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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하여 시대를 대표하는 그림이나 작가, 지역을 대표하는 작가, 작가를 대표하는 그림, 화풍을 대표하는 작가나 그림이라는 것이 있다.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이기도 하듯이, 한 시대의 대표작이자 그 작가의 대표작이다.

마찬가지로 바로크 시대의 루벤스, 르네상스 시대 북부 유럽의 얀 반 에이크, 고흐의 해바라기, 큐비즘 화가 피카소, 인상주의 모네의 수련시리즈 등은 교과서에 등장할 법한 말 그대로 기념비적인 그림과 작가들이다.

하지만 그림을 좋아하지 않거나 미술관에 거의 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도 알 만한 이러한 기념비적인 그림과 작가를 아는 것만으로 그림을 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그림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도 위에 나열된 그림과 작가들을 단편적인 지식으로만 알고 있거나 또는 전후맥락이나 배경, 작가의 전작 등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물론 그림에서 좋은 감정을 느끼고 평소 미술관을 자주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이 여러 그림 중에서도 특히 마음을 끄는 몇 개의 그림들에 집중하여 그 그림들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질 수 있다. 그러다가 작가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고 그 다음 비슷한 화풍의 작가들에게도 관심을 갖게 되는 등 점점 더 그림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심화되는 동시에 확장되는 사례가 있다.

만약 그림이 감상의 대상으로만 끝난다면 이러한 접근 방식이 전혀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실제로 그림을 다룬 많은 책들이 이러한 식으로 쓰여졌고 그 책들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그림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깊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림을 '감상'의 대상으로만 접하는 것

하지만 그림을 감상의 대상으로만 접하는 것은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아깝다
 하지만 그림을 감상의 대상으로만 접하는 것은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아깝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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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림을 감상의 대상으로만 접하는 것은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아깝다. 선사시대부터 이어져온 그림이라는 것은 텍스트이자 동시에 상징이며 시간을 견디어내고 살아남아 우리의 과거를 알려주는 소중한 유산이다.

또한 이러한 유산이 과거를 알려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다음 세대, 다른 지역은 물론 현재의 작가들에게까지 영감을 주어 그림의 형태가 계승, 변형, 발전되도록 이끈 동력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현재의 어떠한 그림도 과거와 연결되지 않은 것은 없으며 어떠한 맥락이나 이미 존재하는 것들로부터의 영감 없이 무에서부터 시작된 것은 없다. 아주 작고 미미한 부분이라 하더라고 이전의 그림으로부터 실마리를 찾거나 반대로 천편일률적인 방식에 거부하여 새로운 것을 시도하거나 원형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시도들은 모두 이전의 것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또한 이전의 것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처럼 보이는 것조차도 시대적 맥락이나 분위기라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그림 외적인 것으로부터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

특히, 근현대에 이르러 그림의 흐름이 일직선이 아닌 다선형을 띠게 된 것도 불확실성과 불안으로 특징되는 시대적 분위기와 상관이 있는 동시에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그림의 역사가 누적되면서 참고할 수 있는 자원이 풍부해진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지역적인 특징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다. 르네상스 시대는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꽃을 피우기는 했지만 르네상스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은 지역에 따라 차별화된 특성을 띠며 발전했듯이 말이다.

이렇듯 그림은 하나의 작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 사회적, 지역적 맥락에서의 전체적인 조망이 함께 어우러져야만 그림은 보는 것이 아닌 아는 것이 될 수 있다. 흔히 미술사학자들의 그림 관련 책이나 백과사전 식의 그림 관련 책들이 이에 해당되는 것이다.

미술사학자들은 그림과 관련된 역사적, 사회적, 지역적 맥락과 더불어 그림의 특징, 기교에 전문적 지식이 있기 때문에 그림만 보고도 어느 시대 누구의 그림인지를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미술과 관련된 인류학적인 접근 방식으로 미술을 통해 인간의 삶이나 사회에 대한 이해를 도울 뿐 아니라 미술에 대한 양식적, 이념적 차원의 학문적 연구를 통해 그림이 지닌 미술적, 미술사적 의미와 중요성을 동시에 다룬다.

기존의 연구 자료들에 토대를 두고 그림에 대해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지만 역시나 개인의 의견에서 비롯된 판단이 가미된 경우가 많아 이에 대한 찬성과 반대가 있을 수 있고, 따라서 미술사학자의 수만큼이나 서로 다른 내용의 다양한 미술사가 존재할 수 있다.

반면 백과사전 식의 그림 관련 책들은 그림을 역사의 한 부분으로 인식함으로써 그림과 어우러진 시대적인 배경이나 역사적 사건 등에 대한 지식을 동반하여 그림의 흐름을 훑어간다. 이러한 책은 미술사학자들이 그림 관련 책을 쓰기 위한 참고자료로서의 역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객관적인 자료들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림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심오하면서도 중의적이고 자의적인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이러한 책들이 담고 있는 그림에 대한 해석이 100% 정확하다거나 완결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미술사학적 자료나 백과사전적 자료는 다양하게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그림에 대한 이해와 생각이 풍부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림에 대한 이해와 생각이 풍부해질수록 그림과 그림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정의 관계든, 반의 관계든, 합을 이루든 그림은 하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존재한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예술품으로부터 영감을 이어받아 르네상스가 발전하였고 중세 시대의 정형화된 그림에 도전하여 르네상스가 나타났으며 고대 인간의 형태에 대한 사실적인 표현과 중세의 그림 주제를 접목하여 사실적이면서 환상적인 르네상스의 성화가 그려질 수 있었던 것이다.

'흐름'으로서의 그림

그림 사이의 연결에 대한 이해는 때때로 시대적 변화의 연결자로서 선구자적인 역할을 수행한 작가들의 그림이 생전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후세에 의해 심오한 의미가 재조명되는 사례들을 잘 설명해준다. 예를 들어 세잔의 그림은 인상주의와 입체파의 연결고리로서 당대에나 후세에나 센세이션을 일으킨(당시에는 비웃음을 당했지만 후세에 의해서는 열광적으로 사랑을 받았다) 인상주의에 대한 반응이자 확장의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인상주의의 색채에 대한 제한된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형태와 구도 등 그림의 보다 근본적인 문제들에 끈질기게 열중한 관계로 그림 자체의 강렬함은 없는 편이었다. 이는 생전에 그의 그림이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지만 그림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연구는 피카소의 입체파가 탄생하는 토대가 되었다.

그림은 완성된 자체로서가 아니라 과정으로서 존재한다. 그림이 탄생하기까지의 작가적 과정과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존재, 그림이 가지고 있는 기능과 의미는 선명하지도 단순하지도 않다. 의뢰인의 주문으로 시작된 그림이라 하더라도 작가는 수많은 선택의 과정을 거치고 그것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도 수많은 가능성이 존재한다. 작가의 자의에 따라 그려진 그림 또한 작가의 재능 및 시장의 요구 등 조건이 주어지는 것은 무시할 수 없으나 작가의 재량이 보다 많아짐과 동시에 선택의 폭도 훨씬 넓어지게 된다.

선택의 과정으로서의 그림에 대한 이해는 과거의 그림에 대한 몰이해와 오해를 불식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미술사학자 곰브리치는 고대 이집트의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인 인간 형태의 표현이나 중세 비잔틴 시대의 평면적이고 전형적인 모습이 미술적인 기교의 부족에서가 아니라 주제 및 목적에 부합한 선택적 그림 그리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한다.

그림은 흐름이다. 흔히 미술사 서적은 선사시대부터 고대, 중세, 르네상스, 근대, 현대에 이르는 시간적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천편일률적인 것이나 한편으로는 거스를 수 없는 진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제목이야 '천재 작가들의 1000개의 그림', '세상을 바꾼 예술', '예술은 어떻게 세상을 바꾸었나' '예술 이야기' 등으로 다양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예시된 그림들도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흐름으로서의 그림을 설명하기 위해 시간적인 흐름에 따른 구성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역사로서의 그림을 이해하는 데 시간적 구성보다 더 적절한 것이 있겠는가.

이러한 맥락에서 그림은 함께 보는 것이다. 하지만 기존의 방식처럼 시대적 흐름에 따른 단순한 나열 구조는 그림과 그림을 연결하기 보다는 그림과 그림을 구분하는 것에 더 적절했다. 이러한 구조를 뛰어넘어 특정한 그림을 나란히 보면서 '그림 vs 그림'으로 시대를 연결하거나 또는 시대를 넘나들며 그림과 그림을 함께 봄으로써 비로소 그림은 서로를 채우주며 완성되는 것이고 그림에 대한 우리의 앎도 깊어지게 된다.

'그림 vs 그림'의 시각은 흐름으로서의 그림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구도로 사용될 수 있다. 아니 어쩌면 그림의 흐름이 단지 바로 이전 시대로부터의 영향에만 국한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건대 시대를 건너뛴 '그림 대 그림'의 함께 보기는 단선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른 설명보다 훨씬 더 강력해 보인다. 또한 동시대에 등장한 그림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동일하지 않으므로 같은 시대, 다른 공간 또는 같은 시대, 다른 작가 심지어 같은 작가, 다른 작품을 함께 보는 것 또한 그림에 대한 소중한 수확을 안겨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태그:#그림, #예술, #화가,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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