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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을 넘었거나 평양에 다녀온 얼굴들이 생각나는 하루다. 임수경씨와 고 문익환 목사님. 1989년의 대한민국에서 북한은 적이고 가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그 금지된 땅을 단발머리와 '조선옷' 차림으로 당차게 휘젓고 다니던 이들.

당시 나는 군대에 있었는데 정훈장교가 대학생들이 주장하던 '통일'이 왜 위험한지를 매주 교육했다. 8월 15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자마자 현장에서 연행되는 뉴스를 내무반에서 보던 기억도 난다.

복학 후 동아리 동료들과 감옥에 있는 임수경씨에게 편지를 썼던 기억도 난다. 덕분에 '통일'을 내 문제로 고민하게 되었다고, 고맙다고 썼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의 터전 한울삶에 모신 고 문익환 목사의 영정 사진.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의 터전 한울삶에 모신 고 문익환 목사의 영정 사진.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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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1991년에 학교로 통일 강연을 온 문익환 목사님을 무대 뒤에서 잠시 만난 적이 있다. 89년 방북으로 투옥되었다가 가석방 중이었는데 '북한'과 '통일'이라는 위험한 주제로 강연을 하고 다니셨다.

목사님이 쓴 <히브리 민중사>를 감명 깊게 읽었다고 하니 웃으시며 다음 강연에 갖고 오면 글귀 하나 써 주신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목사님은 가석방 기간의 강연 활동이 문제가 되어 재수감 되셨고, 몇 년 후 돌아가셨다.

아직도 책꽂이 뒤 칸 깊은 곳에 저 책이 있다. 깨어있는 민중들의 힘이 세상을 구원한다고 가르쳐 준 책이다.

당시는 운동권이 아니더라도 노선을 양분하던 PD(민중민주)와 NL(민족해방)을 구분할 줄 아는 학생들이 많았다. 민중 해방과 노동자를 구호로 외치면 PD고, 민족자주와 통일을 외치면 NL이라는 식이다.

심지어 자기가 속한 단과대 학생회장의 노선으로 자기의 노선을 정하는 친구도 있었다. 이론 서적으로 공부하고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운동권과 친하면 운동권으로 치부되던 시절이었다.

내가 속한 동아리는 NL이 주관하거나 전대협이 주관하는 행사에 나가곤 했다. 그래서 나도 NL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었다. 그런 질문에 "나는 그냥 민족음악과 마당놀이가 좋을 뿐"이라 대답했다. 그래도 그들이 권하는 책과 전해주는 프린트들을 빠짐없이 읽었고 함께 가자는 행사에 빠짐없이 참여했다.

그런 모임을 통해 임수경씨와 문익환 목사님을 알게 되었고 이름 없는 많은 활동가를 만나게 되었다. 그들을 만나며 느낀 내 소감은 '뭐 이런 낭만주의자들이 다 있지?'라는 걸로 요약할 수 있다. 그들이 얘기하는 걸 모두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을 신뢰했기에 그들의 생각과 주장이 옳겠지라고 생각했다.

오늘 우리가 입에 올리는 '통일'과 '평화'는 당시에는 위험한 단어였다. 길 가다가 가방을 열었을 때 이상한 글이 쓰인 책이나 종이가 있으면 말린 굴비보다 못한 대우를 받고 끌려가던 시기였다.

그렇기에 통일과 자주라는 '먼' 가치보다는 '노동자'와 '인권'이라는, 내 앞에서 죽어가는 가치를 다시 살리자는 얘기를 하는 동료들도 많았다. 당시는 그런 노선 투쟁이 심해서 학교에서 만나면 원수 보듯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 운동의 중심에 있는 친구의 글을 보면 남북의 노동자를 얘기하고 상생을 얘기한다. 30년 넘게 그 노선의 중심에서 역할을 맡아 활동하는 존경하는 친구의 포스팅을 보니 그렇다.

사실 한반도의 모순은 분단으로 생긴 것이다. 우리의 의지와 의견이 반영된 분단은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한반도의 모순은 참 모순답다. 찌르란 것인가 막으란 것인가. 힘의 균형이 팽팽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의 남북 회담을 영어로 'Inter-Korean Summit'으로 표현했다. 접두사 inter~는 한 개가 아니라 두 개 이상일 때 쓰인다. 미국에서 두 개의 주(state)를 연결하는 고속도로를 'Interstate Highway'라 표현하는 것처럼. 두 개의 한국을 은유하고 고정 짓는 것으로 생각이 되어 조금은 씁쓸하긴 하다.

그래서 '평화'에 방점이 찍힌 것인가? 통일도 좋지만, 더 큰 가치를 포함하는 평화에? 한반도가 처한 세계의 상황이 각자의 이해관계가 묶여있는 주변국들의 정세가 읽힌다.

오후 속보를 보며 예전에 만난 동료들을 생각해 본다. 그들의 지금은 모두 같은 자리에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다. 많은 세월이 흘렀고, 세상이 달라졌고, 사람도 달라졌다. 그러나 많은 이들 특히 이름 없이 활동한 그들 때문에 오늘의 이 걸음을 걸을 수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어떤 역사가 쓰일지 모르지만, 역사책에 기록될 날이다. 임수경씨나 문익환 목사님이 북한에 갔던 30년 전만 해도 '통일'이나 '평화'는 우리에게 속한 단어는 아니었다. 두 사람뿐 아니라 세상이 만류했던 걸음을 걸어간 이름 모를 이들의 발자국이 오늘의 이런 큰 걸음을 걷게 한 것은 아닐까. 내 생애에 보게 되고 전하게 되어 뭉클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강대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오피니언뉴스에도 게재됩니다.



태그:#남북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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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중반을 지나며 고향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내가 나고 자란 서울을 답사하며 얻은 성찰과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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