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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8.04.25 10:25수정 2018.04.25 14:47
2007년 2차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대통령을 수행해 평양에 갔다. 그때처럼 걱정한 적이 없다. 그곳에서는 포털사이트를 열어볼 수 없기 때문이다. 연설문 쓸 시간도 턱없이 부족했다. 정상회담이 끝난 다음 날 서울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그래서 미리 '말하다'의 유의어 30여 개를 준비해 갔다. 연설문에 가장 많이 쓰일 것 같은 단어가 '말하다'이기 때문이다. '대화를 나눴다', '얘기했다', '언급했다', '표명했다', '피력했다', '강조했다', '희망했다', '설명했다', '밝혔다', '반박했다', '뜻을 같이했다', '토로했다', '설득했다', '공감했다', '주장했다', '권유했다', '호소했다', '합의했다' 등. 정상회담 결과 연설문을 작성하면서 '말하다'가 들어가야 할 자리마다 준비해 간 유의어를 봤다. 가장 맞는 단어를 찾아 써넣었다. '주장'과 '설명'은 다르다. '표명'과 '강조'도 차이가 있다. 큰 문제 없이 대통령 연설문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단어 30여 개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다.



글은 단어의 나열이다. 글쓰기는 단어 쓰기다. 글을 쓴다는 것은 적절한 단어를 내 머리에서 뽑아내는 과정이다. 단어가 모여 문장을 이루고, 문장이 모여 문단을 만들고, 문단이 모여 한 편의 글이 된다. 그러므로 글을 잘 쓰려면 단어를 잘 써야(用) 한다. 단어가 신속하게 생각나면 글을 빨리 쓰고, 단어가 다양하게 떠오르면 글이 유려하며, 정확한 단어를 찾아낼 수 있으면 명료한 글이 된다. 단어가 생각나지 않으면 글쓰기가 지체되고, 같은 단어를 되풀이하게 되며, 문맥에 맞지 않는 단어를 남발하게 된다. 한마디로 글이 허접해진다.

그렇다면 어휘력이란 무엇인가.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 능력이다. 나아가 나의 생각이나 느낌을 표현하고, 사물이나 현상을 묘사할 때 떠올릴 수 있는 단어의 숫자가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이다. 어휘는 낱말뿐만 아니라 숙어, 관용구, 속담, 고사성어도 포함한다. 흔히 어휘와 개념을 혼동한다. 달걀과 계란은 다른 어휘지만, 개념은 같다. 어휘에 비해 개념은 더 본질적이고 추상적이다. 글은 어휘와 개념으로 쓴다. 개념이 내용물이라면, 어휘는 운반수단이다. 개념은 어휘로 표현된다. 이 둘이 갖춰지면 못 쓸 글이 없다.

글쓰기에는 원천기술과 응용기술이 있다. 원천기술이 제대로 갖춰져야 그 토대 위에 응용기술을 잘 구사할 수 있다. 원천기술의 핵심이 어휘력이다. 어휘력은 쓸 수 있는 단어의 숫자다. 집짓기에 비유하면 모래, 시멘트, 벽돌이다. 이것이 글쓰기 기반이다. 응용기술은 문장력, 수사력 같은 것이다. 어휘라는 토대가 튼튼하면 저절로 해결되는 문제다. 그런데 우리는 중·고등학교에서 응용기술만 배웠다. 이제라도 원천기술을 익혀야 한다.

먼저 다양한 어휘를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발전'이란 뜻을 나타내는 유사한 단어를 몇 개나 알고 있는가. 발달, 진전, 진보, 융성, 도약, 성장, 성숙, 번영, 번성, 향상, 약진, 신장, 개화, 흥성 등과 같은 단어 중에 몇 개를 글에 사용하고 있는가. 혹시 발전과 발달만 쓰고 있지는 않은가. 젊은이들을 보면 모든 면에서 우리 세대보다 낫다. 아쉬운 것은 어휘력이다. 그것만은 우리만 못하다. 그들은 '대박'과 '헐', 혹은 '노잼' 아니면 '꿀잼' 두 단어로 세상을 표현한다.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다.

단순히 유의어를 많이 아는 차원에만 국한할 일도 아니다. 자신이 글을 쓰고 일하는 곳을 중심으로 그 분야에 관해 구사할 수 있는 단어가 얼마나 되는지도 중요하다. 철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철학 용어를,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미술 용어를 많이 알아야 하듯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분야의 언어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보자. 내가 아는 어느 분은 정치학에 심취해 있어 그것과 관련한 개념어를 보통 사람의 다섯 배 정도 알고 있다. 그것이 곧 글쓰기 능력이고, 그런 사람은 자기 분야 글쓰기가 쉽다.

모든 단어는 고유의 뉘앙스가 있다

의미와 뉘앙스 차이를 알아야 한다. 모든 단어는 다른 단어로 대체할 수 없는 본연의 의미가 저마다 있다. 그래서 그 단어가 존재한다. 1990년 신입사원 연수, 첫 시간에 인사부장이 '개발과 계발'의 차이를 물었다. 대답을 못하자 '보전과 보존', '부분과 부문', '운영과 운용', '파장과 파문'의 차이를 연달아 물었다. 아무도 자신 있게 답하지 못했다. 그분이 일갈했다. "나는 농고 나온 사람입니다. 여러분 중 대다수는 일류대를 나왔습니다. 부끄러운 줄 아세요."

그분과의 만남 이후 나는 이런 차이에 관심을 갖게 됐다. 강의, 강연, 강좌, 강습, 강론, 강독의 차이는 무엇일까. 유머, 위트, 해학, 기지, 재치, 익살, 풍자, 조크의 차이는? 군중과 대중과 민중은 어떻게 다른가? 초월, 초극, 초탈, 초연의 차이는 무엇일까. 자신감, 자존감, 자긍심, 자존심은? 고민, 고뇌, 고심의 차이는 뭘까. 사전을 찾아보고 스스로 개념도 정립해봤다.

모든 단어는 고유의 뉘앙스가 있다. 부자, 갑부, 거부, 벼락부자, 부호, 백만장자, 자산가는 다른 어감과 미묘한 차이가 있다. 배, 복부, 배때기는 같은 뜻이지만 뉘앙스는 다르다. 이런 차이에 관심을 가지면 두 가지를 얻는다. 하나는 개똥철학이 생긴다. 그래서 단어의 의미와 뉘앙스 차이를 갖고 글을 쓰게 된다. '자존감은 키우고 자존심은 죽여라.', '우리는 왜 부자보다 자산가가 되려고 할까.'

또 다른 하나는, 글 쓸 때 상황에 맞는 단어를 구사하게 된다. 적재적소 단어 쓰기가 수월해진다. 같은 뜻의 단어라도 품격 있다고 인정받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또한 생생하게 느껴지는 단어가 있고 그렇지 않은 단어가 있다. 같은 값이면 품격 있고 생생한 단어를 쓰는 게 좋다. 일반적으로 많이 쓰는 단어가 아니면 더욱 좋다. 

연상해서 떠올릴 수 있는 단어가 많아야 한다. 가을에 관한 글을 쓴다면 단풍, 천고마비, 귀뚜라미, 쓸쓸함, 낙엽, 독서… 여름 하면 휴가, 무더위, 소나기, 바다, 태양, 젊음, 아이스크림… 겨울은 눈, 빙판길, 추위, 잿빛 하늘… 봄에 관한 글을 쓴다면 새싹, 아지랑이, 희망, 새로운 시작 등을 연상할 수 있다. 그러나 처음 떠오른 것으로 쓰면 독창적인 글은 나오지 않는다.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픽사나 월트디즈니에서는 처음 그린 초안은 대부분 버린다고 한다. 그것은 누구나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들도 생각하는 봄나물, 봄나들이, 봄처녀와 같은 단어만이 아니라 자기만의 것이 생각나면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김유정의 단편소설 <봄봄>, 이상화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영화 <봄날은 간다>, 한자성어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등 관련 연상이 많이 되면 그만큼 내용이 풍부해진다. 그것을 늘리는 게 관건이다.​

영어 단어 10분의 1만이라도 정성 들이자

어휘력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휘력을 높이겠다는 각성이 먼저다. 영어 단어 외듯이, 아니 그 10분의 1만이라도 정성을 들이자. 영어 단어 모르는 것은 부끄러워하면서 우리말 뜻을 헷갈리는 것에는 무덤덤하다. 창피하기는커녕 당당하기까지 하다. 어휘력이 향상될 턱이 없다.

둘째, 글을 읽을 때 단어를 유념해 보는 것이다. 나는 독서를 많이 하지 못했다. 글 쓰다 보면 어휘력의 한계를 절감한다. 그래서 하는 일이 글을 읽을 때 단어를 눈여겨보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단어보다 내용에 주목한다. 나는 칼럼 하나를 읽으면 색다른 단어 3개 정도는 챙긴다. 챙긴다는 뜻은 기억해둔다는 의미다. 나도 언젠가 써먹어야지 생각한다. 소설을 읽다가 평소 내가 쓰지 않는 멋스런 단어가 있으면 국어사전을 찾아본다. 단어의 뜻과 예문, 비슷한 말, 반대말을 친절하게 알려준다. 그 단어가 들어간 속담과 격언까지 나오는 경우도 있다. 새로운 단어와 친해지는 기쁨과 글감을 얻는다.

셋째, 글을 쓸 때 국어사전을 가까이한다. 대통령이나 회장의 글을 쓸 때 두 가지 일을 했다. 그 하나는 수정한 단어의 이력을 관리하는 것이다. 내가 '발전'이라고 썼는데 '진보'라고 고쳤으면 다음번 그 문맥에서는 '진보'란 단어를 써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내가 모르는 더 좋은 단어가 있는지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는 것이다. 나보다 어휘력이 풍부한 그분들이 덜 고치게 하기 위해서는 국어사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면 충분했다.

글을 쓰다가 '참여'란 단어를 써야 할 일이 생기면, 곧장 쓰지 말고 사전을 찾아보자. 비슷한 뜻의 다른 단어가 보일 것이다. 개입, 참가, 출석, 참견, 간섭, 참석이란 단어다. 이 가운데 '참여'보다 문맥에 더 잘 어울리는 단어가 있다.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진 않아도 단어를 보면 고를 수는 있다. 그 단어를 쓰면 글이 좋아진다. 같은 단어의 반복을 피하기 위해서도 유용하다. 같은 단어를 반복하지만 않아도 좋은 글이 된다.

A4 용지 한 장 정도 글을 쓰면 적어도 세 단어는 국어사전을 찾아보라. 더 어울리는 단어가 있다. 평소 안 쓰던 단어가 눈에 띈다. 이런 단어로 수정해보라. 짜릿하다. 안 쓰던 근육을 쓰는 것 같은 뻐근함을 느낀다. 새로운 어휘력 근육이 생기는 것이다.

넷째, 자기만의 단어장을 만들어보자. 직장인이라면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에서 자주 쓰는 단어를 30개 정도 정리해보자. 직장마다 반드시 알아야 하고 반복해서 쓰게 되는 핵심 개념어가 있다. 포털사이트마다 개념 정의 사전이 있다. 그것을 참고해보라. 보고서나 기획안 쓰는 일이 덜 힘들어진다. 자신만의 뜻으로 단어를 정의해보는 것도 좋다. 단어의 본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체험에서 나온 의미로 규정해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결혼'은 청춘의 무덤이다?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하는 것이다? 종족 번식을 위한 사회적 의무이다? 등등.

평소 이런 정리를 많이 해놓으면 글 쓸 때 활용할 수 있다. 또한, 어느 단어 하면 떠오르는 연관 단어를 최대한 끌어모아 차곡차곡 정리해두자. 지금 당장 '여행', '독서' 하면 떠오르는 단어를 써보자. 이런 단어 채집 놀이를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어휘력이 일취월장한다.

다섯째, 단어의 어원에 관심을 가져보자. 나는 도서관에 가면 사전 코너를 즐겨 찾는다. <어원사전>도 있고, <순우리말사전>, <의성어·의태어사전>도 있다. '을씨년스럽다', '터무니', '너스레', '산통', '도무지', '야단법석' 모두 재밌는 어원이 있다. 알고 나면 신기하다. 단어마다 얽혀 있는 이야기​를 찾아보자. 그와 관련된 전설, 신화 등 별의별 얘기가 많다. 예를 들어 하늘과 관련된 단어인 우주, 무지개, 은하수, 구름 같은 몇몇 단어를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해보자. 나중에 글 쓰는 데 요긴한 소재가 된다. 굳이 외울 필요는 없다. 그런 것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어도 된다. 필요할 때 검색하면 된다. 

​여섯째, 키워드 중심으로 글을 써보는 것도 방법이다. 글쓰기를 시작할 때 개요를 작성하지 않고, 그 글에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핵심 단어 3~4개를 써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단어를 넣어서 문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문장을 기반으로 글을 쓴다. 자기소개서를 쓴다면 나를 표현하는 데 필요한 단어 5개를 먼저 꼽아보면 수월하게 쓸 수 있다.

모든 게 국어사전에 있다

어휘와 생각은 긴밀한 관계 속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우리나라 사람은 무지개색을 '빨주노초파남보'로, 미국인은 남색을 제외한 여섯 가지 색으로, 멕시코 원주민 '흑백적황청'의 다섯 가지 색으로 표현한다. 이런 어휘 사용으로 인해 한국인은 무지개 색깔이 일곱 가지라고 생각하고, 미국인은 여섯 가지라고 생각하며, 멕시코 원주민은 다섯 가지라고 생각한다. 어휘가 생각을 지배하고 생각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풍부한 어휘력은 악용되기도 한다. 조지 오웰(George Orwell)은 '더블 스피크(double speak)'를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더블 스피크는 사실을 호도하기 위해 쓰는 모호한 표현을 일컫는다. 예를 들어, '해고'를 '전직 기회 제공'이나 '비자발적 고용계약 해제', '인력구조 혁신' 등으로 쓰는 것이다. 미국 부시 정부에서 부자 감세 정책을 내놓으면서, 가난한 사람의 반발을 의식하여 '세금 구제 정책'이라고 명명한 것도 비슷한 경우다. 세금을 구제해주겠다고 하니 '슈퍼맨'이 떠오르고 왠지 구세주 같은 느낌이 든다.

'노동 유연성'이란 말도 같은 맥락이다. 유연성은 얼마나 부드럽고 따뜻한 말인가. 그러나 좀 거칠게 말하면 '해고를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 아닌가. '비정규직'을 '시간선택제'로, 아파트나 오피스텔 '미분양분'을 '회사 보유분'으로, '주차시설 없음'을 '자율주차'로 표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휘는 생각을 들여다보는 창과 같다. 더욱 뚜렷하게 해주거나 흐릿하게 한다. 어휘를 잘 써야 한다. 의미를 왜곡해선 안 된다. 

우리말은 어휘가 풍부하다. 이는 축복이자 재앙이다. 어휘력이 풍부한 사람에게는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첨단무기가 되지만, 어휘력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글쓰기를 힘들게 하는 요인이다. 그러나 무엇이 걱정인가. 조정래 선생처럼 더 맞는 단어를 찾아 고치면 된다. 마크 트웨인같이 반딧불이 아닌 번갯불 단어를 찾아 쓰면 된다. 귀스타브 플로베르처럼 그 자리에 딱 맞는, 하나뿐인 단어를 쓰면 된다. 그 모든 게 국어사전에 있다. 국어사전을 열어놓고 글을 쓰는 순간 나는 김훈 작가보다 어휘력이 풍부한 사람이 된다.
덧붙이는 글 필자 강원국은 청와대 연설비서관을 역임했으며 2014년 <대통령의 글쓰기> <회장님의 글쓰기>를 출간한 이후 글쓰기 관련 강연과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강원국의 글쓰기'는 3월 26일부터 매주 월·수·금 <오마이뉴스>에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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