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의 작품 포스터

애니메이션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의 작품 포스터 ⓒ 매드하우스




1. 일본 매체에서의 운명이란?

일본의 만화와 소설과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다들 공감할 만한 부분이 있다. 운명에 대한 묘사가 지나칠 정도로 많다는 것이다.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너의 이름은.>에서 이런 경향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런 부류의 작품에서 주인공은 운명에 이끌려 성장하고 결말을 맞는다. 그러나 작품의 재미와는 별개로, 우리로 하여금 정해진 운명대로 살아가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만 같아 불편할 때가 있다. 힘든 일조차 운명이라 말하기엔 너무 가혹하니 말이다.

그런데 연애 장르에선 그 불편함이 어느 정도 완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 우리가 낭만을 추구해서 일지도 모른다. 분명 우리는 사랑이 운명처럼 다가오는 것이라며 늘 설렘을 안고 살아간다. 반대로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인연이 아니었던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분리는 우리의 인식이 닿는 곳을 기점으로 이루어진다. 내가 아는 세계는 운명이고 내가 모르는 세계는 운명이 아닌 것이다. 즉,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알고 싶은 건 그 사람을 나의 운명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쉽게 말해 이분법이다. 이것은 우리의 사고가 얼마나 편협한지 말해준다. 싫어하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좋아하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해진다. 방 정리를 할 때도 눈에 안 띄는 방구석에 처박아 두면 말끔해 보인다. 그런데 방구석에서 느닷없이 무언가 튀어나온다. 일본 매체가 말하는 운명이란 게 바로 그러하다. 즉, 운명이란 건 사실 이전에 당신이 마주쳤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치워뒀을 뿐이다. 

그래서 일본 매체가 말하는 운명이란 보통 수복의 과정을 그린다. 없었던 걸 채우는 게 아니라 잊어버렸던 걸 되찾는 과정이다. 이전에 알고 지냈으나 잊고 살았던 첫사랑과 만나게 된다거나, 내면에 잠재된 힘을 일깨워 사악한 적을 물리치게 된다. 혹자는 이에 대해 운명조차 '가진 자의 것'이라며 한탄하고는 한다. 성장 만화의 주인공이 강한 건 노력이 아니라 재능이라고 말이다. 실제로 <나루토> 같은 만화를 보면 운명보단 숙명에 가까워 보이는 게 사실이다. 잊어버렸던 걸 되찾는 과정이지만, 스스로 찾아내는 게 아니라 남이 던져주는 걸 받아내는 느낌이다.

그렇지만 그보다 본원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어떻게? 라는 물음보단 무엇을? 이라는 질문을 던져보자. 운명을 말하는 작품에서, 주인공들이 '무엇을' 잊고 있는지 말이다. 그게 바로 이 소설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가 묻는 질문이다.

 애니메이션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의 한 장면

애니메이션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의 한 장면 ⓒ 매드하우스


2. 만약, … 했더라면.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는 모리미 토미히코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11부작 애니메이션이다. 이 소설의 외전격에 해당하는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또한 영화화되어 최근 국내에서 개봉한 바가 있다. 즉, <다다미…>는 <밤은 짧아…>의 본편 정도의 위치다. 따라서 이 작품을 보고 재미를 느꼈다면 이어서 <밤은 짧아…>를 관람해 보는 걸 추천한다. 재밌게도 두 작품 모두 컬트적이다. 컬트의 본뜻인 '주류는 아니지만 소수 마니아들에게 인기를 끄는'에 해당한다. 어찌 됐든 인기가 있다는 건 확실하다.

기본적으로 두 작품은 세계관이 같다. 그리고 작품의 주인공과 서사도 비슷하다. <다다미…>의 서사는 다음과 같다. 대학교 3학년생인 주인공 '나'는 동아리 활동도 연애도 아무것도 성공하지 못한 채 후회한다. 만약…이라는 가정하에 입학 때로 돌아가 여러 가정을 해본다. 작품은 그 '만약'을 차례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일종의 평행세계로 치부되니 굳이 말하자면 '만약'은 아니다. 주인공은 기억을 잊은 채 계속해서 삶의 특정 지점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주인공은 늘 자신이 생각하는 '최선'을 행하지만 결과는 늘 '최악'이다. 1화부터 9화까지 주인공은 그런 선택을 반복하게 된다. 그러나 이 작품이 말하고 싶은 건 10화다. 10화에서 주인공은 '무슨 선택을 하던 최악이니'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집안에 틀어박히게 된다. 그 결과 2.25평의 다다미 넉 장 반 자취방에 영원히 갇히게 된다.

SF 영화 <큐브>가 떠오른다는 작중 대사처럼, 방을 나가면 또 다른 세계의 자신 방과 연결되어 있다. <인터스텔라>에서 본 것처럼 방 하나하나가 모두 평행세계의 자신이 사는 곳이다. 재밌게도 주인공은 '자신도 모르는 자신'을 방을 거쳐 가며 서서히 알아간다. 1화부터 10화까지 주인공이 되돌린 시간이 차례대로 언급된다. 그런데 집안에 영영 갇힌 그에게 그동안 되돌린 시간은 무척 귀중하게만 보인다. 탐탁지 않게 여기던 친구는 '유일한' 친구였고 실패한 동아리 활동은 '무척' 재밌게만 보인다.

이러한 부분이 일반적인 평행 세계를 다루는 작품과 다르다. 대체로 평행 세계를 다루는 작품은 니체의 영원 회귀를 바탕으로 한다. 니체는 "다시 한번 이 순간이 반복돼도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오히려 그 반대를 말하고 있다. 후회해도 괜찮으니 무엇이 소중한지 생각해보라 묻는다. 말하자면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것이다. 수많은 실패를 통해 단 하나의 성공을 만들어 내는 것보단 단 하나의 실패가 수많은 성공을 이끈다고 말한다.

그렇게 보면 더 재미있다. 단 하나의 실패가 성공을 이끈다면, 실패조차 잘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말처럼 이 작품은 어떻게 실패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작품의 주인공은 매번 자신이 실패한 삶을 살았다며 다시 한번을 외치는데, 남들 눈에는 그럭저럭 잘 산 것처럼 보인다. 원래 성공이란 상대적인 것이므로 그러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신보다 못난 누군가를 생각하며 위안을 얻으라는 소리는 아니다. 만약…이라는 가정이 '어떻게 성공할지'가 아니라 '어떻게 실패할지'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애니메이션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의 한 장면

애니메이션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의 한 장면 ⓒ 매드하우스


3. '어떻게'보단 '무엇을'

하지만 첫 문단에서 '어떻게'보단 '무엇을' 실패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 문단이 틀렸다는 건 아니다. 작품을 보는 우리야 이야기의 흐름을 모두 알지만, 작품 속 주인공은 매번 기억을 잃고 새롭게 시작한다. 기억이 없는데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 수는 없다. 그래서 작품의 각 화가 '어떻게' 실패할지에 대한 내용이라면, 10화에서 주인공이 지금까지의 행적을 정리하며 얻는 깨달음이 바로 '무엇을' 실패해야 할지다. 어떤 도구를 사용하려면 그게 뭔지 알아야 하는 것처럼, 실패를 사용하려면 그게 뭔지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 운명을 사용하려면 그게 뭔지 알아야 한다. 작품의 주인공은 언젠가 운명처럼 여자친구가 생길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운명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그녀가 운명처럼 다가올 리가 없다. 1화부터 9화 내내 그 가능성이 암시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작품에서 운명은 아주 가까이에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반복되는 여러 삶에서, 주인공은 매번 여자 주인공이 잃어버린 인형을 손에 넣게 된다. 그 인형을 돌려주며 말을 걸어보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런데도 단지 방 천장에 매달아 두고 돌려주는 상상만 할 뿐이다.

주인공이 망쳐진 대학 생활에 한탄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항상 점쟁이 노파가 있다. 매 화마다 주인공은 노파에게 귀신처럼 홀려 점괘를 듣게 된다. 점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신은 재능도 있고 대단한 사람이다. 그러니 눈앞의 호기를 잡아라."

이 장면 뒤에는 항상 천장에 걸린 인형이 비치므로 호기란 인형을 뜻한다. 그렇다면 노파가 말하는 건 눈앞에 그녀가 있으니 붙잡으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주인공은 인형을 돌려주지 못한다. 그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추측해보면 두 가지로 축약된다. 어차피 인연이 아니라고 치부하거나, 인형을 돌려줄 목적으로 그녀를 만나러 갈 용기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다. 어차피 실패할 것으로 치부하거나, 실패를 마주할 용기가 없는 것이다. 즉, 앞서 말했듯이 무엇을 실패할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실패할지를 먼저 고민하는 셈이다.

이때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무엇을 실패해야 하는가? 이것을 뒤집어 보자. 실패란 무엇인가? 우리는 앞에서 말했었다. 성공이란 상대적인 것이라고. 그렇다면 실패도 상대적인 것이다.

여기에 위에서 말했던 운명의 정의를 대입해보자. 운명이란 그녀고, 그녀는 주인공의 호기다. 운명이란 이전부터 있었지만 당장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전부터 있었으나 인식하지 않던 인형이 바로 운명을 뜻한다. 그러니 주인공이 뒤늦게 인형을 인식한 순간이 운명의 갈림길이다. 그런데 운명이 찾아왔으니 손에 쥐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다. 결국 그녀와 호기를 모두 잃은 주인공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청춘의 두 요소인 취업과 연애 둘 다 하지 못한다.

그 인형은 그녀가 잃어버린 것이기에 돌려주어야만 한다. 잊어버렸지만 수복해야 하는 대상이다. 즉, 그 인형은 그녀에게 운명이다. 그러니 주인공은 단순히 운명을 인식하는 것뿐만 아니라, 운명을 그녀에게 돌려주어야만 한다. 한쪽의 일방적인 운명만으로는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어쩌면 운명 같은 무언가가 찾아올 것이라며 가만히 앉아있는 청춘에게 고하는 메시지처럼 보인다.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 원작 소설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 원작 소설 ⓒ 비채




4. 다다미 넉 장 반의 청춘에게

원작자 모리미 도미히코는 신기한 소설가다.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나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처럼 가벼운 주제뿐만 아니라 무거운 주제도 잘 다룬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알 수 있듯, 그의 소설은 '환상적 리얼리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여기서 환상적 리얼리즘이란 '현실에 꿈만 같은 일이 벌어지는' 작품관을 의미한다. 판타지처럼 보이는 이 단어는 시대를 간접적으로 고발하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그 분야의 대표적인 작가가 바로 '모옌'이다.

모옌은 2012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중국 작가다. 본명은 관모예, 필명인 모옌은 '말을 하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국내에는 <붉은 수수밭>이라는 영화와 소설로 잘 알려져 있다. 노벨 재단은 노벨 문학상을 그에게 수여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환상적 리얼리즘을 민간 서사, 역사 그리고 동시대와 잘 조화시켰다."

그의 소설에는 현실과 괴리된 무언가가 나타나 주인공의 일상을 헤집어 놓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 무언가는 민담이나 역사적 사실에서 따온 게 태반이다. 그런데 그 무언가는 맥락을 알 수 없는 은유로 변형된다. 아마도 중국이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인 것을 떠올려 볼 때, 간접적으로 말해야만 했노라고 짐작될 뿐이다. 중요한 건 그것이 사회 고발이 아니라는 점이다. 모옌은 혼란스러운 당대 사회를 목격하고, 소설로 기록한다. 즉, 그의 소설에서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유보된다. 그의 필명처럼 모옌은 '직접 말을 하지 않는다.'

분명 모옌과 모리미 도미히코를 직접 비교하는 건 무리가 있다. 하지만 둘은 비슷한 게 사실이다. 모옌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괴이하게 변형된 현실이 있다. 일단 학생회보다 권력이 센 '어둠의 학생회'가 있다. 마치 < 1987 >을 떠오르게 하는 그것은, 유머로 넘기기엔 무겁고 진지하게 여기기엔 가볍다. 또한 취업 의욕 없이 8학년째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이 있다. 분명, 작품을 보면 그들이 취업을 위해 무언가 하고 있지는 않다. 술과 연애에 관심이 쏠려 있고 작화도 취기에 일렁인다.

남들은 다 행복한 것처럼 보이는데 나만 불행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니 주인공이 다니는 캠퍼스를 작은 사회라 불러도 좋겠다. 청춘만이 모인 작은 사회는 우리 사회를 거울처럼 비춘다. 러브 돌을 살아있는 사람처럼 여기는 남자가 있고, 취업이 안 되니 모든 걸 내려놓고 풍류를 즐기는 남자가 있다. 어쩌면 니트족과 초식남에 대한 비판일지도 모를 설정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 영화를 만들고 싶어서 영화를 만들고, 놀고 싶으니 멍하니 앉아서 논다. 취업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들의 삶이 베스트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베스트가 아닌 삶'을 부러워한다. 그는 진정 좋아하는 것을 찾지 못한 채 여러 동아리를 떠돈다.

바로 그 때문에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가 본작의 외전이다. 그 작품은 우리에게 '일단 용기를 내어 걸어보라'고 말했다. 그렇게 걷다 보면 누구든 만날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 작품은 인물의 대사를 빌려 '인연이든 악연이든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어차피 지구는 둥글지", "어차피 당신은 어떤 길을 고른다고 해도", "우리는 운명의 검은 띠로 엮였다는 것이지요"라는 대사에서 그 뉘앙스를 찾아볼 수 있다.

'검은 띠'는 '붉은 실' 설화의 조롱에 가깝다. 붉은 실 설화는 태어나기 전부터 '운명의 짝'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니 '검은 띠'란 두 사람이 악연이라는 것을 뜻한다. 이것을 위에서 말한 운명론과 결부 지어 보면 다음과 같다. 작품은 악연이지만 그것조차 인연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실패지만 그것조차 성공이라고 말한다. 즉, 실패든 성공이든 앞으로 나아가기만 한 것으로도 '성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일본에서 '다다미 넉 장 반'은 청춘의 상징이다. 그것도 '가난한' 청춘이다. 고시원보단 크지만 대략 비슷한 위치의 주거 형태다. 그러니 그것을 제목으로 내세운 이 작품이 무엇을 말하는지 대략 짐작이 간다. 평행 세계와 타임 리프를 다룬다고 해서 판타지가 아니다. 연애하고 싶어한다고 해서 연애물이 아니다. 일상이 반복된다고 해서 일상물도 아니다. 그 세 가지를 모두 합해야 비로소 청춘의 목소리가 들린다. 무엇을 어떻게 하든 간에 우리는 이미 그 결과를 알고 있다. 그것은 운명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어떤 결과든 받아들여야만 한다. 두려워도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애니메이션 소설 유아사 마사아키 다다미 넉장반 세계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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