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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월 17일. 영화가 끝났다. 스크린에서 현실로 돌아오기 싫었다. 밤새도록 영화 속에 있고 싶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보면서 엉뚱하게 내가 원하는 곳에서 살기로 마음먹었다.
"하울, 캘시퍼! 꼭 돌아올게. 미래에서 만나자."
을지로까지 터벅터벅 걸었다. 8번 출구로 들어서자 노숙자들이 슬리핑백을 펴고 있었다.

2006년 5월 30일.
서울을 떠났다. 어쩌면 다시 돌아올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 권산 <여행, 집으로 가다> 중

권산. 그는 서울에서 몇 년을 밥벌이하면서 가족을 건사하다 2006년 아내와 함께 구례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사는 곳을 여행하며" 풍경과 사람을 기록했다. 지리산 닷컴이라는 사이트(http://www.jirisan.com/)를 운영하며 "행복하십니까"라는 물음표 없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지 11년이 되었다.

2006년 봄
 2006년 봄
ⓒ 박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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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세월 동안 그가 찍은 사진은 5만 여장. 셔터를 누른 수는 그 네 배는 될 것이다. 그 기록이 오롯이 담긴 포토에세이가 두 권으로 묶여 나왔다. 그는 이 책이 구례에 바치는 연애편지라고 말한다. 그 마을에서의 십 년이 지나치게 아름다웠다고도 말한다. 그 세월은, 구례는, 그곳의 사람들은 그에게 무엇이었을까?

구례의 작업실에서 권산을 만났다. 이 작업실에서 권산은 글을 쓰거나 디자인을 하고 아내 월인정원은 우리밀 빵을 만들거나 클래스를 진행한다. 작업실의 외부는 전형적인 시골집이었으나 내부는 단정하고 깔끔하다. 군더더기 없이 있어야 할 것들이, 있어야 할 곳에 있다. 이들의 공간은 이 부부의 삶과도, 권산의 글과도 닮아있다.

- 지겹게 들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으로 내려오게 된 계기를 먼저 물어야 할 것 같다.
"왜 시골로 내려왔냐는 질문은 11년째 듣고 있는 질문이에요. 사실 뚜렷한 이유는 없어요. 자연이 어떻고, 생태환경이 어떻고 실제 그런 이유는 전혀 아니었어요. 솔직하고 시니컬하게 말하자면, 실패해서 내려왔다고 할 수밖에 없어요. 도시에서 생존한다는 것은 해가 갈수록 더 많은 비용을 지출하게 된다는 의미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경쟁력이 떨어집니다. 시골은 도시에 비해서 생존비용이 더 싸죠. 나머지 것들은 다 부차적인 거라고 생각해요."

- 실패했다고 표현하지만 실패했다고 해서 삶이 끝나는 건 아니다. 내려와서의 삶은 어땠는지?
"귀농이나 귀촌이라는 표현을 좋아하진 않아요. 저의 경우 가장 정확한 표현은 이사 왔다는 거예요. 여전히 나는 디자인을 통해 밥벌이를 해요. 시골이니까 감 박스나 매실 박스를 디자인하기도 하지만 일은 도시에서 더 많이 들어옵니다. 생존방식에서 큰 변화를 느끼지는 않아요. 물론 일상에서 스트레스 지수가 더 낮아진 건 분명해요. 답답할 때면 섬진강을 가든, 들판을 보든, 신록을 보든 시각적으로 해결되는 부분들이 있어요. 그럴 때 풍경 안에서 치유 받는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걸 느끼죠."

- 내려와서 이곳의 풍경과 사람들을 기록했다. 그 이유는 뭐였나?
"제가 사는 곳을 찍고, 그 시기에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쓴다는 건 제가 늘 하던 것이었어요. 특별하게 의식적인 행동은 아니었고, 어떤 목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에요. 단지 시골로 옮겨와서 제가 기록하는 곳의 무대가 바뀐 것일 뿐이에요. 다만 이곳은 도시와 다르게 쓸 이야기들과 찍어야 할 이미지들이 너무 많죠."

- 그렇다 하더라도 특히 애착을 가지고 있는 주제가 있을 것 같은데?
"자발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것들이 있어요. 곧 사라질 것 같은 상황, 사람, 풍경, 이런 것들이요. 나무가 베이기도 하고, 학교가 없어질 뻔한 상황이 생기기도 하죠.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들이 마지막이라고,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없어져 버린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달라져요. 그런 것들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 같아요."

- 그 이유는?
"이유를 딱히 설명은 못하겠어요. 예를 들어 벼농사를 짓던 곳에 철쭉을 심게 되면 앞으로 향후 5년 동안 그곳에 벼가 일렁이는 모습을 보지 못해요. 그럼 그 순간을 남기고 싶어요. 그런 것들에 애틋한 마음이 들어요. 어떤 의무감 같은 것으로 하는 것은 아니에요."

- 이번에 나온 포토에세이에 대해 잠깐 소개한다면?
"돌아보면 시골 생활이 십 년을 넘었어요. 그동안 제법 많은 사진을 찍었고, 제밥 많은 글들을 썼어요. 제가 바라본 모습들, 제가 사는 곳에 대한 기록물에 대해 마침표 같은 것을 찍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지난 십 년간 제가 좋아했던, 감동했던, 슬펐던, 애틋했던, 위에도 잠깐 말했지만 사라져가는 어떤  장면들의 마지막 같은 것들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어요. 이 책이 그런 정리가 된 것 같습니다."

- 책을 출간 하면서 어렵거나 힘들었던 부분들이 있었는지?
"사람. 사람에 관해 쓰는 것이 그랬습니다. 이를테면 30명 이상 노인들의 단체 사진을 찍은 것이 있어요. 9년 전에 찍은 것이죠. 헤아려보니 사진 속에 있던 열두세 사람이 이제 계시지 않아요. 이곳은 초고령화 된 곳이기 때문에 노인들이나 옆에 있는 사람들의 죽음이 아주 익숙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가장 낯설기도 해요. 그런 장면을 마주하는 것이 힘들어요. 내가 현재 살고 있는 마을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것도 부담스러웠어요. 그들이 느낄 불편함을 생각해야 하고, 자기 검열을 해야만 하죠. 2권의 '그녀에게'라는 파트가 특히 그랬어요. 여기 같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야만 하는 것이니까."

노제
 노제
ⓒ 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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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입구에서 노제를 지냈다. 상여는 평전 언덕으로 향했다.
평생을 살았던 마을을 굽어보며 누우실 것이다.
신록이 녹음으로 변해갈 무렵의 상주들은 살짝 더워 보였고,
남은 사람들은 어제하던 일을 계속할 것이다.
그이도 이틀 전까지 하시던 그 일.
사는 일.

- 권산 <꽃은 눈을 헤치고 달려온다> 중에서

- 그럼에도 불구하고 쓴 이유는?     
"이곳에는 혼자 사는 할머니들이 할아버지 보다 훨씬 많아요. 개인적으로 그런 여성 노인을 볼 때 울컥하는 것이 있어요. 구판장에 어떤 아주머니가 마을 술꾼들에게 소주를 팔면서 고추장에 밥을 비벼서 시레기국에 먹고 있어요. 그 모습을 보면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져요. 저 노인의 삶은 뭐지? 원했던 것인가? 구례에 살고 싶었을까? 열세 살 때는 어떤 꿈이 있었을까? 그런 것들을 연상하게 되요."

- 책에 보면 대평댁과 지정댁에 관한 이야기가 유독 많이 나온다. 위의 이유와 같은 맥락인가?
"지난 십일 년 동안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지리산 닷컴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두 어머니가 대평댁과 지정댁이에요. 제가 영화감독이라고 치면 그녀들은 저의 페르소나에요. 대평댁은 오래전에 영감님이 별세하셨고, 글을 모르시고, 억척스럽게 사셨어요. 올해 팔십 여섯이 되시는데 계속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세요. 저는 일상에서의 밥벌이 같은 것에 전투력이 약해요. 다른 멋진 말을 들어도 설득이 안 되는데 대평댁이나 지정댁이 돈 벌어라, 저축해라라는 이야기를 하면 반성을 하게 되요.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아마 그 사람들이 나쁜짓 하지 않고, 몸으로 살아온 삶을 알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장에 고추가 많이 나왔습니다. 오늘 사는 게 쌀까요? 추석 무렵이 쌀까요?
마당에서 고추와 참깨를 뒤적이던 지정댁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지금 나오는 고추는 손주들 등록금이여. 인자 가을 등록금 낼 참잉께."
이 집 저 집 할 것 없이 그리도 정성스럽게 고추를 말렸던 게 꼭 제 식구들 입으로 들어가야 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모종 만들어 심고 따서 말리는 동안 주름진 손은 고추를 쓰다듬었던 모양이다. 마치 친손주 어루만지듯 말이다. 도시로 나간 새끼들의 힘듦을 나누겠다고. 고추 참 붉다.
- 권산, <꽃은 눈을 헤치고 달려온다> 중에서
지정댁 고추
 지정댁 고추
ⓒ 박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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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평댁은 지정댁을 지정댁은 운암댁을 운암댁은 대구댁을 대구댁은 금강댁을 금강댁은 갑동댁을 갑동댁은 남원댁을 남원댁은 근동댁을 경쟁상대로 삼지 않았다. 그녀들의 경쟁상대는 잡초와 살림이었다. 그녀들이 뱉어낸 한숨이 매화였고 산수유였고 벚꽃이였고 철쭉이였고 양귀비였다.(중략) 그녀에게 구례는, 벗어나고픈 마을이었을 것이고 여전히 벗어날 수 없는 마을일 것이고 결국 구례에서 위로받을 것이다.
- 권산,<여행, 집으로 돌아가다> 중에서

- 마지막으로 이 책의 독자들에게 한 마디.
"제가 다른 사람의 영화를 들었거나 음악을 들었을 때 느끼는 것과 같다고 봐요. 이 책은 제가 느낀 이야기고, 생각이죠. 제가 누구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 이야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든 그건 제 손을 떠난 문제에요. 단지 저는 이렇게 살고 있는데, 당신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요. 제가 다른 사람들의 창작물 앞에서 느끼듯이. 그 정도의 소용이면 족합니다. 다른 건 없어요."

우리는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어 한다. 많은 소설이나, 영화나 혹은 드라마가 쏟아져 나오고, 시대가 바뀌어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SNS에 올린다. 수없이 쏟아지는 이야기와 이미지를 통해 어떤 특별한 사랑에 설레기도 하고, 과하게 풍족한 식사나, 여행지의 화려한 모습에 부러워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지루한 일상이고, 살림이고, 어떠한 형태의 밥벌이라는 것을. 권산이 보낸 구례에서의 지난 세월과, 지리산 자락에서 보내오는 사진과 이야기가 그렇다.
지난하고, 아름답다. 사는게 다 그렇다.

그는 여전히 우리에게 묻는다. "행복하십니까"라고. 물음표는 없다.

대평댁
 대평댁
ⓒ 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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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집으로 가다 - 풍경, 그리고 그녀들 - 삶과 여행의 경계에서

권산 지음, 우드스톡(2018)


꽃은 눈을 헤치고 달려온다 - 계절이 머무는 순간들

권산 지음, 우드스톡(2018)


태그:#권산, #에세이, #꽃은눈을헤치고달려온다, #구례, #여행집으로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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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중심으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전합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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