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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는 아이들, 장애인 그리고 반려견의 천국이다."

캐나다 밴쿠버에 살기 시작하면서 종종 들어온 말이다. 처음엔 '빈말'이겠거니 생각했지만, 이곳에서 아이와 반려견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이 말이 진실임을 실감하고 있다. '천국'까지는 아니지만, 아이들과 반려견들이 많은 배려를 받고 환영받으면서 지내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장애인의 천국'이라는 건 왜곡된 것이리라 여겼었다. 이런 표현은 장애를 갖지 않은 사람들의 시각에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장애가 있거나 장애가 있는 사람의 가족이라면 쉽게 '천국'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계 자폐증 인식의 날’인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와대 연무관 앞에서 장애 자녀를 둔 부모들이 발달장애인 국가책임제 도입을 촉구하며 삭발을 하고 있다.
▲ 장애인부모 200여명 눈물의 삭발식 “국가가 발달장애인 지원하라” ‘세계 자폐증 인식의 날’인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와대 연무관 앞에서 장애 자녀를 둔 부모들이 발달장애인 국가책임제 도입을 촉구하며 삭발을 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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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자폐인의 날이었던 지난 4월 2일, 한국의 발달장애인 부모들은 '장애를 가진 자녀보다 하루 늦게 세상을 떠나는 것'이 소원이라며 정부에게 성인 발달장애인들을 위한 정책 수립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런 상황에 익숙해져 있는 나는 아무리 복지정책이 잘 되어 있고, 인도주의적이며, 평등을 중시하는 캐나다라 해도 장애인과 그 가족들에게 '천국'이라는 말은 타당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전 성인이 된 발달장애 아들을 둔 한 캐나다 이웃을 알게 됐다. 아들이 어렸을 때 발달장애가 있음을 알게 된 후 이곳으로 이민을 왔다는 그는 아들이 장애가 있었지만 늘 밝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내게 진짜로 이렇게 말했다. "이곳은 장애인들의 천국이 맞다. 장애가 있는 자녀의 부모로 산다는 게 쉽진 않지만, 내가 죽은 후에도 내 아들이 보살핌을 받으면서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두렵지는 않다"라고 말이다.

도대체 무엇이 장애를 가진 자녀를 둔 부모의 시각에서도 이곳을 '살기 좋은 곳'이라고 느끼게 했을까? 한국에선 복지 사각지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성인 장애인과 그 가족들이 이곳에선 어떤 지원을 받고 있길래 천국이라고 느끼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캐나다의 장애인 지원 정책을 필자가 거주하고 있는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 위주로 취재해보았다. 캐나다의 복지정책은 큰 윤곽은 비슷하지만, 주 정부 단위로 운영되고 있어서 주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우선, 이곳의 장애인 지원정책은 18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고등학교 시기까지 해당하는 18세까지의 지원은 아동 가족 개발부(The Ministry of Children and Family Development, MCFD)에서 담당한다.

주 정부에서는 자녀가 자폐를 비롯한 각종 장애로 진단을 받을 경우,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취학 전부터 가정에 파견해 가정과 학교, 특수교육 시설 등과 연계한 개별 맞춤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펀드를 통해 모집한 금액을 각 가정에 장애아동의 특수교육비로 지급하며, 이 금액은 오직 아이의 교육에만 사용할 수 있다.

취학 시기에는 1:1 특수교사의 도움을 받으면서 장애가 없는 아이들과 함께 일반 공립학교에 다닌다. 때문에 장애아동들은 자신의 특성에 맞는 적절한 교육과 치료를 받을 수 있고, 장애가 없는 아이들은 이들을 자연스럽게 이웃으로 받아들인다.

장애아동이 만 14세가 되면 '전환기 계획' 수립에 들어간다. 전환기 계획은 장애인이 18세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사회에 적응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성인기의 교육과 취업, 주거생활 지원 등 다방면의 생활을 미리 설계하는 것이다.

전환기 계획을 세울 때는 장애인인 당사자의 의사를 존중하는 '당사자 중심계획(Person-Centered Planning)'을 세우도록 권장하고 있다. 즉, 장애인이라 해도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향과 목표, 의지 등이 있으므로 이를 최우선으로 고려해 성인기 인생 계획을 짜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현실적인 의사결정이 힘들 수 있으므로, 이 계획수립에는 부모와 교사, 지역사회의 복지사가 함께해 실현 가능한 다양한 방법들을 모색한다.

생애주기에 맞춰 설계된 캐나다 장애인 복지정책

캐나다의 한 대형매장에 비치된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한 카트. 걷거나 무거운 것을 들기 힘들거나 몸이 불편한 사람들도 스스로 장을 보고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캐나다의 한 대형매장에 비치된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한 카트. 걷거나 무거운 것을 들기 힘들거나 몸이 불편한 사람들도 스스로 장을 보고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 송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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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장애자녀가 만 18세가 되면 기존의 받았던 아동 청소년 대상의 서비스는 종료되고  CLBC(Community Living BC)로 전환, 성인 장애인을 위한 서비스를 받게 된다. CLBC에서는 성인기 독립적인 생활 여부, 의사결정 가능 여부 등을 평가해, 다양한 지원정책을 펼친다.

특히, 부모가 늘 함께해 줄 수 없을 때를 대비해 다양한 주거 관련 서비스를 제공한다. 독립생활이 가능한 경우엔 각 가정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공동주거를 제공한다. 장애인들의 공동주거란, 성인이 된 장애인들이 가정에서 독립해 돌보아 주는 사람과 함께 살거나, 그룹으로 거주하면서 전문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생활하는 형태이다.

성인기의 생활비 등은 장애인 본인의 수입 정도에 따라 차등적으로 지원된다. 또한, RDSP(Registered Disability Saving Plan)를 통해 장애인의 노후 생활비까지 마련 가능하다. 장애인 전용저축은 아동기 때부터 가입이 가능하고, 향후 성인이 된 장애인 본인의 삶을 위해서 사용이 가능하다. 성인기 장애인이 취업을 원하거나 대학교육을 원하면 전담부서에서 함께 일자리를 찾고 면접에 동행해주기도 하며, 기술교육을 지원하는 것은 물론이다.

때문에 이곳의 장애자녀를 둔 부모들은 '아이보다 하루 더 살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정부의 지원정책을 숙지하고, 적절한 시기에 신청하며, 자녀의 성인기를 위해 저축을 하면서 미래에 대비한다. 또한, 미리 유언장을 써두고 대리인을 지정해 성인기 자녀의 의사결정을 돕는 등 현실적인 계획을 세운다.

뿐만 아니다. 주 정부는 장애인 본인 외에도 장애자녀를 둔 가족의 삶도 돌본다. 아무리 정부 서비스가 좋아도, 장애자녀를 둔 부모는 장애자녀를 돌보는 데 보통의 부모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이곳 주 정부에서는 매달 장애자녀의 부모가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일정 금액을 지원한다. 이 지원금으로는 장애자녀를 돌보는 사람을 고용하거나, 캠프 등에 보내는 목적으로만 사용할 수 있다. 그 시간 동안 부모는 자신을 위한 여가를 가지고 회복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성인기 자폐아들을 둔 내 이웃 역시, 아들이 자폐인들을 위한 캠프에 참여한 사이 커뮤니티 센터의 워크숍에 참여해 자신을 위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이곳에서 우리의 만남도 이뤄졌다.

나는 이 조사를 마친 뒤 새로 사귄 이웃에게 다시 물었다. "이 서비스들을 정말로 이용하느냐"고. 그러자 그는 답했다. "서비스들의 종류가 많아 적절한 것을 찾지 못하기도 하고, 예산 편성에 따라 지원이 달라질 때도 있어 항상 만족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이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서비스들을 이용할 수 있도록 서류작성, 신청절차 등을 도와주는 비영리 민간단체들도 많이 있다"고 말이다. 확인을 하고서야 인정할 수 있었다. 모두가 100% 만족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이곳이 장애인의 천국'이라는 말이 터무니없는 과장은 아님을.

장애인도, 장애인의 가족도 어려움 속에서도 그래도 '살아볼 만한 세상'이라고 느낄 수 있는 사회.
 장애인도, 장애인의 가족도 어려움 속에서도 그래도 '살아볼 만한 세상'이라고 느낄 수 있는 사회.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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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이다. 소수자에 대한 평등 개념조차 잘 수립되어 있지 않은 한국에서 이와 같은 복지체계가 수립되려면 아마도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부모가 자녀가 자신보다 오래 사는 것에 대해 걱정하는 극단적인 상황만큼은 시급히 개선해야 하지 않을까.

장애인도, 장애인의 가족도 어려움 속에서도 그래도 '살아볼 만한 세상'이라고 느낄 수 있는 사회. 이번 장애인의 날에는 이런 사회를 만들 방법을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에도 실을 예정입니다.



태그:#장애인, #인권, #평등, #캐나다, #복지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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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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