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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니스테레  곶(Cape Finisterre). 예전에 이곳에서 신발 등을 태웠다.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피니스테레 곶(Cape Finisterre). 예전에 이곳에서 신발 등을 태웠다.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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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도돌이표를 좋아한다. 끝났다 싶은데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그것. 그 한없는 순환이 내 삶에 깊숙이 자리한다. 죽음은 또 다른 생명의 탄생을 위한 것이기에 결국은 시작도 끝도 한 몸이다, 이것이 가면 또 다른 '이것'이 오겠지, 라는 공식으로 말이다.

세상의 끝(Finisterre)도 간절한 '시작'을 위한 도돌이표 같은 것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기에 내 인생(90세까지 살아지겠지 싶지만)의 절반에 방점을 찍고 새로운 시작을 알리고 싶었다.

피니스테레는 '피니스(끝)'와 '테레(땅)'의 합성어이며 로마시대에 그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진정한 땅 끝을 보기 위해서는 그곳에서 3.2km를 떨어진, '피니스테레 곶(Cape Fisterra)'까지 가야 한다.

Cape Finisterre. 세상의 끝이다. 표지석에 '0.00 K.M.'이라고 적혀 있다.
 Cape Finisterre. 세상의 끝이다. 표지석에 '0.00 K.M.'이라고 적혀 있다.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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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e Finisterre. 신발 동상이 있다.
 Cape Finisterre. 신발 동상이 있다.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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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니스테레 알베르게에 가방을 두고 천천히 곶으로 향해 걸어갔다. 그곳을 보기 위해서 나처럼 걸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택시나 자가용을 이용하는 사람도 많았다. 캠핑카도 눈에 띄었다(그곳은 순례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관광객에게도 유명한 곳이었다).

땅 끝이라는 상징. 0km를 나타내는 표지석. 순례자들의 소지품이 걸린 철탑. 그리고 뭔가를 태운 흔적. 전에는 이곳에서 신발 등을 태웠다.

뭔가를 태운다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헌것을 태우고 새것을 얻겠다는, 묵은 죄를 벗고 새로워지겠다는 여러 의미가 함축된다. 불이란 일종의 소독이나 정화의 의미도 있지 않는가. 지금은 환경보호 이유로 금지되고 그 흔적만 남아 있었다. 나는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대서양이 한없이 펼쳐진 바위에 앉아 신발과 양말을 벗은 다음, 아주 편하게 앉았다. 등 뒤에서는 인증샷을 날리는 사람들로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내가 앉아 있는 공간과 내 앞에 펼쳐진, 코르처럼 아주 느리게 움직이는 진한 코발트 바다는 내 것이었다. 그리고 900km를 걸어온 길 위의 시간과 장소들, 고뇌와 환희 등 말할 수 없는 감정과 사색 또한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내 영역이었다. 비로소 그 모든 것들을 풀어놓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들과 함께 말이다.

산티아고에서 6km를 걸으면 피니스테레와 묵시아로 가는 갈림길 표지석이 나온다. 나는 피니스테레 쪽(왼쪽)으로 걸었다.
 산티아고에서 6km를 걸으면 피니스테레와 묵시아로 가는 갈림길 표지석이 나온다. 나는 피니스테레 쪽(왼쪽)으로 걸었다.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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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나는 나를 불태웠던 적이 있는가?' 그리고 질문 말미에 또 다시 반복되는 그 질문. '나는 누구인가?' 아, 나는 세계의 끝이라는 그곳에서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길 위의 풍경
 길 위의 풍경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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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베이로아(Olveiroa)에서 피니스테레(Finisterre)로 향하는 길은 아름다웠다. 고지대를 아주 길게(?) 걸어야 했는데 나는 그 길을 사색의 길이라 칭했다. 그 길이 있어서 바다가 더욱 아름다웠다. 내일 묵시아(Muxia)로 가는 길이 까미노 여정의 마지막 장소이다. 나의 세상의 끝은 아직 끝나지 않은 셈이다. 묵시아가 기다리고 있었으니깐.

나는 신발 동상이 보이는 곳에 앉아 먼 바다에 시선을 던졌다. 수평선에서는 게으른 햇살이 반짝였다. 어떤 말도 필요없었다. 침묵으로 일관하며 나는 '나'로서 그곳에 앉아 있으려고 했다. 그것만으로도 내 존재가 충분히 빛을 발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내가 무척이나 자랑스러웠으니깐.

쎄(Cee) 마을 입구. 바다와 묘비석이 조화롭다.
 쎄(Cee) 마을 입구. 바다와 묘비석이 조화롭다.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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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길’은 2017년 6월 13일에 걷기 시작해서 7월 12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습니다. 30일만의 완주였습니다. 그 다음 날, ‘세상의 끝’이라는 피니스테레와 묵시아까지(100km)까지 내처 걸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34일 동안 900km 여정을 마쳤습니다. 몇 십 년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34일의 여정은 짧을 수 있으나 걸으면서 느꼈던 것들은 제게 인생의 축소판처럼 다가왔습니다. 움츠린 어깨를 펴게 하고 긍정적인 미래를 내다보게 했습니다. 이곳에서 34일 간의 힘들었지만 행복했던 시간들을 도란도란 풀어놓으면서 함께 공유하려고 합니다.



태그:#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 길 , #프레그리노, #까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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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이자 문학박사. 저서로는 소설집 《기차가 달린다》와 《투마이 투마이》, 장편소설 《죽음의 섬》과 《스노글로브, 당신이 사는 세상》, 여행에세이로는 《자유로운 영혼을 위한 시간들》, 《물공포증인데 스쿠버다이빙》 등이 있다. 현재에는 광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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