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키스트 아워>의 한 장면

영화 <다키스트 아워>의 한 장면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영화 <다키스트 아워>를 꼭 보고 싶었다. 윈스턴 처칠의 생애를 다루는 영화이고, 또 어려운 결정의 순간을 다루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나의 관심사, 내가 공부하고 있는 내용과 딱 맞아 떨어진다고나 할까.

'윈스턴 처칠'이라는 이름을 접한 것은 아마 한 33년 전인 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어머니께서 44권짜리 위인전기 전집을 사주셨다. 그 중 가장 먼저 읽었던 책이 윈스턴 처칠이었다. 너무 재미있어서 정말 정신없이 읽어 내려갔다.

그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전기는 미국의 저널리스트였던 퀜틴 레이놀즈가 1963년에 쓴 책이었다. 지금도 미국에서 중고생용으로 꽤 호평을 받고 있다. 그리 두껍지 않은 이 책은 주로 2차대전 발발 이전까지의 젊은 시절 윈스턴 처칠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책을 덮으면서 왜 얘기가 여기서 끝나는 걸까 하고 궁금해 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후로도 퀜틴 레이놀즈의 처칠 전기를 여러 번 다시 읽었다.

처칠이 샌드허스트(영국 왕립군사대학, 우리로 치면 육군사관학교 쯤 될까) 시험에 두 차례나 낙방하고 나중에 지리시험에서 운 좋게 자신이 찍었던 지도가 시험에 나와서 합격하게 된 일, 성적이 안 좋아서 당시 인기 있었던 보병 보직으로 못 가고 오히려 돈이 많이 들어가는 (왜냐하면 말을 사야 하기 하니까) 기병 특기로 가게 된 일, 수단 전투 중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일, 남아프리카 보어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극적으로 탈출한 일 등 레이놀즈의 처칠 전기에는 어린 소년의 관심을 자극할 만한 흥미진진한 에피소드가 많았다.

'존경하는 외교관'을 묻는 질문에 '처칠'이라 답했다

세월이 흘러 15년 뒤. 외무고시 2차시험을 통과하고 나서, 나는 면접위원들 앞에 앉게 되었다. 긴장된 순간이었다. 2차 시험이 끝나고 나면 그 성적이나 석차를 응시자들에게 가르쳐 주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내 성적이 합격권 안인지 밖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내 앞에는, 그때는 누군지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외교부 모 간부 분이 앉아 계셨고, 다른 한 분의 면접위원은 그 간부 분이 소개해 주시길, 모 사립대학교 교수님이라고 하셨다. 두 분 다 나로서는 생면부지인 분들이었다.

두 분이 책상 위의 서류를 들여다 보고 내 얼굴을 보고 자기들끼리 쳐다 보고 하다가, "먼저 하시죠"를 몇 번 주고 받은 끝에 그 간부 분 왈,  "그래 자네는 외교부에 들어오게 된다면 어떤 자세로 근무할 건가?"

좀 맥이 빠지는 질문이어서 그랬는지, 한껏 긴장해서 그랬는지 뭔가 열심히 모범답안을 말씀드렸던 것 같긴 한데, 구체적으로 뭐라고 답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안 난다.

그리고 심사위원간 바통 터치!  "교수님도 질문 하나 하시죠."  "아 그러죠. 어~ 제일 존경하는 외교관이 누구입니까?"

'그래 이거지.' 나는 속으로 뇌까렸다. 그리고는 마치 예상 질문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대뜸 "윈스턴 처칠입니다"라고 대답을 해버렸다. 그런데, 면접위원들 반응이 미적지근하다.  "아 그래요." 끄덕끄덕. 그래서 내가 오히려 답을 더 해버렸다. 피면접자가 당돌하게도 심사위원들이 더 묻지도 않았는데.

"제가 왜 처칠이라고 답했는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처칠은 외교관보다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탁월한 외교관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처칠은 단지 당시에 주어진 국제관계나 힘의 형세만을 본 것이 아니라, 상대국의 내부 정치를 보고 다가올 미래를 내다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들 히틀러와 타협하자고 할 때, 처칠은 히틀러와 나치스의 본질을 읽고 다른 이들과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상대국의 국내정치를 읽어내고 거기서 국제관계의 미래를 내다 보는 것. 이것이 외교관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

나름대로 열변을 토했다고 생각했지만, 면접위원들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그래요 거기까지 합시다." 그렇게 면접은 끝났다.

독재자와의 타협은 결국 실패함을 알려주는 대표적 사례

 영화 <다키스트 아워>의 한 장면

영화 <다키스트 아워>의 한 장면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그로부터 다시 18년이 지나 내가 가르치는 외교정책분석 과목의 수업 시간. 나는 1938년 뮌헨 회동을 사례로 삼아 외교정책 결정 과정과 2차대전의 발발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1938년 당시 영국 수상 네빌 쳄벌레인, 프랑스 수상 에두아르 달라디에, 이탈리아 지도자 무솔리니, 그리고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가 뮌헨에서 회동했다. 쳄벌레인은 유럽 강대국들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함으로써 전쟁의 발발을 막고자 했다. 당시 히틀러는 체코슬로비키아 내의 독일어 사용 주민들이 주로 거주하던 주데텐란트의 할양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 회동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더 이상의 요구가 없을 것을 조건으로 해서 주데텐란트를 히틀러에게 주기로 결정한다. 체코슬로비키아의 일부 영토를 할양하는 결정이었지만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은 뮌헨에 초대받지 못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게는 잔인한 결과였지만, 쳄벌레인 수상은 영국에 돌아오자마자 히틀러와 자신이 서명한 문서를 흔들어 보이며 평화를 지켜냈다고 외쳤다.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다양하다. 일본 대학이다 보니 일본 학생들이 많지만, 학생들 중에는 교환학생 프로그램이나 유학으로 와 있는 독일인, 프랑스인, 모로코인, 튀지니, 핀란드, 미국인 등 여러 국적의 학생들이 있다.

이 수업에서 내가 학생들에게 항상 강조하는 것은 외교정책에 대해 생각할 때, 지금의 시점에서 과거 정책의 결과만을 보지 말고, 항상 그 결정이 내려지던 순간으로 돌아가서 그 결정을 내린 정치가, 외교관, 군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그들의 목표가 무엇이었고, 어떤 제약 속에서 움직였는지, 입수 가능한 정보는 무엇이었고, 가능하다고 당시에 생각되었던 대안은 무엇이었는지, 생각을 해보라는 것이다.

1938년의 뮌헨 회동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이듬해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했고, 결국 전 유럽은 5년간의 끔찍한 재앙을 경험하게 된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1938년 히틀러의 요구에 대해 초기에 강력하게 대응했더라면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왜 네빌 쳄벌레인은 협상을 통한 평화를 고집했던 것일까?

오늘날까지도 뮌헨 회동은 독재자와의 타협은 결국 실패한다는 교훈을 알려주는 대표적 사례로 원용되고 있다. 2차대전 이후 지금까지도 네빌 쳄벌레인은 잘못된 유화정책의 대명사처럼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전 유럽을 지배하겠다는 히틀러의 야심이 그토록 강렬한 것이었고, 독일의 군사력이 그토록 강대한 것이었다면, 뮌헨이 아니라 다른 시점에 다른 곳에서 회동을 했더라도 결국은 히틀러를 막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 아닐까?

더 중요한 것은 이 영화 속에서도 생생히 묘사되어 있듯이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군사력에 대적할 만한 군사적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미 1938년에 히틀러의 독일은 강력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1938년 시점에 독일을 힘으로 제압할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면, 협상에 나서자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리한 것 아닌가? 독재자와 협상에 나섰다는 이유만으로 잘못을 모두 쳄벌레인에게 돌리는 것은 무리 아닐까?

<다키스트 아워>가 그리고 있는 상황은 바로 절망

실제로 전쟁이 발발하자, 유럽 각국들은 독일의 군사력 앞에 추풍낙엽처럼 무너졌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덩케르크 포위 시점에 이미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는 독일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고, 벨기에, 네덜란드, 노르웨이도 차례로 항복했다. 프랑스는 항복 직전인 데다 항전의 의지마저 보이지 않고 있었다. 프랑코의 스페인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는 이미 독일 쪽에 줄 선 지 오래.

당시 영국의 주력군은 덩케르크에 묶여 있고, 이들에 대한 압박을 완화하기 위해 처칠은 칼레 주둔 영국군에게 측면 공격 시도를 명령하지만, 이 과정에서 칼레의 영국군은 독일군의 반격으로 괴멸되어 버린다. 독일은 강했다. 하늘에서 땅에서 독일의 공군기와 전차 군단에 대적할 수 있는 가망은 없어 보였다.

더욱이 영국을 도와줄 친구들이 보이지 않았다. 당시 미국인들은 이 전쟁에 끼어들고 싶어하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처칠의 지원 요청에 대해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거절할 수 밖에 없었던 것도, 당시 미국 의회가 중립법을 만들어서 유럽 국가들에 대한 미국의 전쟁 지원을 아예 법적으로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또 하나의 강대국 소련은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상태였고, 히틀러를 막기는커녕 오히려 폴란드를 분할 점령하는 등 상황을 즐기는 듯했다.

어디서 희망을 찾을 수 있나? 이미 처칠 자신의 명령으로 칼레 주둔 영국군 수천 명이 희생되었는데 더 싸우다가 만약 수만 명 수십만 명이 더 죽으면 어쩌나?

영화 속에서 헬리팩스 외무장관으로 상징되는 집권 보수당 원로들의 의견은 사실 단순 명확한 것이었고, 어찌 보면 상식적인 것이었다. 유럽은 이미 끝났다. 모두 다 히틀러에게 항복했는데 왜 우리가 유럽을 위해 피를 뿌려야 하나? 싸워서 이긴다는 보장도 없다. 다행히 우리에겐 식민 제국이 있다.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에서 독일이 우리의 이익을 인정해 주겠다고 약속만 해준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어느 정도 선에서 히틀러와 타협하는 것이 최선책이다. 덩케르크에 있는 30만의 영국인 젊은 장병들을 개죽음 당하게 할 수는 없다.

절망. <다키스트 아워>가 그리고 있는 상황은 바로 절망이다. 절망 속에서 처칠은 희망을 찾아 허우적댄다.

집권 보수당의 다른 지도자들이 더 이상의 희생은 무의미하다며 협상을 주장할 때, 처칠은 그 말을 끊으며 언성을 높인다. 뿐인가. 현장의 지휘관에게 사실상 자살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공격을 지시할 때, 무너지고 있는 전선의 지휘관에게 지원군은 보내줄 수가 없다는 전문을 보낼 때, 덩케르크로 선박을 보내 봤자 아마 30만 명 중에 10% 정도 밖에 생존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해군 제독에게 어떻게든 민간인 선박을 최대한 긁어 모으라고 소리를 지를 때. 처칠은 사실 절망적으로 희망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이었다. 희망을 찾던 그는 결국 '영국' 그 자체를 만나기 위해 평생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는 지하철을 타러 몸을 낮추고 지하로 내려간다.

공포에 짓눌려있을 때 처칠에게 힘을 준 건

 영화 <다키스트 아워>의 한 장면

영화 <다키스트 아워>의 한 장면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게리 올드만의 연기는 강렬하다. 처칠의 강인한 신념을 보여줘서가 아니다. 그의 흔들리는 마음, 불안과 고뇌, 폭발하는 분노와 추락하는 절망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강렬하다. 그리고 하원 의사당에서, 복도에서, 웨스트민스터 화이트홀 지하벙커에서 이어지는 말, 말, 말. 말의 향연은 정치와 외교에서 말이 갖는 힘을 여지 없이 보여준다.

그러나 영화가 다 끝나고 나서 올라가는 엔딩 크레디트를 보다 보면, 이 영화는 처칠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에 못지않게, 혹은 그보다 더, 그의 아내, 그의 타이피스트, 그리고 그가 섬기던 왕과 그를 격려해 주던 서민들에 대한 영화가 아닐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가장 어두웠던 시간,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갈피를 못 잡고 헤매던 때에, 내 동료들이 나를 부인하고 비판하던 때에, 내 결정으로 자칫하면 수천, 수만 명이 희생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짓눌려 있던 그때에, 처칠에게 힘을 준 것이 바로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경제 관념 없는 남편 덕에 집안 경제는 파산 지경이었지만, 그의 아내는 처칠에게 변함없는 애정과 신뢰를 보여주었다. 변덕스럽고 짜증내기 일쑤인 처칠이었지만, 그의 타이피스트는 처칠의 목소리를 들어 주고, 그가 느끼는 책임의 무게에 공감해 주었다. 당시 영국 왕이었던 조지 6세가 처칠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은 영화에도 나오다시피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것은 처칠이 조지 6세의 형이자 전임 왕이었던 에드워드 8세를 지지했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8세는 두 번의 이혼 경력이 있던 심슨 부인을 선택해 왕위를 포기하였고, 이로 인해 에드워드의 동생이었던 조지 6세가 그야말로 졸지에 왕이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다른 각료들과 달리 처칠은 끝까지 에드워드 8세에게 충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지 6세로서 속이 편할 리 없다. 그러나, 그런 개인적인 감정을 뒤로 하고, 조지 6세는 결국 누란의 위기에 놓인 영국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처칠 뿐임을 인정하고 한밤중에 처칠을 찾아와 왕가의 지지를 표명한다. 전시 내각의 지도자들이 타협과 협상을 주장했지만, 그가 지하철에서 만난 서민들은 절대로 굴복해선 안 된다, 싸워야 한다고 하면서 처칠을 격려한다. 이러한 애정, 신뢰, 공감, 지지, 격려에 힘입어 처칠은 다시 웨스트민스터(영국 의회)로 돌아와 말의 힘으로 동료들에 대한 설득을 시작한다.

오랜만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본 영화다. 처칠과 2차대전과 외교정책과 혹은 불확실한 미래를 앞두고 어려운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 꼭 볼 만한 영화인 것 같다.

처칠 쳄벌레인 히틀러 외교정책결정 절망과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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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수.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스탠포드대학교 쇼렌스틴 펠로우, 랜드연구소 스탠턴 펠로우를 거쳐 현재는 일본 오사카 소재 관서외국어대 교수 재직중. 일본 및 미국, 유럽,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온 다양한 학생들을 상대로 정치학을 강의하고 있다. 페이스북 페이지: https://www.facebook.com/booseung.ch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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