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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17일 오전 8시 5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릉은 한 왕조의 능역이 온전히 남아 있다는 측면에서 세계에서 보기 드문 사례에 속한다. 또한 조선왕릉의 외형적인 형태는 진입 공간과 제향 공간, 능침 공간으로 구분되어 형태의 유사성은 간직하고 있지만, 왕과 왕비의 합장 유무에 따라 봉분의 형식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영릉’, 합장릉으로 조성된 사례 중 하나다.
▲ 여주 영릉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영릉’, 합장릉으로 조성된 사례 중 하나다.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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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국조오례의>에 근거해 왕과 왕비가 하나의 봉분으로 조성되는 합장릉이 기본적인 형태지만, 정치적인 이유와 함께 왕은 한 명이라도 왕비는 여러 명일 수 있어 봉분의 형식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봉분의 형태에 따라 유형의 구분이 이루어지는데, 크게 혼자 안장된 '단릉', 왕과 왕비가 각각 묻힌 '쌍릉', 왕과 왕비가 한 봉분에 합장된 '합장릉', 하나의 능역에 'Y' 형태로 각각 봉분이 조성되는 '동원이강릉', 하나의 능역에 각각의 봉분이 상하로 조성되는 '동원상하릉', 한 능역에 봉분에 세 기가 조성된 '삼연릉'으로 나뉜다.

대릉원에 자리한 황남대총, 남분과 북분이 합쳐진 표형분의 형태로 마치 낙타 등처럼 생겼다.
▲ 황남대총 대릉원에 자리한 황남대총, 남분과 북분이 합쳐진 표형분의 형태로 마치 낙타 등처럼 생겼다.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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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조선왕릉에서 합장릉은 기본적인 골격을 갖춘 형태였지만, 신라왕릉의 경우 기록으로 확인된 합장릉의 사례는 흥덕왕릉이 유일하다. 물론 부부가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황남대총의 경우처럼 각각의 봉분으로 조성된 남분과 북분이 합쳐진 '표형분'의 사례가 있지만, 한 봉분에 왕과 왕비가 함께 합장된 사례는 신라의 왕릉 중 현재까지 흥덕왕릉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오늘은 흥덕왕릉을 통해 장화부인과의 합장과 당시의 시대, 흥덕왕릉 이후 신라의 쇠퇴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장보고가 활약했던 흥덕왕의 시대, 흥덕왕 사후 왕위를 두고 벌어진 내전

헌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흥덕왕(재위 826~836)의 이름은 수종 혹은 경휘로 아버지는 원성왕의 아들인 혜충태자(=혜충대왕)이다. 당시 혜충태자의 아들로는 소성왕과 헌덕왕, 흥덕왕과 함께 훗날 왕위에 오르는 민애왕의 아버지 김충공이 있다.

흥덕왕은 왕위에 오른 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포석으로 왕족을 우대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힘을 가진 왕족들이 서로 난립을 하면서, 훗날 왕위 계승을 두고 원성왕의 장남인 혜충태자(인겸)의 후손과 셋째 예영의 후손 간 내전이 벌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흥덕왕릉은 현재까지 알려진 신라의 왕릉 가운데 십이지신상이 조성된 마지막 왕릉으로, 원형이 잘 남아있다.
▲ 흥덕왕릉 흥덕왕릉은 현재까지 알려진 신라의 왕릉 가운데 십이지신상이 조성된 마지막 왕릉으로, 원형이 잘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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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등장한 흥덕왕의 치세는 흉년과 가뭄, 폭설 등 자연재해와 관련한 기사가 많은데, 이러한 영향으로 신라의 각 지역에서 민란이 발생했다. 흥덕왕은 이를 진압한 뒤 사치를 금하고, 백성들을 위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한편 흥덕왕은 김유신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봉했는데, 왕족이 아닌 신하가 왕위에 오르는 보기 드문 사례를 보여준다. 또한 장보고에게 청해진 설치를 허가해 해상을 경계하도록 했으며,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흥덕왕 때 청해진이 설치되고, 장보고는 청해진 대사가 되었다. 훗날 장보고는 신라 왕실의 왕위 계승에 개입을 하게 된다.
▲ 완도 청해진 흥덕왕 때 청해진이 설치되고, 장보고는 청해진 대사가 되었다. 훗날 장보고는 신라 왕실의 왕위 계승에 개입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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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 따르면 흥덕왕의 아들로는 김능유(이하 능유)와 김의종(이하 의종) 두 아들이 있는데, 능유는 831년 당나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바다에 빠져 세상을 떠났고, 의종은 836년 당나라로 파견되어 숙위를 하다가 희강왕이 재위하던 837년 신라로 돌아오게 된다. 이후 흥덕왕이 세상을 떠난 뒤 신라 왕실은 왕위를 두고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게 된다.

흥덕왕의 사촌인 김균정(=균정)과 조카 김제융(=제융)이 왕위를 두고 쟁탈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균정은 살해당하고, 제융이 왕위에 오르게 되니 이가 희강왕(재위 836~838)이다.

자연스럽게 균정을 지지했던 김우징(=우징)과 김예징은 청해진으로 망명하고, 김양은 도망치게 된다. 하지만 희강왕은 자신을 왕위에 올리는데 공을 세운 상대등 김명의 반란에 스스로 자결을 선택했다. 왕위에 오른 지 불과 10개월 만이었다.

전면에서 바라본 희강왕릉의 모습, <삼국사기>에는 소산에 장사를 지냈다고 했다.
▲ 희강왕릉 전면에서 바라본 희강왕릉의 모습, <삼국사기>에는 소산에 장사를 지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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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김명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민애왕(재위 838~839)으로, 정국이 바뀌면서 청해진에 망명 중이던 우징과 도망쳐야 했던 김양은 의외의 인물을 끌어들이니 이가 장보고였다. 우징과 김양은 장보고를 설득하고, 이에 호응했던 장보고가 군사 5천을 보내 민애왕과 대척점에 서게 된다. 하지만 두 차례의 싸움에서 민애왕이 패배하면서, 결국 월유의 집에서 사로잡힌 민애왕은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반란을 통해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이었다.

희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민애왕 역시 장보고의 개입으로 불과 2년 만에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 傳 민애왕릉 희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민애왕 역시 장보고의 개입으로 불과 2년 만에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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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애왕의 죽음과 함께 우징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신무왕(재위 839)으로, 즉위의 일등공신이 된 장보고는 '감의군사'에 봉해지며 절정의 권력을 누렸다. 하지만 신무왕이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신무왕의 아들인 문성왕(재위 839~857)이 즉위하면서 장보고와의 갈등이 표면화 된다. 결국 염장의 손에 장보고가 피살되면서 청해진은 해체되고, 이곳에 거주하던 이들은 벽골군(김제)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이처럼 불과 5년도 못 되어 4명의 왕이 교체되는 혼란은 신라가 쇠퇴하고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보여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피장자가 확실한 흥덕왕릉, 장화부인과의 합장릉으로 조성

흥덕왕릉과 관련한 장지 기록을 살펴보면 <삼국유사>에 안강 북쪽 '비화양(比火壤)'에 장화부인과 합장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흥덕왕릉이 안강현 북쪽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두 기록을 교차해보면 안강읍에서 신라 중대의 왕릉으로 추정할 수 있는 곳은 현 흥덕왕릉 밖에 없다.

결정적으로 흥덕왕릉의 귀부에서 수습된 비편에서 '흥덕'의 명문이 확인되면서, 기록과 현장이 일치한 왕릉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장화왕비의 능에 합장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생전 장화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크게 슬퍼했다. 이와 관련해 <삼국유사>에는 '흥덕왕과 앵무새'의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귀부 인근에서 확인된 흥덕왕릉의 비편을 통해 흥덕왕릉인 것이 고증되었다.
▲ 흥덕왕릉 귀부 귀부 인근에서 확인된 흥덕왕릉의 비편을 통해 흥덕왕릉인 것이 고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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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의 요지는 당나라에서 가져온 앵무새 한 쌍 중 암놈이 죽자, 수놈이 슬프게 울었다는 것이다. 이에 측은한 마음을 든 흥덕왕이 명해 앵무새 앞에 거울을 걸게 했다. 그러자 거울에 비친 모습이 자기 짝인 줄 알고 거울을 쪼아대다 아닌 것을 알고 슬프게 울다가 죽었다는 내용으로, 이 모습을 본 흥덕왕이 노래를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어쩌면 <삼국유사>에 등장한 앵무새를 장화부인으로 투영한 것은 아니었을까?

세상을 떠나기 전 흥덕왕은 장화부인과 합장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고, 기록을 통해 신라의 왕릉 가운데 최초로 합장된 사례로 남겨졌다. 흥덕왕릉의 외형은 원성왕릉과 유사한데, 입구에 화표석 1쌍이 자리하고 있고, 좌우에 관검석인상 1쌍과 호인상 1쌍, 봉분의 사면에 석사자상 4기가 세워져 있다. 신라 중대 왕릉에서 나타나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특징 역시 확인할 수 있으며, 원성왕릉에는 없는 비석을 세웠을 귀부가 남아있는 차이를 보인다.

호인상에서 바라본 흥덕왕릉의 전경
▲ 흥덕왕릉의 석물 호인상에서 바라본 흥덕왕릉의 전경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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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알려진 왕릉을 나열해보면 흥덕왕릉 끝으로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신라의 왕릉은 발견되지 않았다. 반면 용강동 고분군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인형의 형태로 만들어진 십이지신상이 고분 안에서 출토가 되었다.

또한 외형적으로 볼 때 흥덕왕릉 이후 조성된 왕릉의 규모는 이전에 비해 크게 축소가 된 모습을 보이는데, 이같은 변화는 내분으로 인한 국력이 쇠퇴가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러한 왕릉의 변화는 신라의 쇠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라는 점에서 주목해볼 공간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본인의 저서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 신라왕릉답사 편>의 내용을 토대로 새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태그:#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신라왕릉, #흥덕왕릉, #장보고,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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