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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개인의 아토피 치료기로, 일반화 할 수 없는 사례임을 밝힙니다 [편집자말]
전주에서 취업 준비를 하던 시절. 무심하게 인터넷 뉴스 기사를 둘러보다가 한 20대 여성이 중증의 아토피를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사를 접했다. 크게 동요하지 않았던 것은 내가 그녀의 심정을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은 더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 당신도 나처럼 많이 힘들었구나… 자세한 속사정을 모르니 당신의 처절한 선택에 대해 왜 함부로 귀중한 목숨을 버렸느냐고 인륜적인 잣대를 들어 섣불리 타박할 수는 없겠지…'

나 역시 과연 이 몸뚱이로 남들처럼 제 밥벌이를 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출구 없는 막막한 두려움을 느끼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녀의 선택은 슬프고 안타깝지만 어쩌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을 법한 일로 여겨졌다.

그래, 당신도 나처럼 힘들었겠구나

 나는 어려서부터 아토피가 심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아토피가 심했다
ⓒ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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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려서부터 아토피가 심했다. 유아 아토피를 제대로 치료, 관리하지 못해 성인 아토피로 진행된 케이스로 30년이 넘도록 양약(항히스타민제/스테로이드제)과 피부연고를 달고 살았다.

20대 중반에 갑작스럽게 악화되어 결국 양안 모두 백내장 수술을 받아야만 했던 것도 아마 오랜 기간에 걸쳐 사용한 스테로이드 연고로 인해 아토피성 백내장이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던 탓인 듯하다.

어머니는 어린 딸의 머리를 곱게 길러 양 갈래 머리도 땋아주고, 한데 모아 정수리에 틀어 올려 당고 머리에 예쁜 리본을 달아주고도 싶었지만, 시도 때도 없이 "가려워~가려워~"를 연발하며 머리를 벅벅 긁어대는 통에 계집애 머리를 사내 녀석 마냥 항상 짧게 잘라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피부과 진찰 결과 '아토피'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의사 선생님은 아이가 좀 더 자라서 면역 체계가 튼튼해지면 증상이 호전될 것이라며 하얀 알루미늄 튜브에 든 반투명한 연고를 처방해 주었다.

8살이 되어 한국에서 살기 시작한 후에도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피부과 선생님들은 사전에 공모라도 한 듯 하나같이 입을 모아 세월이 약이겠지요, 라며 내복 약과 연고를 처방해 주었지만 세월은 약이 되지 못했고 결국 성인 아토피로 진행되었다. 

나는 얼굴과 전신에 걸쳐 아토피 증상이 심한 편이었는데 팔과 무릎이 접히는 부분은 항상 붉게 염증이 올라왔고 극심한 가려움을 참지 못해 피가 맺히도록 긁어대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얼굴은 특히 눈가를 위주로 증상이 심했고 귓불은 찢어져 노랗게 진물이 맺히기도 했다.
손등과 손가락도 예외는 없어서 2차 감염으로 고름이 잡혀 손톱이 빠져버리는 일도 있었다.

아토피라는 용어의 어원인 Atopos(아토포스) 자체가 그리스어로 "알 수 없는", "기괴한"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라고 하니 원인도 치료법도 명확하지 않은 이 질환은 참으로 고약스럽기 짝이 없었다. 

어머니와 나는 이 아토피라는 놈을 물리치기 위해 이것저것 안 해 본 게 없었다. 알로에, 홍삼, 스피룰리나, 달맞이꽃 종자유를 비롯 수많은 건강식품 보조제를 섭렵하고, 라면이나 배달음식은 1년에 한두 번 먹을까 말까 야채 위주의 건강한 집밥을 먹고 자랐다.

비싸디 비싼 아토피 전용 세안제와 보습제도 브랜드 별로 줄을 세워 사용해 봤건만 그런 우리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면 갑자기 눈가에 염증이 벌겋게 올라와 있거나 밤새 나도 모르게 긁어서 생긴 상처로 침대 시트에 피가 묻어 있고는 했다.

한때 심각한 부작용을 야기할 수 있는 스테로이드 연고의 대안으로 떠오른 면역억제제 연고도 사용해 봤지만, 나에게는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이러한 면역억제제 역시 남용할 경우 피부암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면서 나를 포함한 아토피 환자들은 "안심하고 사용하세요"라는 의사의 말에 배신감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가족의 마음까지 갉아먹는 질환

아토피는 당사자인 환자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마음까지 서서히 갉아먹는다는 점에서 무섭도록 잔인한 질환이다.

원인도 모른 채 어느 날 불쑥 악화되어 무엇을 어떻게 해도 호전되지 않는 증세에 속을 끓이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어느 정도 호전이 되는가 싶더니 또다시 악화되기를 무한 반복한다. 이런 과정에서 대부분의 환자와 가족들이 치료비로 인한 경제적인 문제를 포함하여 신체적 고통보다 더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린다.

어머니는 곱디곱게 자라야 할 제 자식이 아토피로 고생하는 것이 전부 자기 탓인 것 같다며 괴로워하셨다.

일본에 시집을 가자마자 낯선 환경에 적응할 겨를도 없이 나를 가졌기 때문에 임신 기간 동안 타지에서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한 데다, 그 시절의 극심한 스트레스와 심리적 불안이 고스란히 뱃속에 있던 딸에게 전달되었을 거라는 것이었다.

길을 가다 깨끗하고 윤기나는 건강한 피부를 가진 또래 여학생들이 까르륵 웃으며 지나가는 것을 볼 때면 매일같이 붉은 염증과 허연 각질, 미칠 듯한 가려움으로 고통받는 딸이 떠올라 어머니의 마음에도 생채기가 깊이 패었다. 

혹자는 아토피는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다독이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단기간에 치료한다는 욕심은 버리고 평생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는 이 질환을 껴안고 살아야 한다고.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위로가 되지도 않았다.

피부과 치료다, 한방 치료다, 대안 의학이다 한참을 발버둥 치다 지칠 대로 지친 끝에 어머니와 나는 아토피와 타협하기로 했다. 손쉽고 효과 빠른 피부과 치료에 한 표를 던진 것이다. 평생 스테로이드와 항히스타민제, 등급 별 스테로이드 연고를 피부과 전문의의 표현을 빌리자면 '적절하게' 사용하여 증상을 관리하는 방법을 택했다.

산 좋고 물 좋은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지 않는 한, 사회생활을 하면서 아토피와 공존하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어 보였다. 때가 되면 피부과를 찾아 한 달 치 내복 약과 연고를 처방 받았다. 해외에서 근무하던 시절에도 나의 짐가방 안에는 출국 전에 미리 처방받은 약봉지와 연고가 한가득이었다. 

아토피에 반항하기로 하다

 어머니와 나는 이 아토피라는 놈을 물리치기 위해 이것저것 안 해 본 게 없었다
 어머니와 나는 이 아토피라는 놈을 물리치기 위해 이것저것 안 해 본 게 없었다
ⓒ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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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약과 연고를 중단하고 아토피에 반항해 보기로 결심한 것은 인도네시아에서 주재원 근무를 하던 무더운 어느 날이었다. 물론 자발적으로 결심한 것은 아니었다. 나 역시 만성적인 아토피 환자들이 겪게 되는, 피부과 약으로도 호전이 되지 않는 상황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동남아시아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신의 선물이라는 기묘하게 생긴 열매 노니(Noni). 같은 공장에 근무하는 실장님이 권해주신,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그 구역질 나는 독특한 냄새의 만병통치약을 코를 틀어막고 마시고 발라봐도 차도가 없었다.

인도네시아의 연중 뜨거운 기후, 열악한 위생 상태, 최소한 양치만큼은 생수로 하라는 조언을 들을 만큼 석회질이 많은 희뿌연 수돗물은 누가 보더라도 아토피 환자에게 적합한 환경은 아니었다.

게다가 객관적으로 보아도 타 부서에 비해 높은 업무 강도와 극심한 스트레스까지 더해지면서 내 평생에 처음으로 40Kg 대의 마른 몸매를 갖게 되었다. 몸과 마음이 지친만큼 아토피는 기승을 부렸고 마침내 양약과 연고로는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주재 근무를 포기하고 건강 상의 이유를 들어 본사 복귀를 신청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내가 손을 놓으면 이곳의 모든 일들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만 같은 근거 없는 강박감이 성실한 직장인의 미덕이라고 착각했던 나는 앞으로 1년 정도만 더 버티면 약속한 3년을 채울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스스로를 타이른 다음, 차선책으로 한의원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내가 근무하던 공장(Purwakarta, Subang)에서 자카르타에 있는 한의원까지는 자동차로 2시간이 넘는 먼 거리를 오가야 했지만 나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한의사 선생님은 말없이 내 상태를 눈으로 훑더니 나의 아토피 이력을 듣고는, 나를 진료용 간이침대에 눕히고 내 몸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촉진까지 마친 그가 내린 진단은 척추 측만으로 인해 골반이 틀어져 전체적인 기혈 순환에 어려움이 있는 데다가, 오랜 기간 양약을 복용한 탓에 소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거의 죽은 상태나 다름이 없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사람은 잘 먹고 잘 싸야 건강할 수 있는데 지금 내 몸은 뭘 먹어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고 소화 과정에서 발생한 찌꺼기(대변)도 제대로 배설하지 못하는 바람에 그 독소를 오롯이 피부로만 배출하느라 이 지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죽은 소장을 살리는 것이 곧 치료 방법이므로 꾸준히 한약을 복용하고 침 치료도 병행하는 것이 좋겠다는 소견이었다. 

아토피는 그 원인과 치료법이 명확하지 않은 난치성 질환이니 증상에 따라 적절하게 스테로이드와 항히스타민제를 사용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희망 없는 설명보다는 마음에 들었다.

정말이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방 치료를 시작했고 주재 근무를 마치고 본사로 복귀할 때까지 약 1년 가까운 기간 동안 수십 제의 한약을 먹고 주말이면 한의원을 찾아 침 치료도 병행했다. 

명현 현상은 심각하다 못해 처참했다. 한방 치료를 시작하면 필수적으로 명현 현상을 겪게 된다는 것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온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질 줄은 몰랐더랬다.

한약을 먹기 시작한 지 2~3일 정도 지나자 얼굴에 염증이 붉게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곧 전신으로 퍼져 진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퉁퉁 부었다가 가라앉기를 수차례 반복했고, 통증을 동반하는 자잘한 좁쌀 같은 물집이 잔뜩 잡혀 터지고 딱지가 앉으며 사그라드는 과정도 겪었다.

엉덩이 아래쪽은 진물이 심하게 흘러 임시방편으로 손수건을 동여매도 진물이 청바지 밖으로 배어 나왔고, 손등과 손가락은 마디마디 찢어지고 갈라져 피가 맺히는 통에 젓가락질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중도에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것 외에 달리 선택할 방법이 없다는 절박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양약을 먹어도 증세가 호전되지 않는 경험을 한 이상, 상황에 따라 양약과 연고를 적절히 사용한다는 피부과 전문의의 지침은 나에게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한방 치료를 중단하고 다시 스테로이드제를 복용한다고 하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양약으로 제어할 수 없는 상태가 올 것이라는 치 떨리는 공포가 나로 하여금 한방 치료에 매달리게 만들었다.

비록 처참한 몰골로 변하기는 했으나 가만히 내 몸의 변화에 주의를 기울여 보니, 이전에 비해 확실히 배변 활동이 원활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배변 양과 횟수가 늘었다. 한의사는 그것이 바로 소장과 대장이 살아나고 있다는 증거라며 자신의 처방에 대해 힘을 실었다.

또한 내 몸에서 유일하게 아토피가 없었던 부분이 발등이었는데 신기하게도 한방 치료를 하는 동안 발등만큼은 뽀얗고 깨끗했다. 이 역시 발등은 스테로이드의 공격을 받지 않았으니 명현 반응이 일어날 리가 없다며, 내가 발등이 어여쁜 좀비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참혹하게도 이런 상태가 본사로 복귀할 때까지도 지속되었다. 한의사 선생님도 이제는 약도 쓸 만큼 다 썼다고 할 정도로 장기간 치료를 지속했지만 본사에 복귀하기 직전 내 상태는 30여 년 아토피 인생에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아토피가 나에게 남긴 것들

2015년 3년간의 주재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면서 자연히 한방 치료도 끝이 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몸에 긍정적인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양약을 먹거나 연고를 바르지도 않았는데 하루가 다르게 증상이 호전되어 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붓기와 열감이 사라지고 염증이 가라앉으면서 하얗게 각질이 덮였다가 떨어져 나가기를 여러 번. 한 달 정도 지났을 무렵에는 사무실 직원들 모두 내 피부가 좋아졌다며 아직 젊어서 회복력이 좋은가 보다고 입을 모았다.

몇 달 후 출장으로 인도네시아 공장을 찾았을 때 귀국 직전의 내 몰골을 기억하는 동료들은 하나같이 역시 서울 물이 좋다며 너는 평생 한국에서 살아야지 인도네시아 근처에는 오지도 말라며 나의 환골탈태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거의 3년 동안 나는 양약과 피부 연고 없이 잘 지내고 있다. 화장대 서랍 한켠에 약봉지와 연고가 사라지고 내 인생이 훨씬 가벼워졌다.

물론, 건강 관리에 신경을 쓰기는 하지만 뭐 그리 유별난 것도 없다. 음식을 딱히 가려 먹지는 않고 가능하면 야채 위주의 건강한 밥상을 선택한다. 장 건강을 위해 유산균을 매일 챙겨 먹는다. 술자리는 맥주 한잔 정도로 마무리하고, 담배는 앞으로도 배울 생각이 없다. 체력 관리를 위해 주말이면 관악산을 찾아 둘레길을 두어 시간 걷기도 한다. 

화장품 모델들처럼 결이 곱고 광채 나는 도자기 피부를 갖게 되었다는 것은 아니니 오해는 마시라. 남들 눈치 보지 않고 대중탕에 몸을 담글 수 있고 가끔은 살살 때도 밀어 본다. 얼굴과 몸에 바를 화장품을 고르는데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되고, 여느 젊은 처자들처럼 아이섀도우와 립스틱 컬러에 관심을 가져보는 소소한 즐거움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생리가 가까워 오거나, 전반적으로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면 어김없이 피부 트러블이 스멀스멀 올라오곤 하지만 일주일 정도 지나면 이런 증상들도 자연히 사그라든다. 피부가 먼저 나의 몸 상태에 대해 신호를 보내주는구나 생각하면 이것도 고마운 일이다.

내 경험을 들어 아토피에는 한방 치료가 정답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아토피는 감히 무엇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는 고질병이고, 그로 인해 환자와 가족들이 겪는 정신적 고통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기에, 지금 이 순간 아토피로 고통받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나와 같은 사례도 있다고, 저마다의 치료법을 찾아가는 과정에 참고할 만한 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아토피가 나에게 남긴 것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내야겠다고 생각한다
 아토피가 나에게 남긴 것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내야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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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아토피가 나에게 남긴 것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겠다고 생각한다.

아토피는 나의 자존감을 떨어트렸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아토피로 인해 나는 그나마 세상에 고개 숙이는 법을 배웠는지도 모른다. 아토피가 없었다면 내 타고난 성향 상 제 잘난 맛에 취해 건방이 하늘을 찌르고 타인의 아픔에는 무딘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오랜 시간 아토피로 인해 괴로운 날들을 겪어 왔다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나는 지난 30여 년간 무사히 학교를 졸업해 제 손으로 밥벌이를 하고 중간중간 애틋한 사랑의 아픔도 겪어가며 살아남지 않았는가.

그렇게 살아남아 지금은 한결 가벼워진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은 가족들을 비롯해 내 인생에서 마주친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아버지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주변에서 귀동냥으로 주워들은 아토피에 좋다는 약들을 구해다 날랐고, 어머니는 건강한 식단과 청결한 환경에 늘 신경 쓰셨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적개심 많은 나에게 먼저 다가와 선뜻 말을 걸어주는 친구들과 동료들이 있었다. 그리고 아토피에 개의치 않고 나를 한 사람의 여자로 배려하고 아껴 준 사랑도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뭐. 치료를 해 보기로 한 거니까... 미모를 포기해야지."
"너 미모 포기 안 됐거든?"

이제는 지나가 버린 사랑일지라도 그의 따뜻한 말 한마디로 나는 충분히 구원받았다.

누군가의 고단한 삶을 구원하는 것은 어쩌면 이렇게도 사소한 말 한마디 일지 모른다. 반대로 사소한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삶을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게 할 수도 있는 만큼 이왕지사 인간으로 태어나 제 죽는 날도 모르고 살아가는 한 세상, 누군가를 구원하지는 못할망정 상처 주고 할퀴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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