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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311년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330년 수도를 비잔틴으로 옮기면서 로마의 동쪽과 서쪽은 정치는 물론 종교, 예술에 있어서도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등의 미술사 관련 서적에 따르면, 특히 미술에 있어 엄격한 잣대를 사용했던 동쪽과 달리 서쪽은 그림에 다소 관대했다. 우상의 제작과 숭배에 대한 금지를 담은 성서의 내용에도 불구하고 서쪽의 그레고리 교황은 글을 읽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림이 글을 대신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고. 따라서 성서의 가르침을 전하고 기억하게 하기 위해 그림이 적극 활용되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미적인 목적인 아닌 가르침의 목적이었으므로 그림은 최대한 간단하고 선명해야만 했다.

성서의 내용을 더욱 엄격하게 적용한 동쪽의 그림은 더욱더 기본적이고 단선적이며 딱딱해졌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 발전했던 신체의 자연스러운 형태나 움직임, 자연에 대한 사실적 묘사 등은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실제 인간의 모습과 흡사하거나 현실적인 배경과 공간의 묘사는 신적인 영역을 표현하는데 적합하지 않으며 보는 이들로 하여금 신과 인간, 하늘과 땅을 구별하는데 혼란만을 가져올 것이므로 멀리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비잔틴 성모화 Source: Wikimedia Commons
▲ Virgin Enthroned with Two Saints, 6세기 비잔틴 성모화 Source: Wikimedia Commons
ⓒ St. Catherine's Monas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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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에 그려진 동쪽의 성모화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가치가 녹아 든 전형적인 그림이다. 현실 공간 속 인간의 모습이라고 생각되기 보다는 성모의 모습이라는 사실만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게 그려졌다. 일종의 아이콘(icon)같은 성모의 모습으로, 왕좌에 앉아 성인과 천사들에 둘러싸여 위엄을 느끼게 해준다.

무릎에 앉은 예수의 모습 또한 크기만 작을 뿐 성인과 같은 엄숙한 얼굴 표정을 하고 있다. 머리를 감싸고 있는 후광은 보통 인간과 구별된 신성한 자라는 표시로 사용되었고 그림 윗부분 가운데에 성모를 향한 신의 손은 성모의 위상을 신의 위치로 높여준다.

이렇듯 비잔틴의 성모화는 사람의 기본적인 형태와 평면적인 화면, 좌우대칭의 구성, 주요 인물의 크기 부각, 전형적인 상징물의 등장 등 특징적인 요소들로 가득하다. 성모화를 보는 이들로 하여금 성모는 인간과 구별된 신적인 존재임을 나타내고 그에 대한 경외심과 경건한 마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 당시의 작가들은 이렇듯 공식에 따라 그림을 그린 것이다.

이에 대해 곰브리치는 마치 아이가 그린 그림과 같이 딱딱하며 공식에 따라 그려진 이집트 벽화를 연상시킨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는 이를 퇴보라고 이야기해서는 안 되며 또한 그리스, 로마 시대를 거치며 발전한 그림의 요소(서고, 앉고, 구부리는 등 다양한 자세)가 완전히 배제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Cimabue, Source: Wikimedia Commons
▲ Virgin and Child Enthroned, 1280 Cimabue, Source: Wikimedia Commons
ⓒ Uffizi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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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그려진 치마부에의 성모화는 중세와 르네상스를 연결하는 그림으로 평가 받는다. 성모와 아기 예수가 성자들에 의해 둘러싸인 모습을 형상화한 이 그림은 중세의 딱딱한 포즈를 넘어 3차원적인 입체감을 표현했다.

여전히 좌우 대칭적인 구도와 서열적인 인물의 크기 등 중세적인 요소들을 담고 있지만 둘러싼 성인들과 아래에 그려진 4명의 선지자 그림에서도 보이듯 보다 자연스러운 표정과 자세가 돋보인다.

르네상스 시대 화가이자 당시 화가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 'The Lives of the Artists'에서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는 치마부에를 '그림이라는 예술에 첫 번째로 빛을 비춘 작가'로 평가했다.

자연스러운 묘사에서 이전 중세 시대와는 다른 혁신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그의 그림은 평평한 비잔틴 스타일의 그림과 사실적이고 균형잡힌 르네상스 스타일 사이의 차이를 연결해주는 것으로 인정을 받는다. 그의 제자 조토 디 본도네(Giotto de Bondone)에 이르러 성모화는 더욱 더 사실적으로 진화하는데 그는 이탈리안 르네상스를 가능하게 한 선구자로 불린다.

Fra Filippo Lippi, Source: Wikimedia Commons
▲ 성모와 예수, 그리고 세인트 앤의 생애, 1453 Fra Filippo Lippi, Source: Wikimedia Commons
ⓒ Palazzo Pit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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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성모화는 비잔틴 시대의 전형을 상당 부분 벗어 던진다. 15세기 그려진 프라 필리포 리피(Fra Filippo Lippi)의 성모화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부활을 추구하던 이상에 걸맞게 성모를 그리스 여신 페르세포네의 모습을 본 따 그렸다. 이에 걸맞게 그림 속 성모는 페르세포네의 상징물이자 부활, 다산, 풍요를 의미하는 석류를 들고 있다.

성모의 어머니 세인트 앤의 생애를 표현한 배경의 그림은 공간적인 깊이를 풍부하게 담고 있으며 모든 동작과 옷의 표현이 섬세하고 아름답다. 특히, 성모의 머리에 두른 투명한 베일의 묘사는 그의 제자이자 '비너스의 탄생'의 작가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성모의 얼굴과 아기 예수의 얼굴에도 표정이 살아있다. 해맑고 사랑스러운 아기 예수의 표정과 달리 수심에 담긴 듯한 성모의 표정은 성모화에서 종종 나타나는 모습으로, 이는 다가올 예수의 고난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을 담은 것으로 해석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여전히 성모와 아기 예수, 성모 어머니의 머리를 둘러싼 약하지만 눈에 띄는 후광에서 중세 시대의 잔재가 남아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태그:#성모화, #비잔틴, #르네상스, #아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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