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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하 지사의 묘소
 이동하 지사의 묘소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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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신암선열공원에 있는 이동하(李東廈) 독립지사의 묘소를 참배한다. 물론 참배에 앞서 이동하 지사가 어떤 분인지 사전 학습을 한다.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묘소 참배를 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배경지식을 얻기에 가장 적합한 곳은 국가보훈처 누리집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이다. 공훈록에서 이동하 지사 관련 소개를 읽는다.

"생몰년도 : 1875.4.18.~1959.3.18.
출신지 : 경북 안동
운동 계열 : 만주 방면 
훈격(연도) : 애족장(1990)

공적 내용 : 일찍이 서울 계산학교 교원, 대구 협성학교 교감 등을 역임하였으며, 보문의숙을 창립하여 수백 명의 청년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한국이 강점당하자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11년에는 박은식·윤세용·이동녕·이시영·윤세복·김동삼 외 40명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망명한 후에는 윤세복과 함께 환인현에 동창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여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한편 대종교를 신봉하였다. 이어 흥경현에 흥경학교를 설립하는 한편, 흥경·환인 등의 동포들을 위한 자치기구를 조직하여 회장으로서 일하였다.

이동하 지사의 묘소 앞 표지석
 이동하 지사의 묘소 앞 표지석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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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봉천에서 체포된 이후에도 많은 활동을 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기록은 발견할 수 없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대종교를 신봉한 이동하 독립지사

이동하 지사가 대종교를 신봉하였다는 기록을 보니 대종교가 궁금해진다. 대종교(大倧敎)는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민족혼의 각성과 민족의식 고취가 급선무라고 판단한 나철(羅喆)이 1909년 단군교라는 이름으로 일으킨 우리나라 고유의 민족종교이다. 1년 뒤 단군교는 대종교로 개칭되었고, 신도가 2만여 명으로 증가했다.

대종교가 1914년 포교 영역을 만주까지 크게 확대하자 위협을 느낀 일본은 1915년 '종교 통제안'을 만들어 대종교를 혹독하게 탄압했다. 교단의 존폐 위기에 봉착한 나철은 1916년 8월 15일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서 일본의 폭정을 통탄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북로군정서 / 청산리 전투


북로군정서 : 1919년 10월, 단군을 섬기는 대종교 계열의 북간도 민족주의자들과 김좌진 등 신민회 계열의 민족주의자들이 합쳐서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를 조직한다.

대한군정부는 그해 12월 임시정부의 지시로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이름을 바꾸어 활약한다. 신민회의 신흥무관학교 출신 등이 편성한 독립군 부대의 이름이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였기 때문에 대한군정서는 흔히 북로군정서라는 별칭으로 불려졌다.

청산리 전투 :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1920년 10월 백두산 동북쪽의 두만강 상류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사상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해 6월에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안무의 국민회군이 두만강 하류 봉오동에서 일본군을 대파하여 독립군 최초의 승리를 거두었다.

연이어 독립군에게 대패한 일본은 만주 거주 조선인을 무차별 학살한 '만주 참변'을 일으켰다. 민간인의 피해를 우려한 독립군은 주둔지를 러시아 영토 내로 옮겼는데, 처음에는 우호적이던 러시아 군대가 일본의 압력을 받은 이후에는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하면서 총격을 가해 많은 독립군이 죽는 '자유시 참변'이 1921년에 일어났다.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 위치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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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 교주 김교헌은 비밀결사단체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여 그 후 무장독립운동단체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발전시켰고,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일제는 보복으로 이듬해에 대토벌 작전을 전개하여 수많은 교도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김교헌은 분함을 이기지 못해 병으로 죽었다.

대종교의 초기 역사는 이동하 지사가 대종교를 신봉한 까닭을 가늠하게 해준다. 대종교는 1942년 11월 3세 교주 윤세복 외 20명의 간부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고문으로 사망하거나 옥사한다.

두 분의 공적 내용이 동일한 까닭은?

이동하 지사 묘소의 오른쪽은 배학보(裵鶴甫) 지사의 묘소이다. 배학보 지사는 1920년 8월 19일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1992년 10월 28일에 세상을 떠났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은 타계 시기를 '미상'으로 적고 있다.) 공훈록의 '공적 내용'을 읽어본다.

"대구사범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1년 2월 15일 동교생 권쾌복·문홍의 등 15명과 함께 당시 대구 대봉정 (242번지, 현재 지번 멸실) 유흥수의 하숙집에 모여 항일결사 다혁당을 조직하였다.

다혁당은 앞서 대구사범학교에 조직되었던 비밀결사 문예부·연구회의 항일 정신을 계승하여 조직을 확대, 개편한 것으로 문학·미술·학술·운동 등 각 분야에 걸쳐 실력을 양성함으로써 조국독립을 촉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다혁당은 조직을 교내에 국한하지 않고 대외적으로 조직을 확대하여 타교생 및 일반 사회인까지도 포섭 대상으로 하였다. 따라서 결사의 명칭도 당(黨)이라 했으며, 조직으로는 당수·부당수 아래 총무·학술·문예·연구·경기부 등 각 부서를 두었는데, 이때 그는 부당수 겸 연구부·운동부원의 일을 맡았다.

배학보 지사의 묘소 앞 표지석
 배학보 지사의 묘소 앞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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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다혁당은 당원의 비밀 엄수 및 절대 복종, 주2회 회합과 하급생 지도 등을 당 규약으로 정하고, 1941년 3월부터 동년 5월까지 세 차례 모임을 갖고 당의 활동 상황과 조직 확대에 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고 민족차별 교육에 반대하여 동교 내 연습과 학생(주로 일본인)과 심상과 학생(대부분 조선인)에 대한 차별 대우를 철폐시키는 방안도 토의하였다.

1941년 7월에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반딧불〉이 일경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서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도 일경에 피체되었고, 그 후 2년여 동안 미결수의 상태로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11월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은 배학보 지사와 최태석 지사의 공적 내용을 동일하게 소개하고 있다. (최태석 지사도 이곳 신암선열공원에 안장되어 있는 독립지사이다.) 이는 두 분이 대구사범학교 항일 학생투쟁을 같이 했기 때문이다. 대구사범학교의 후신인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교정에 1973년 들어 세워진 <대구사범학교 항일 학생 의거 순절 동지 추모비>를 답사하러 갈 때 '문예부', '연구회', '다혁당'에 대해 좀 더 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다음 묘소로 향한다. (계속)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는 '대구사범학교 항일 학생 의거 순국 동지 추모비'(사진의 오른쪽)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는 '대구사범학교 항일 학생 의거 순국 동지 추모비'(사진의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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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국가보훈처 누리집 '독립유공자 공훈록'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참조



태그:#신암선열공원, #배학보, #이동하, #대종교, #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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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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