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널의 아르센 벵거 감독

아스널의 아르센 벵거 감독 ⓒ EPA/연합뉴스


'명장' 아르센 벵거 감독이 22년만에 아스널 FC 지휘봉을 내려놓는다.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의 아스널은 구단 홈페이지를 통하여 벵거 감독이 올 시즌을 끝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난다고 공식 발표했다.

프랑스 출신의 벵거 감독은 1996년 9월부터 아스널을 지휘봉을 잡아왔다. 선수 시절은 그리 화려하지 않았고 감독으로서도 프랑스 AS 모나코, 일본 나고야 그램퍼스 등을 역임했지만 빅리그에서는 거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무명에 가까웠다. 당시만 해도 콧대 높은 '축구종가'의 자존심이 강하여 외국인 감독에게 배타적이었던 영국 언론에서 노골적으로 '아르센이 누구야?(Arsene Who?)'하고 무시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후 벵거 감독은 특유의 유망주 육성과 발굴, 현대적인 선수단 관리와 훈련 방식을 도입하여 아스널의 본격적인 황금시대를 연 명장으로 인정받았다. 아스널은 벵거 감독과 함께한 22년간 프리미어리그 3회, FA컵 7회, 커뮤니티쉴드 7회 우승 등 총 17개의 트로피를 들며 EPL의 명문구단으로 발돋움했다. 132년 역사를 자랑하는 아스널에서 벵거보다 더 많은 트로피를 선물해준 감독은 없다.

역사에 남을 '무패 우승' 달성한 아르센 벵거 감독

최전성기였던 2003~2004시즌에는 리그 역사에 길이 남을 무패 우승(26승 12무)이라는 위대한 신화를 달성하기도 했다. 벵거 감독은 FA컵에서도 역대 최다우승 감독으로 이름을 올렸다. 티에리 앙리, 패트릭 비에이라, 로버트 피레스, 세스크 파브레가스, 로빈 판 페르시 등 수많은 스타 선수들이 벵거 감독의 지도 속에서 월드클래스급 선수로 성장했다.

한국축구와도 약간의 인연이 있다. 박지성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하며 국민적인 관심을 받던 시절 리그 내 대표적인 라이벌팀의 감독으로 국내 팬들에게도 많은 인지도를 쌓았다. 박지성은 아스널전마다 유독 강한 모습을 보였고 벵거 감독이 상대 선수임에도 박지성을 여러 차례 극찬하기도 했다.

2011년에는 박주영(현 FC 서울)이 한국인 선수로는 최초로 아스널에 입단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좋은 인연은 아니었다. 박주영은 아스널에서 철저히 주전경쟁에 밀려 벤치만을 지키다가 방출당했고 이로 인하여 일부 국내 팬들 사이에서 벵거 감독과 아스널 구단의 이미지가 한동안 나빠지기도 했다. 박주영의 영입은 지금도 아스널의 프리미어리그에서 잘못된 영입의 대명사로 종종 거론될 만큼 '흑역사'다.

벵거 감독은 200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정점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보였다. 아스널은 전설의 무패우승을 달성했던 2003-2004시즌을 끝으로 더 이상 리그 우승 트로피를 추가하지 못했다. 최고의 감독을 가늠하는 지표로 꼽히는 유럽 챔피언스리그는 2005-06시즌 준우승 1회가 최고 성적이고 끝내 우승과 인연이 없었다. 2004년부터 2013년까지는 무려 9년이나 단 한 개의 우승트로피도 추가하지 못하며 무관의 세월에 시달리기도 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축구계에 대형 자본의 유입이 가속화되며 첼시, 맨체스터 시티 등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운 '부자 구단'들의 등장은 EPL과 유럽축구계의 판도를 바꾸어놨다. 여기에 아스널은 2006년 신축구장 에미레이트 스타디움 건립으로 인한 재정적 부담으로 선수영입에 제약을 받게 되면서 경쟁구단들과의 영입 경쟁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스널이 장기간 EPL 4강권 이내의 전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벵거 감독의 뛰어난 지도력 때문이라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벵거 감독 스스로도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한계는 있었다. 경제학 석사 출신으로 합리적인 투자와 장기적인 육성을 강조하고,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아름다운 축구'를 선호하던 벵거 감독의 보수적인 방식은, 급변하는 현대축구의 흐름과는 맞지 않았다. 우승에 목마른 스타 선수들이 아스널을 떠나 경쟁팀으로 이적하는 사태가 잇달아 발생하며 아스널은 부자구단을 위한 셀링클럽 취급을 받는 수모도 당했다. 기다림에 지친 아스널 팬들이 벵거 감독의 시대에 뒤처진 전술과 선수단 운용에 불만을 품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점점 커졌다.

22년간 한 팀 감독... 퍼거슨과 함께 '장수감독'으로 이름 알려

 영국 프리미어리그 아스널에서 뛰는 선수 알렉시스 산체스

영국 프리미어리그 아스널에서 뛰는 선수 알렉시스 산체스 ⓒ EPA/연합뉴스


벵거 감독은 논란 속에서도 지난해 아스널과 다시 2년 재계약을 맺으며 변함없는 구단의 신임을 받는 듯했다. 올시즌 중반까지만 해도 벵거 감독은 구단과 계약기간을 준수하겠다는 의지를 여러 차례 피력하며 팀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아스널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내년 챔스 티켓이 주어지는 리그 4위권 진입이 사실상 어려워진 데 이어 유로파리그를 제외한 모든 대회에서 이미 탈락하며 무관의 위기에 놓였다. 벵거 감독의 마지막 보루로 여겨지던 빅4 진입에 잇달아 실패한 것은 '감독 교체론'을 요구하는 팬들의 목소리에 갈수록 힘을 실었고 악화된 여론에 아스널 구단과 벵거 감독도 끝내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벵거 감독과 시대를 풍미한 라이벌이자 또 다른 장수 감독의 대명사로 꼽히는 알렉스 퍼거슨 전 맨유 감독과 비교되는 마무리다. 퍼거슨 감독은 1986년부터 2013년까지 무려 27년이나 맨유에서 장기집권했으며 통산 우승 횟수와 승률 등에서 모두 벵거 감독을 크게 앞선다. 퍼거슨 감독은 은퇴 직전 마지막 시즌에도 맨유를 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명예롭게 지도자 생활을 마무리했다. 반면 벵거 감독은 집권 초반 10년간 화려한 전성기를 보낸 이후 장기간 침체기에 허덕이다가 팬들의 엇갈린 반응 속에 지휘봉을 내려놓게 돼 다소 아쉬운 모양새가 됐다.

그래도 벵거 감독이 장기간 아스널과 프리미어리그의 발전에 미친 공로와 영향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감독들의 운명이 '파리목숨' 취급받는 축구계에서 아스널 같은 명문구단의 지휘봉을 22년이나 잡았던 벵거 감독은 현대축구에서 어쩌면 다시 보기 힘든 마지막 장수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벵거 없는 아스널'이 과연 지금보다 더 나아질까, 아니면 더 나빠질까 하는 궁금증은 축구팬들 사이에서 오랜 화두다. 맨유도 퍼거슨 감독이 은퇴한 이후 수년간 후유증에 시달렸고 아직도 퍼거슨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지는 못했다. 아스널은 5년 전의 맨유 못지않게 또 다른 세대교체와 리빌딩의 과도기에 놓여있다.

22년의 헌신을 마무리하는 벵거 감독이 이제 아스널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은 유로파리그 우승이다. EPL에서의 명성에 비하여 유독 유럽클럽대항전과는 인연이 없었던 벵거 감독에게 유로파리그는 아스널에서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는 피날레 무대이자,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티켓 획득을 위한 마지막 기회이기도 하다.

 지난해 12월 2일 영국 런던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에서 진행된 아스널 FC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아스널 소속 알렉상드르 라카제트(왼쪽)가 골을 자축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2일 영국 런던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에서 진행된 아스널 FC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아스널 소속 알렉상드르 라카제트(왼쪽)가 골을 자축하고 있다. ⓒ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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