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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로 가방끈을 엮자.
별빛으로 가방끈을 꼬자.
손바닥에 침은 뱉지 말고
꽃향기와 나비를 추억하게 하자. (가방끈/19쪽)

아기보자기에서 나와
책보자기 펼쳐 공부하고
떡보따리 풀어 함께 먹고
이야기보따리 끌러
웃음보따리 나누다가
짐보따리는 이고 지고 (꽃보자기/76쪽)


요 몇 해 사이에 '사전'이란 이름을 붙인 책이 꽤 나옵니다. 아직 많지는 않으나 꾸준히 나와요. 잔잔하지만 '사전 바람'이 분다고 할 만합니다. 2000년대로 접어들고 나서 '글쓰기'를 다루는 책이 이럭저럭 나오다가 이제는 쏟아지다시피 나오는데, '글쓰기책 바람'은 얼핏 수그러들 듯하면서도 수그러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힘을 내어 나오는 듯합니다.

사전 이름을 붙인 책이나 글쓰기책이 나오는 결을 살피면, 그만큼 한국 삶터가 억눌렸다가 한꺼번에 터져나오는구나 싶어요. 오랫동안 반민주하고 반평등으로 흐르던 나라에서 차츰 민주물결이 흐르면서 누구나 즐겁게 글을 쓰는 살림으로 거듭납니다. 예전에는 많이 배우거나 대학교 문예창작학과쯤 나와야 글을 쓴다고, 또는 기자나 학자가 아니고서는 글을 못 쓴다고 여겨 버릇했어요. 정치나 삶터 모두 크게 억눌렸기에 지난날에는 누구나 글을 쓰기 어려웠습니다.

이러다가 즐겁게 글을 쓰는 이들이 늘어났고, 누리신문(인터넷신문) 시민기자가 생겼어요. 글을 쓰는 즐거움을 혼자만 누리고 싶지 않아서 자꾸 글쓰기책을 내고, 이곳저곳에서 새롭게 글꽃을 지피는 이들도 저마다 다른 목소리를 내어 글쓰기책을 씁니다.

사전 이름을 붙인 책은 한국말사전이 썩 알차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만합니다. 수천 쪽이 넘는 커다란 사전이 여러모로 엉성하기는 하지만 한 사람 힘으로 수천 쪽에 이르는 새로운 사전을 쓰기는 어렵기에, 작게 갈래를 나누어 갖가지 재미난 사전을 엮는다고 할 수 있어요. <동심언어사전>(이정록, 문학동네, 2018)은 시집입니다. 시집인데 '사전'이란 이름을 붙입니다.

빗줄기 종아리 좀 봐.
소나기 종아리는
웅덩이에서 찰방거리며 놀 때 예쁘지. (날궂이/97쪽)

말은 가슴에서 울려퍼지지.
징이 되어 둥둥 퍼져나가지.
장구와 꽹과리와 추임새가 흥을 돋우지.
말이란 붉은 심장을 꺼내어 건네는 일.
마른 손으로는 받을 수 없지. (넋두리/98쪽)


겉그림
 겉그림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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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언어사전> 벼리를 살핍니다. '가갸날'로 첫발을 떼고는 '힘줄'로 마무리를 짓습니다. 글쓴이 이정록님은 낱말하고 낱말이 만나는 즐거움을 더 깊이 나누거나 누리고 싶은 뜻으로 316 낱말을 뽑아서 이야기를 붙여 시로 엮어 보았다고 밝힙니다.

이 시집에 실은 낱말을 얼추 살펴보겠습니다. 가난살이, 가로쓰기, 가방끈, 가새주리, 가시손, 가을귀, 개똥장마, 개미허리, 거지발싸개, 걱정꾸러기, 구름다리, 글쟁이, 김칫국, 까치발, 꽃손, 꾀주머니, 나무거울, 나이떡, 나이배기, 넋두리, 노루잠, 눈물샘, 눈웃음, 단비, 달꽃, 닭살, 독서왕, 돋을볕, 돌잡이, 뒷북, 등긁이, 땅끝마을, 먹장가슴, 먼발치, 메밀꽃 …… 오색딱따구리, 육쪽마늘, 입김, 잎몸, 주근깨, 쥐뿔, 책거리, 칠성무당벌레, 코딱지, 콩털, 키쩍다리, 터무니, 혓바늘, 황소눈, 흙이불 같은 낱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여러 낱말을 살피면 어린이도 알아볼 낱말이 있으나, 어린이는 어림하기 어려운 낱말이 있습니다. 때로는 어른한테까지 낯선 낱말이 있어요. 다만 오늘날 어른한테만 낯설 낱말입니다.

아침해가 솟을 때,
할머니는 그 돋을볕이 아까워
내 바지를 벗기고 오줌을 뉘였지.
오줌주머니에 돋을볕을 담아주셨지.
햇살거름이 최고라고 웃으셨지. (돋을볕/126쪽)

눈을 반짝이며
씨가 되는 말을 하자.
슬며시 웃음 봉오리를 꽃받침으로 가리고
볼우물에서 물을 길어주자 (말씨/151쪽)


그렇다면, 이 시집은 왜 '동심언어 + 사전'일까요? 316꼭지에 이르는 시를 읽어 보면, 글쓴이는 이녁 어린 날을 떠올리면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글쓴이가 밝히는 '동심'이란 어른이 된 오늘 몸으로서 지난날 아이였을 적에 부대낀 삶하고 살림을 되새기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어른으로 살지만 오늘 어린이로 살아가는 새싹한테 글쓴이 나름대로 물려주고 싶은 '한국말꽃'을 316가지로 모았다고도 여길 만해요.

이 시집에는 '추억'이 자주 나옵니다. 글쓴이가 겪은 옛일을 떠올리는 옛생각이지요. 그런데 '추억'은 어린이가 쓰는 말이 아니고, 어린이가 글쓰기로 삼는 글감도 아닙니다. 더구나 아이들은 '추억'을 헤아리지 않아요. 아이들은 아직 어려도 '어릴 적 일을 어느새 잊'습니다. 어른이 잊는 지난날하고 아이가 잊는 지난날은 사뭇 다른데요, 아이들은 앞날을 내다보고서 날마다 무럭무럭 크느라 '아이로서 더 어릴 적'을 잊습니다. 더 어릴 적을 잊어야 씩씩하게 크거든요.

아이들로서는 아장걸음을 걷던 때를 머리에 담을 까닭이 없습니다. 아이들로서는 수저질이 어설프던 때를 머리에 새길 까닭이 없습니다. 아이들로서는 자꾸 넘어지거나 글씨를 틀리게 적거나 말소리를 어긋나게 내던 일도 구태여 머리에 아로새겨야 하지 않아요. 아이들은 '새꿈'을 먹고 삽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할 때
한 방울 한 방울 성글게 떨어지는 걸
비꽃이라 부르지요.
구름꽃이 땅바닥에 그리는
물방울꽃이지요. (비꽃/212쪽)

― 어깨너머에는 별의별 것
다 가르쳐주는 학교가 있나 봐요?
……
― 배움이란, 어깨너머 학교에서
마음을 모셔오는 거란다. (어깨너머/279쪽)


<동심언어사전>을 읽으면서 반가운 대목을 꼽자면, 316가지에 이르는 이야기를 글쓴이 나름대로 차곡차곡 갈무리해서 오늘 이웃님한테 들려주어요. 이 시집을 읽으며 아쉬운 대목을 꼽자면, 316가지에 이르는 이야기를 풀어내지만, 어린이 마음하고 와닿을 만한, 그러니까 어른으로서 추억하며 새기는 옛이야기가 아닌, 어린이가 앞으로 새꿈을 키우며 나아갈 이야기는 좀 드물구나 싶어요.

말은 늘 두 가지 결이 흘러요. 하나는 우리가 살아온 모든 자취가 말에 깃듭니다.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꿈을 말에 담지요. 오래도록 흘러온 말에는 오래도록 살아온 사람들 마음씨가 흐릅니다. 새로 지어서 쓰는 말에는 어제보다 새롭게 하루를 지으면서 씩씩하게 나아가려는 마음결이 감돌아요.

시집을 더 헤아린다면, 어른은 '동심 + 언어' 같은 말을 쓰더라도 아이들은 이런 말을 안 씁니다. 아이들은 '추억' 같은 말도 안 쓰지만 아이 스스로 '동심'이라고 말하지 않아요. 아이들은 "우리 마음"이라고만 말합니다. 이 시집이 어제하고 오늘을 이어 모레로 나아가는 새로운 '시집 + 사전' 노릇을 하자면, 너무 어제(추억)에 머물기보다는 오늘(현실)을 살아가는 아이하고 어른이 조금 더 기운을 내어 즐겁게 모레(미래)를 노래할 수 있도록 북돋우는 '마음말(마음 + 말, 곧 동심 + 언어)'를 길어올리면 좋았지 싶습니다.

흙은 지렁이와 함께하는
간지럼 태우기 놀이를 좋아해.
비좁다고 식식거리는
감자 고구마 무의 밀치기 놀이를 좋아해. (흙장난/403쪽)


봄에 봄바람이 붑니다. 아이들은 봄바람을 느끼며 옷차림을 가볍게 바꿉니다. 옷차림이 가벼우니 겨울보다 더 가볍게 달리기를 합니다. 겨울에는 묵직하고 두꺼운 옷을 겹겹이 입은 채 달렸다면 봄에는 홀가분한 차림새로 훨씬 가볍게, 마치 봄에 찾아오는 제비처럼 날갯짓하듯 달립니다.

시원하게 달리고 시원하게 멱을 감으며 시원하게 쉽니다. 시원하게 노래하고 시원하게 놀다가 시원하게 배웁니다. 오늘 우리 삶을 새롭게 기쁨으로 밝힐 시집이며 사전이 자꾸자꾸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크고 묵직하지 않아도 좋으니, 작고 단출하면서 새로운 나날을 그리는 꿈을 이야기하는 시집이며 사전을 저마다 즐거이 쓸 수 있기를 바라요.

덧붙이는 글 | <동심언어사전>(이정록 / 문학동네 / 2018.3.12.)



동심언어사전

이정록 지음, 문학동네(2018)


태그:#동심언어사전, #이정록, #시집, #사전,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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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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