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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저씨'를 둘러싼 입씨름을 생각하다

오직 하나만 들이팬다?
18.04.25 18:53l

검토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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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저씨', 오직 하나만 들이팬다??
옛적에 '주유소 습격사건'이라는 영화에 <한 놈만 줄기차게 쫓아서 들이팬> 등장인물이 있었다. 싸움판에서 말이다. 요즘 대중문화 비평의 글들을 볼작시면 그런 방식으로 문화를 조명하는 사람들이 꽤 된다. 그거, 어떤가? 참 효율적이고 손쉬운 방식이다! 딴 사람과는 대결을 회피하고 한 놈과만 대결하니 승률도 높아질 것이다. 그 놈만 때려눕히는 거라면 해볼만한 싸움이 아니겠는가.

먼저 가벼운 예화例話를 하나 들추겠다. 작년 가을에 양희은의 노래 '가을 아침'이 리메이크돼 나왔는데 난데없이 그 노래를 비판하는 글이 인터넷언론 어디에 나왔다. 가부장자家父長制에 찌든 얘기를 늘어놨다는 거다. 그 점만 따지자면, 그 놈만 패는 거라면 그 글이 맞기는 하다. 그런데 그렇다고 그 노래가 사랑받아서는 안 될 아주 문제 많은 노래일까?
다들 아시다시피 요즘 세상엔 초등생 수준에 딱 맞는 (애교가 철철 넘치는) 트와이스 노래나 발랄한 10대한테나 어울릴 워너원의 노래("나야, 나")가 판을 친다. 칼군무의 눈요기거리 듬뿍 안겨 주는 (게다가 잘 생긴) 걸그룹 보이그룹 말고 솔로 가수들은 변두리에서 가끔씩 히트곡 하나둘로 연명하는 꼴 아닌가.

이런 대중음악판에 중년층의 정서를 달래주는 곡이 잠깐 사랑받는 이변異變이 나왔다. 이것이 소중한 거라면 이런 미덕을 먼저 헤아려준 뒤, '노랫말 내용에 가부장주의 냄새가 좀 나기는 한다'는 얘기를 살짝 덧붙이는 것이 균형 있는 비평 아닌가? 그 노래는 미덕이 더 있다. 다들 도시에 파묻혀 사느라 자연(계절 변화)을 느끼는 감수성이 점점 메말라 가고 있는 시절에, 그런 감수성을 일깨워주는 것은 '감수성 교육'도 된다. 그 필자는 '가부장주의'에는 승리를 거뒀을지 모르지만 그 비평 전체는 실패한 비평이 됐다. 그 글에 절절이 공감하는 사람이 과연 있었겠는가.

'나의 아저씨' 관련해서 "역겨운 로맨스 어쩌구..."하고 떠드는 소리가 높았던 것도 생각해 보자. 드라마가 방영되기도 전에 "역겨운 아저씨들이 '어린 여자애'를 갖고 놀다니, 아이 더러워!"하고 원성이 드높았다. 다들 제목만 슬쩍 보고서도 드라마 내용을 귀신(?)처럼 알아맞춘 용한(?) 점쟁이들이다. 나이 많고 권력 좀 있는 남자들이 잘난체 하는 데에 여자들이 '들러리'나 서는 얘기가 대중문화에 판치지 않을까, 노파심을 품는 것은 수긍이 간다. 그런데 그 싸움꾼, 방아꾼들은 그 문제의식만 들이팔 뿐, 딴 내용에는 아무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다. 그래서 옳게 드라마를 읽어낼 수 있을까?

이를테면 이지안은 "<처절하게 살아온 밑바닥>의 <젊은 여자>"다. 그런데 방아꾼들은 '밑바닥 인생' 부분은 건성으로 훑고 '여자'라는 처지만 편애한다. "저 여자애가 늙은 남자어른한테 뒤통수를 맞았어? 남자분들, 왜 여자애를 패고 그래요? 정말 폭력적이군요." 그 사건은 이지안이 도발한 측면이 더 크다. 밑바닥 거친 삶을 살았기에 그런 도발이 가능했다. 페미 비평가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폭력을 안 넣고 이야기를 꾸려갈 수 없었냐고 점잖게 훈수 둔 비평가도 있다. 얼핏 보면 똑똑한 충고 같지만, 하릴없다. 그런 사건 없이 어떻게 이야기를 꾸려가겠는가. 그에게는 '한번 극작가가 돼 보라'고 권할 수밖에 없다. 그래 봐야, 제 얘기가 얼마나 한가로운 넋두리인지 깨닫는다.

페미니즘의 목소리를 내는 (일부) 비평가들 얘기를 듣다 보면 이들이 과연 문학예술을 알기는 아는 건지, 미심쩍어질 때가 많다. 페미니즘의 주장은 분명히 진보적인 것인데, 이들이 예술을 대하는 태도는 아주 보수적이다. "우리 비위 거슬리는 거, 그건 다 빼요!" 박정희 시절에 정부당국은 즈그덜 비위 거슬리는 것은 죄다 '검열'해 버렸다. 이를테면 "영화 '고래 사냥'? 괜히 기분 나쁘네! 그거, 가위질해!" 박정희가 예술을 대한 태도와 요즘 일부 페미니즘의 태도, 뭐가 다를까?

검열의 눈을 부라리는 그들의 생각이 모조리 틀린 것은 아니다. 대중문화가 썩었다고 여긴다면 차라리 TV 드라마/노래 프로 자체를 없애자고 주장하라! 그렇게 혁명(?)하겠다면 그것은 일관성이 있고 진정성이 있다. 그런 방침을 밀고 갈 수 있다면 박수를 보낼 만도 하다. 그게 아니고 '일부 내용'만 검열하겠다면 그것은 드라마를 망치고 노래를 망치는 결과밖에 안 빚어낸다. 어떤 폭력적인 얘기나 여성을 들러리 세우는 얘기가 나온다는 사실만 갖고서 화를 낸다면, 다시 말해 '이러저런 소재'가 나왔다는 것만으로 문제 삼는다면 문화예술을 옥죄는 또다른 억압이 된다. "'제목에서 '아저씨'라는 낱말도 빼세요!"라니!

앞서 지안이는 두 면이 다 있다고 했다. 밑바닥의 처절한 삶을 살아온 사람, 그리고 여자! 그런데 페미 비평가들은 전자前者에 대해서는 시큰둥했다. "가난, 사회적 탈락"을 드라마 주제로 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는 사람이라면 '아저씨'들이 실없는 넋두리를 잔뜩 늘어놓는 것도 좀 이쁘게 봐줄 수 있었다. 드라마에서 박동훈의 형은 '아저씨들의 허위의식'을 많이 품고 있지만 박동훈의 동생이 그에 대해 자주 핀잔을 줬다. 작가가 아저씨들의 허튼 구석도 비판적으로 짚었다는 얘기다. 그런 '소재'가 나왔다는 사실만 갖고서 화를 낼 일이 아니다.

어떤 비평가는 아저씨들을 빛내게 할 목적으로 제일 만만한 밑바닥 여성을 일부러 등장시킨 것 아니냐 하고 날카로운(?) 말펀치를 날렸는데, 그것은 작가를 일종의 (불순한) 정신적 도착증자倒錯症者로 닦아세우는 '언어 폭력'이었다. 다음과 같이 말해야 온당한 것 아닌가? "한쪽에는 몰락해가는 중년 남자들이 있다. 한쪽에는 밑바닥 처녀가 있다. 두 쪽이 서로의 처지를 알아가고 소통, 연대하는 얘기를 들려주겠다."

제발 '균형'을 찾자. 달콤한 사랑 얘기에 더 솔깃해 하는 대다수 TV 시청자들한테 살인 전과前科까지 있는 밑바닥 청년의 삶을 공감하고 소통하라고 들이밀기는 정말 어려운 과제라는 것, 이해하시는가? '스릴러' 형식으로 흥미를 돋우고, '도청기'라는 이야기 장치의 도움을 받고서야 가까스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었다.

"19세기 유럽 사회를 말해주는 교과서"라고 칭찬 듣는 발자크의 작품만큼 위대한 드라마가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세상이 어둡다. 몰락한 중년 남자들, 척박한 처지의 청년들, 두쪽 다 힘내라"하는 메시지를 담아내려고 한 것만은 기특한 일이다. 올해 만들어진(만들어질) 드라마 가운데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가치 있는 작품이라는 게 내 주관적인 판단이다. 이 정도로 주제의식이 무게가 있는 드라마가 과연 몇 개나 되는지, 한번 꼽아보시지 않겠는가? '마더'? 또 무엇?

여전히 '나의 아저씨'가 마음에 안 드는 분들께서는 그럼 스스로 이 드라마의 주제의식에 따라 스스로 이야기를 하나 창작해 보시기 바란다. 일부 페미 비평가들도 작전을 달리 짜야 한다. 마음에 안 드는 작품, 비판을 마구 퍼부어서 '문화 판도'를 바꾸기는 정말 더딘 일이다. 그거 치고 받다가 골만 깊어진다. 차라리 '페미니즘 정신을 잘 반영한 훌륭한 작품' 하나를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 더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러저런 것들, 다 더러운 물컵!"이라고 외치는 데에 진을 빼지 말고, "더 깨끗한 물컵" 하나를 보여주라는 것이다. 그것이 페미니즘의 위상을 정말로 높이는 길이다.

첫 머리로 돌아가자. 한 놈만 들이패는 싸움꾼은 한가로운 사람이다. 저는 그 놈만 패고 튀면 되니까 말이다. <싸움판 전체>를 책임질 줄 아는 싸움꾼만이 나이 어린 주먹패들한테 존경을 받는다. 옛날의 홍길동이처럼. 걔는 지배세력 전체를 희롱할 줄 알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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