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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 봄날 : 무엇인가 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의욕의 계절입니다. 그런데 술자리에서 한 친구가 주말농장을 한다는 한 마디에 '이거다'라는 필이 꽂히게 되었습니다. 늘 우연이 필연으로 둔갑하는 인생사입니다. 아내가 싫어하는 부분입니다.

2. 협상과 대립군 : 한 가정에서 보수와 진보를 가를 필요도 이유도 없겠지만, 생뚱맞게 '텃밭'을 떠올린 저는 이른바 진보가 될 것이고, 마트의 그날 그날 야채 할인 가격과 원플러스원에 따라 탄력적인 저녁 메뉴를 정하는 노하우를 갖춘 아내는 이른바 '가난한 보수'로 자리매김하겠지요. 그래서 우리 가정의 짧은 협상 과정이 시작되었습니다.

3. 준비, '내미는 자의 책임' : 무릇 '무엇인가 하겠다'고 들이밀면서, 불쑥 아이디어만 내밀거나, '이거 해야된다'라면서, 내 주장만 한다면 논의는 수평선에 머물다 한번쯤 충돌하고, 유성처럼 실종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혹시 텃밭을 내 맘대로 얻었다 하더라고, 파트너의 협조를 전혀 구할 수 없는 불모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논의를 위한 공통분모가 필요합니다.

우선 1단계 부지 선택. 관할 구청에서 분양하는 인근 사거리 '텃밭'(4평에 7만원)은 1구획이 모두 마감되고 2구획이 남아서 추가 분양을 하더군요. 약간 때가 늦어서 그런 듯 합니다. 출근 시간보다 다소 앞당겨서 집을 나선 뒤, 사전답사를 했습니다. 사소하지만 보안이 필요하지요.

가벼운 거짓말로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선 뒤, 분양하는 텃밭을 보니, 이미 파종을 하거나, 일하시는 분들이 그 시간에도 눈에 띄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시더군요. 집에서 10분 거리. 여기로 마음을 정하고 돌아 오던 길에, 아파트 단지 인근에 쪽문이 하나 있고, 다소 왜소하지만 정갈한 텃밭이 또 있더군요.

놀랍게도 관리주체는 아파트 부녀회. 혹시나 해서 전화를 해봤더니, 세 개 구역이 남아있었습니다. 사전 정보가 참 중요합니다. 약간 음지와 짜투리 땅, 그리고 입구. 아마 도로변에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기피한 듯 합니다. 중국에서부터 미세먼지도 날아오는 판에, 손바닥한 만한 땅뙈기에서, 입구라는 이유만으로 버림받은(소작료는 5만원이었습니다) 땅. 이렇게 두 개 지역중에서 역시 두 번째를 염두에 두고, 사전 답사를 마쳤습니다.

<단지내 텃밭>
 <단지내 텃밭>
ⓒ 조진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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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협상, 교섭범위 확인 그리고 '문간에 발 들여 놓기(foot-in-the-door technique)' : 무릇 처음이자, 최후 관문인 아내의 결재 단계입니다. 동업자가 필요하니까요. 우선 관심이 있는지 확인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관심에 대한 최소한의 공유도 필요합니다. 아내에게 아예 딴 세상이야기라면, 공연히 분란만 일으키지요. 하지만 봄철에 화분을 갈아주고, 자주 물을 주지 않아도 저절로 크는 화분은 그래도 꽃까지 피워냅니다.

그래서 2단계 현장 브리핑. 저는 아내에게 봄이니까 자연스럽게 산책겸 화초를 사러 가자고 부추기고, 휴일 오전에 길거리 화초 쇼핑에 나섰습니다. 물론 화초는 염불이고 제 관심은 잿밥인 텃밭에 있는 탓에, 보아놓은 텃밭 인근으로 걸어가면서 "어, 주말 농장이 있네"라며 첫 화두를 시작했습니다.

5. 명분과 실리의 공유 : '나 혼자 얻으께', '너나 가라, 하와이'라는 맞대결을 가족간에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냥 가족이니까, 이건 아니지요. 최소한의 상호 공감을 기초로, 문간에 서로 발을 들여 놓은 관계니까요. 문간이 닫혔다면 문제가 다르지만요. 우리 부부가 죽기 살기 다투는, 보수 진보도 아니고요. 그래서 협상의 첫 포석인 명분은 역시 늦게 낳은 초등학교 막내 딸아이.

아이에게 '생장과 소멸'이라는 삶의 순리를 가르친다, 머 이런 허황하고, 정치적인 문구가 아니고, '감자 하나라도 제 손으로 심고, 크는 것을 보면서, 아이가 감자칩이 공장에서 자라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지 않겠느냐는 소박한 논리였지요. 그리고 실리. 이게 구청에서 관리하는 것이라, 정말 깨끗하고 싸다. 농약이나 비료도 일절 금지된다.

이렇게 가까스로 현장 브리핑에 성공했습니다. 그래도 아내는 '이거 혹시 내 일 되는 것 아니냐'라는 의혹을 거두지 않은 눈치입니다. 평소가 제가 해온 짓도, 역시 상대방에게는 중요한 것이지요. 참, 이번에는 배신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더구나 '관리 소홀로 잡초가 무성하면, 경작 권리를 박탈한다'는 마름격인 송파구청(죄송)의 경고도 가슴에 와 닿았나 봅니다. "그냥 사먹자, 얼마나 하겠냐", 여기에는 아마 '네가, 평소에...'라는 질타가 들어있는 듯합니다.

6. 교섭범위의 존중, 그리고 3단계, '문전박대 기법(door-in-the-face technique)' : 한번 박대한 사람을 또 박대하기는 '인지상정'과 '측은지심'의 원칙에 따라 아주 심하게 어렵습니다. 돈 빌려 달라는 친구를 박대한 뒤, 밥이나 사달라는 말까지 거절했다면, 집에 와서는 내가 잘못된 사람 아닌가라면서 무한한 죄책감을 갖는 것이 사람입니다.

이 친구를 평생보지 않는다하더라도, 가슴 한 구석에는 평생 남아있겠지요. 돌아오는 길에 자연스럽게 '여기로 가자'면서, 아파트 쪽문의 텃밭으로 발길을 돌려, '어, 아파트 단지에도 텃밭이 있네'리면서 새로운 신천지를 발견한 듯 소심한 유난을 떨었습니다. 이 동네에 이런 텃밭이 있다는 것을 저는 처음 알았지만, 사실 아내는 이미 매년 겨울철 부녀회 분양 게시판을 보고 알고 있었습니다. 지도로 보았지만, 눈으로는 보지 않던 땅이지요.

"대박, 집 바로 옆에 5만원 밖에 안 되는 텃밭이 있네, 구청보다 싸구만. 집도 가까운데, 가끔 산책이나 오지. 내가 일하께 관심만 기울여주시지."

관심만 가져달라는 말은 정말 위험한 계약조건입니다. 속아준 것인지, 속은 것인지. 사실 공동 경작지에 한번 발을 내밀었으면, 책임은 공유되니까요. 그래도 2만 원의 격차(아내를 길들인 '30%의 파격세일')는 마트의 할인 가격에 친숙한 아내에게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연거푸 두 번이나 결재를 거부하기가 미안한 심리적 요소가 동시에 작용했던지, 마침내 생애 첫 소작지를 얻었습니다. 물론 조건부입니다. 내가 전적으로 그리고 경작지를 반납할 때까지 모든 과정을 책임지고, 휴일에 아이를 데리고, 함께 짓는다는. 구두 협상 문안은 표면상 아주 불균등했지만, 그래도 아내가 교섭 범위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7. 파종과 아이 : 마찰없는 협상과 타결덕에, 아이가 무척 좋아합니다. 그날 협상이 결렬되고, 부부간에 신경질이 나 있었다면 아이는 하루쯤 우리 부부 눈치를 보면서 풀 죽은 모습이었겠지요. 하지만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를 그날 하루 학원을 '째고', 우리 부부는 텃밭에 짠하고 데려가고, 아이는 모종도 사고, 아주 신이 나 있습니다.

그 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천천히 일주일에 모종 몇몇 개를 사서(4∼5개 천원이더군요), 즐거움과 희망을 심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신적, 물질적으로 충분히 원가를 뽑을 수 있다고, 협상 파트너에게 투자 원금 회수를 틈틈이 약속합니다. 아이가 밭에서는 엄마 핸드폰에 관심조차 없는 것을 보니, 유투브와 전혀 다른 느낌인가 봅니다.

<감자 심는 아이>
 <감자 심는 아이>
ⓒ 조진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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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인근 종묘상에서 흑상추, 적상추, 로메인 상추, 감자, 방울및 대추 토마토, 당근씨, 갖종 고추 등을 아이와 함께 사가지고 오면서 대부분 아이가 심도록 했습니다. 다소 삐뚤빼뚤 심어져도, 바로잡지 않습니다. 아이 몫입니다. 박수치는 것은 역시 부부의 몫. 언젠가 제대로 자라겠지요.  

9. 여기까지가 다소 장황한, 4평짜리 첫 텃밭, 집안이야기 입니다. 그런데 3천리 금수강산도 어차피 한 평, 한 평 이어져서 만들어지니까요. 여름쯤 감자나 토마토를 수확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손바닥만하지만, 4평짜리 밭보다, 10cm 스마트폰 유지비가 더 비싼 세상입니다.

<아이의 성취감>
 <아이의 성취감>
ⓒ 조진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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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텃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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