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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요 베트남"

'미안해요 베트남'이라는 표어가 청년 세대에 어떤 의미로 남을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한 번도 전쟁을 실제로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 전쟁 영화와 소설을 향유하지만 그 비극이라는 것을 오로지 간접 경험으로만 체감할 수 있는 세대가 현재의 10-20대였다. 전쟁이 역사의 커다란 비극이라는 점을 배워서 알고는 있지만 개개인의 마음속에서는 어떠한 울림도 지니지 못하게 된 세대가 청년 세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전쟁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가 사람들 앞에 등장했을 때, 사람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자신과 관련 없는 '덩어리진 피해자'로 불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상처를 내보이며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영화 속에서 엑스트라로만 등장했던 민간인들이 개개인의 얼굴을 보이며 자신의 이야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그 끔찍한 참상들을 듣고 나서야 우리는 비인격화된 피해자들이 사실은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미안해요 베트남'이라는 표어는 우리에게 다른 의미로 전해졌다.

연꽃아래 서포터즈들은 <시민평화법정> 전, <시민평화법정>을 준비하고 있는 오민애 변호사의 강연을 들었다.
▲ 시민평화법정 강연 연꽃아래 서포터즈들은 <시민평화법정> 전, <시민평화법정>을 준비하고 있는 오민애 변호사의 강연을 들었다.
ⓒ 신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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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 한국군은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남 민간인들을 잔혹하게 학살했다. 한 발의 총성이 마을 주변에서 들리면 그 마을의 사람들은 몰살되었다. 약 9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민간인 학살 피해로 생을 마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시간 동안 민간인 학살 문제는 말할 수 없는 께름칙한 과거의 일로 치부되었다. 어떤 부대가 누구의 명령을 받고 사람들을 학살했는지, 피해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피해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 규명된 것이 없었다.

50년 후, 한국에서 처음으로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이 서울에서 열렸다. 비록 시민들이 준비한 법정이라 법적인 구속력이 없지만, 최초로 한국에서 법적인 근거를 통해 민간인 학살 문제에 대한 국가 책임을 묻는 자리였다.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프로젝트 <연꽃아래>와 청년정치공동체 <너머>에서는 21일과 22일에 <시민평화법정>에 참여했다. 우리는 행사에 부스를 차리고 피해 생존자분들에게 전달할 메시지들을 받으며 '미안해요 베트남'이라는 표어를 고민했다.

연꽃아래 서포터즈들은 <시민평화법정> 당일,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들에게 보내는 지지의 말을 받는 캠페인을 진행하였다.
▲ 시민평화법정 캠페인 사진 연꽃아래 서포터즈들은 <시민평화법정> 당일,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들에게 보내는 지지의 말을 받는 캠페인을 진행하였다.
ⓒ 신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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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평화법정 내부의 참전군인과 외부의 참전군인

첫날, 시민평화법정이 열리는 마포구의 문화비축기지에 들어서며 참전군인 몇 명이 군복을 입은 채 주변을 서성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심란한 얼굴로 주변을 배회하다가 몇 분은 시민평화법정에 직접 참가하여 법정이 진행되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곧, 시민평화법정이 시작하고, 인터뷰 증거에서 한 참전군인이 모자이크처리 된 채로 등장했다. 그는 자신이 베트남 퐁니 마을과 퐁넛 마을 학살 이후 그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자, 민간인을 학살하는 선임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본 사람이라고 증언했다.

"집마다 숨어있던 사람들이 올라오는데 내가 간 지역에서는 나이 먹은 영감 한 분이 올라왔습니다."
"영감이 살려달라고 하는데 2소대 이모 중위가 베트남 말로 가라고 '리리'라고 했습니다."
"월남에 오래 있던 고참병이 오더니 '에이 X발 이것도 처리 못 하나' 하더니 되레 갈겨가지고 즉사해버렸습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던 참전군인은 자신이 목격한 학살의 현장에 대해 영상으로 증언하였다.
▲ 참전군인의 증언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던 참전군인은 자신이 목격한 학살의 현장에 대해 영상으로 증언하였다.
ⓒ 노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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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가 처음 보았던 민간인 학살의 현장을 증언했다. 그의 기억 속에 가장 큰 트라우마로 남은 것이 퐁니 마을과 퐁넛 마을의 학살 장면이라고 말했다. 그가 증언한 장면들과 죄책감의 감정들을 지켜보며 행사에 참가한 참전군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다. 분노의 감정을 느꼈을까, 아니면 착잡함을 느꼈을까.

그들은 이후 피고석에 앉은 변호사들에게 다가가 어떠한 말들을 호소했다. 많은 이들의 우려와 다르게 참전군인들은 시민평화법정을 망치려고 하지도, 소동을 벌이지도 않았다. 대신 누군가가 "대부분의 참전 군인들은 학살 사실에 대해 모를 수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라도 참전군인들이 피해 생존자들의 손을 잡아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때, 참전군인들은 손뼉 치며 호응했다.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들의 증언

<시민평화법정>에 참여한 베트남 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가 증언을 하는 모습
▲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 증언 <시민평화법정>에 참여한 베트남 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가 증언을 하는 모습
ⓒ 노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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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평화법정에서는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퐁니 퐁넛 학살 그리고 세계> 저자이자 <한겨레21> 기자였던 고경태 작가와 최초로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의 증언을 취재하여 공개했던 한베평화재단 구수정 상임이사, 그리고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저는 예전에 한국에 와서 증인으로 섰고, 이번엔 두 번째로 이런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제가 어제 얘기한 증언은 모두 사실입니다. 학살 당시 한국 참전 군인들은 퐁니 퐁넛 마을의 74명의 주민을 학살했습니다. 학살로 인해 저와 같은 생존자 분들이 힘든 삶을 살아왔습니다. 학살로 상처를 입었던 사람들은 상처를 안으면서 인생을 살아와야 했습니다.

제 배에는 아직 상처가 남아있고 노동을 할 때 불편함을 느낍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견디며 살아와야 했습니다. 오빠의 경우 상처를 입은 후 노동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매우 가난하고 힘든 인생을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자리에서 한국 정부에서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더 나아가 저와 같은 살아남은 생존자들에게 보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기에 오늘 이 자리에서 참전군인들이 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와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분들이 나에게 다가와서 미안하다는 말을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두 명의 응우옌티탄씨는 각각 하미마을과 퐁니 마을에서 한국까지 왔다. 가족도, 친구들도 한국행을 말렸으나, 꼭 증언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다고 그들은 말했다. 법정이라는 자리가 이들에게 잔인한 형식이지 않을까 잠시 생각했지만, 이들이 진실을 알리기 위해 어렵게 낸 용기를 폄하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려운 용기를 내서 자리한 자리에서 피해 생존자들은 울고, 마음 아파했지만 끝까지 증언을 마무리했다. 그들을 보며 많은 이들이 함께 울었다.

'베트콩'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민간인이 아니었을까?

<시민평화법정>이 끝나고,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들과 연꽃아래 서포터즈들이 사진을 찍었다.
 <시민평화법정>이 끝나고,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들과 연꽃아래 서포터즈들이 사진을 찍었다.
ⓒ 신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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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정 상임이사는 베트남 학살 마을을 다니면서 "만약에 학살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면, 차라리 미군에게 당하는 게 낫지 어쩌다가 한국군에게 당했는지 모르겠다"라는 원망을 많이 들었다고 했다.

미군에 의한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인 밀라이 학살은 학살 직후 상당 부분 진상 규명이 진행되었고, 미국 시민들에 의해 개개인의 보상을 받았다. 현 단위로 병원과 학교가 세워졌고 평화공원도 설립됐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러한 노력이 이어지지 못했다. 희생자들은 베트남 정부로부터 국가 유공자로 대접받지도 못했고, 가해국에서도 보상을 받지 못했다.

시민평화법정은 우리에게 어떠한 교훈을 남겼을까. 희생자가 양민이라고 확신하는 이유에 대해 피고 측에서 묻자, 고경태 작가는 '양민'의 기준이 무엇인지 되물었다. 남베트남 해방전선이나 북베트남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양민일까. 남베트남 해방전선 소속의 사람이지만 학살 당시 무장을 하고 있지 않았으면 양민이 아닌 것일까. 폭압적인 정치 환경에서 신음하던 사람들이 남베트남 해방전선을 결성하여 싸우는 길을 선택했을 때, 이들은 양민의 자격에서 배제되고 말았다.

시민평화법정에 참여하면서 우리는 과연 이 전쟁 자체가 정의로웠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우리가 어떠한 정치적 성향도 가지지 않은 '아무것도 몰랐던' 민간인의 죽음에 슬퍼하지만 무장하고 있지 않았던 남베트남 해방전선, 즉 무장하고 있지 않았던 베트콩의 죽음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이 전쟁이 애초부터 정의롭지 않았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미안해요 베트남'이 청년 세대에게 전하는 말

23일 아침, 제주도로 떠나는 두 명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들에게 꽃을 전했다.
 23일 아침, 제주도로 떠나는 두 명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들에게 꽃을 전했다.
ⓒ 노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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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제주도로 향하는 피해 생존자분들을 마지막으로 만나러 청와대 사랑채 앞으로 향했다.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 많은 이들이 마지막으로 피해 생존자분들을 만나러 기자회견에 참여했다. 피해 생존자들은 진상규명이 꼭 필요하다고 마지막까지 당부했다.

피해 생존자 분들에게 꽃을 전하고 지지의 말을 참여자들이 전하며 기자회견은 마무리되었다. '미안해요 베트남'이라는 구절이 지금의 청년 세대에게는 다른 방식으로 기억돼야 한다. 그것은 진실을 규명하고 사건을 해명해야 할 과제를 떠안은 사람으로서의 미안함이 될 것이다. 인류의 과제를 고민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로 남았다. 시민평화법정이 하나의 행사만으로 남지 않으려면, 연대를 이어가려는 공동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태그:#연꽃아래, #시민평화법정, #너머, #베트남 전쟁, #응우옌티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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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여성 정치에 관한 책 <판을 까는 여자들>과 <집이 아니라 방에 삽니다>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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