적으로 적었고, 비판적 지지와 후보 단일화가 비슷했으나 비판적 지지를 지지하는 회원 수가 약간 앞섰다. 비판적지지 : 후보 단일화 : 독자 후보론의 비율이 대략 5:4:2 정도 였다. 결국 민청련의 대통령선거 시기 대선투쟁 방침은 근소한 차이로 비판적지지 입장으로 결정됐다.

당시 결정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당면의 반전두환·노태우 투쟁을 중심축으로 하여 반군사독재 민주연합전선을 강화한다. 둘째, 후보 문제와 관련하여 민청련은 보수자유주의 세력과의 제휴 투쟁을 원칙으로 하되 통일정책의 진보성, 광주학살 원흉처단에 대한 의지, 기층민중의 지지 정도 등을 기준으로 양김 중 김대중을 비판적으로 지지한다. 셋째,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통하여 분출하는 대중의 역동성에 조응하고 민족민주세력의 힘을 결집시켜 후보 단일화를 성취해 내 선거투쟁에서 승리한다. 넷째, 선거 시기의 공동투쟁을 바탕으로 민중운동연합 건설의 토대를 구축한다.'

결정의 핵심은 두 번째 항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였지만 셋째 항에서 후보 단일화가 승리의 요건임을 밝히며 단일화 노력을 계속할 것을 천명했고, 넷째 항에서는 김대중 지지가 민중운동연합 건설의 토대구축을 위한 전술적 선택임을 밝히고 있다.

진통 끝에 이러한 입장을 정리한 민청련은 이후 비상체계를 가동하여 선거 시기 동안 의장단을 포함한 중앙집행위에서 당면 행동지침을 결정 집행하고, 별도로 선전기획팀과 이동선전반을 그 산하에 설치하여 운용하는 한편 기동성과 집중성을 높이기 위한 체계별 비상 동원 체계를 확립하기로 했다.

민청련의 '비판적 지지' 결정은 조직 내부의 민주적 토론절차를 밟아 내린 결정이지만 후유증이 적지 않았다. 극소수지만 후보 단일화와 독자 후보론 입장에 섰던 회원 중 조직의 결정을 어기고 개인적으로 후보단일화운동 진영이나 백기완 독자후보 진영에 참가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 숫자가 아주 적었고, 집단적으로 조직 결정에 반발하는 움직임은 없었다. 민통련이 비판적 지지 결정 이후 서울민통련이나 민중불교운동연합 등 산하단체에서 조직적인 반발과 탈퇴가 있었던 것에 비하면 조직적 규율이 잘 지켜진 셈이었다.

김병곤과 이범영의 '위대한 승리'

김병곤(왼쪽)과 이범영(오른쪽)
 김병곤(왼쪽)과 이범영(오른쪽)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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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배경에는 자신의 주장과 다른 결정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조직의 결정에 충실히 따라준 김병곤, 이범영 등 간부들이 있었다.

김병곤은 처음에는 후보 단일화 입장에 섰었으나 자신이 속한 민청련과 민통련이 많은 토론과 내부 진통 끝에 '비판적 지지'를 결정하자 그 결정을 지지하고, 수호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그리고 그 결정을 끝까지 옹호하고 관철하려고 했다. 그의 건강에 결정적 타격이 된 구로구청 투쟁과 6번째 투옥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김병곤의 조직인으로서의 자세에 대해 김근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장합니다. 오늘 우리가 (김병곤에 대해) 정말로 신화로 만들어야 하는 것은 법정에서 '사형을 주어서 영광입니다.'라고 말한 용기가 아니고, 자신의 의견과 달리 내려진 결정임에도 그것이 공적인 결정인 경우에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단호히 그것을 보위하는 것, 바로 이것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병곤이의 위대한 승리입니다. 신비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 모두의 미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6.29 선언 이후에도 수배가 풀리지 않아 도피생활을 하면서 주로 유기홍 등 정책실 팀과 활동을 이어갔던 이범영도 회원총회 때까지는 자신의 지론대로 후보 단일화 입장을 관철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조직의 결정이 내려지자 주저하지 않고 그에 승복한다. 이에 대해 당시 정책실에서 함께 활동했던 유기홍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비판적 지지론에 반발하여 각 조직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이 후보단일화운동을 위한 조직을 만들어 활동했고, 당연한 일이지만 이범영에게도 함께 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제안을 물리쳤다. 자신의 의견이 옳다는 확신이 있더라도 조직의 다수 의견에 승복하는 자세야말로 조직운동의 가장 기초적인 덕목이면서도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의 이런 태도가 민청련을 분열시키지 않고 발전시킨 힘이 되었다."

민청련의 선거투쟁

1987년 대통령 선거 시기 민청련에서 제작한 전단지 앞면들.
 1987년 대통령 선거 시기 민청련에서 제작한 전단지 앞면들.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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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련과 민청련은 이후 대선 기간 동안 '비판적 지지' 입장에서 김대중 씨의 당선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선거전에 익숙하지 않은 재야단체가 선거 캠프에 들어가지 않고 독자적으로 벌이는 선거운동에는 한계가 있었다. 주로 성명서 등을 통해 김대중 지지 입장을 표명하고, 전단이나 유인물로 가두선전활동 하는 정도였다. 문익환 민통련 의장만이 김대중 대선캠프의 전국 유세에 합류하여 김대중 지지를 호소하는 적극적 선거운동을 벌였다.

민청련은 주로 반노태우 운동에 집중했다. 그런 배경에는 김대중에 대한 적극적 지지와 당선 운동이 다른 한편에서 같은 반군사독재 전선에 있는 김영삼을 비난해야 하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민청련은 [민중신문[과 여러 종의 전단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배포했는데 그 제목만 훑어봐도 당시 민청련의 활동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용서 못할 학살원흉 전·노 일당 처단하자!"
"노태우는 절대 대통령이 될 수 없습니다."
"전두환=노태우식 안정이란 살인, 고문, 최루탄공화국!!"

그밖에도 민청련은 민통련과 함께 '일하는 청년 1,2,3' 시리즈를 발행했는데, 이것은 주로 구로, 성수 지역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선전물이었다.

"아빠, 나는 알아요. 아빠를 죽인 놈이 누군지를"이라는 제목으로 광주학살의 생생한 사진과 함께 광주항쟁의 원인과 경과, 의미를 대화 형식으로 쉽게 풀어쓴 자료집이었다. 자료집 발행자도 민통련, 민청련과 함께 동서울민청련, 남서울민청련, 북서울민청련을 전화번호와 함께 병기하여 지역지부 회원들의 선전활동에 활용했다.

선거 막바지에 가면서 김대중 후보 이름을 직접 거명하며 지지를 호소하는 유인물을 만들었다. 선거일 1주일 전부터는 민통련, 민청련, 지역지부 이름으로 '독재타도·민주쟁취 1,2,3호' 시리즈로 전단을 발행했는데, 그 중 마지막 3호의 제목은 "민주 승리의 축제를 김대중과 함께!! 우리 모두 김대중, 압도적 승리를!"(1987년12월14일자)이다.

이 전단 뒷면을 보면  12월 12일~18일을 '민주민권승리 쟁취기간'으로 설정하고, 12월 16일 선거일을 부정선거를 막아내고 승리를 쟁취하는 '민주혁명의 날', 12월 18일을 승리를 확인하고 축제를 벌이는 '민주승리의 날'로 정했다. 18일에는 정오에 시청광장에서 축제를 벌이자는 구체적인 시간 장소까지 명기했다.

선거 승리가 목전에 온 듯한 이런 선전물들을 기획했던 사람들은 정말 승리를 확신했을까? 사실 그들에게는 단지 선거용 구호만은 아니었다. 당시 선거운동 일선에서 뛰었던 사람들, 그 중에서도 특히 김대중 캠프 사람들은 부정선거만 없다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확신에 차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4자필승론'과 공정선거감시단 활동

1987년 11월 20일에 열린 민주쟁취국민운동 공정선거감시 전국본부 발대식. 제일 앞사람은 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 박형규 목사
 1987년 11월 20일에 열린 민주쟁취국민운동 공정선거감시 전국본부 발대식. 제일 앞사람은 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 박형규 목사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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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가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재야인사와 청년활동가들도 선거의 블랙홀 같은 마력에 빠져들었다. 애초 선거로 사회를 변혁할 수 있다는 선거혁명론을 거부하고, 선거 결과보다는 선거 시기의 대중투쟁에 더 역점을 두어야한다고 했던 청년활동가들 역시 대통령선거의 엄청난 열기에 압도당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양김단일화를 전제로 했던 비판적 지지 입장의 활동가들도 점차 단일화 없이도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져들어 갔다. 11월 29일,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김대중 후보의 100만 선거유세, 그리고 12월 13일 보라매공원에서 열린 150만 선거유세에 참석한 김대중 지지자들은 엄청난 인파와 열기에 열광했다. 그들은 '김대중'을 함께 연호하고 함께 대로를 행진하며 감격해했다.

이런 경험은 김대중 지지자들로 하여금 김대중이 반드시 당선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다. 또한 당시 평민당에서는 '4자필승론'과 여론조사에서 김대중 후보가 압도적으로 1위를 달리고 있다는 정보를 퍼트렸다. 이런 것들이 김대중 승리의 확신을 더욱 더 굳히게 했다. 
이런 확신은 일반 대중들만이 아니라 재야인사들 사이에도 광범하게 퍼져나갔다.

예로 선거 막바지에 국민운동본부에서 상집위의 결정으로 채택한 공정선거감시단 활동이 그것이다. 말하자면 4당 경쟁구도에서도 국민은 압도적으로 양김을 지지하고 있고, 야권 후보의 승리가 결정적이기 때문에 선거감시만 잘 하면 선거에서 야권의 승리는 무난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국본은 공정선거감시단을 전국적으로 결성하고 12.16 대선에서 부정선거를 방지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채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국본 사무국에서는 독재정권의 영향 하에 있다고 생각한 공중파TV 방송과 별도로 개표결과를 집계하기 위해 당시로는 귀했던 20여 대의 컴퓨터까지 도입하여 독자 집계를 준비했다.

후보단일화가 물 건너 간 상황에서도 부정선거만 막으면 이긴다는 생각이 바닥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특히 비판적 지지 입장에 서 있던 인사들 사이에서 이런 생각이 많았고, 그래서 공정선거감시운동에도 더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공정선거감시단에서는 선거 당일에 투개표과정을 감시하기 위해 투표소와 개표소에 감시단을 조직하여 파견했고, 국본 사무실에 상황실을 두고 비상상황에 대비하였다. 구로구청부정투표함사건은 이런 과정에서 생긴 사건이었다.

양김 선거캠프의 판단은?

1987년 대선에서 후보 단일화에 대한 시도는 선거 막바지인 일주일 전까지 이어졌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단일화 집회를 열고 있는 사람들
 1987년 대선에서 후보 단일화에 대한 시도는 선거 막바지인 일주일 전까지 이어졌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단일화 집회를 열고 있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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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작 양김 선거캠프에서는 상황을 낙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문사 여론조사와 자체 여론조사를 통해 판세를 계속 추적하고 있었고, 그 결과는 대체로 양김이 노태우 후보에 뒤지는 것으로 나왔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그래서 투표일 며칠 전에 김대중 캠프에서는 양김 중 한 사람이 사퇴해 후보를 단일화하는 시나리오가 마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사실은 이희호 여사의 자서전 [동행]에서 확인할 수 있다.

"투표 이틀 전 후보단일화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있었지만 '4자필승론', '승리는 필연'이라고 끝까지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전날 보라매공원의 흥분이 독이 되었던 것이다. … 나 역시 국민 앞에 큰 죄를 지은 느낌이었다.".


태그:#민청련, #후보단일화, #비판적 지지, #김병곤, #이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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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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