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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2. 26. 부산 근교의 포로수용소.
 1951. 2. 26. 부산 근교의 포로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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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포로수용소

한국전쟁 중 유엔군 측에서는 공산군 포로를 수용하고자 가장 후방인 부산 거제리에 포로수용소를 만들었다. 허허벌판인 곳에 철조망을 치고는 천막으로 임시 막사를 만들어 포로들을 수용했다. 처음 포로수용소에서는 한 천막 막사에 포로 스물네 명씩을 수용했다.

하지만 날마다 입소하는 포로가 부쩍부쩍 늘어났다. 1950년 9월 하순부터 10월 중순 사이에는 하루에 최대 2만여 명의 인민군 포로가 입소하기도 했다. 그러자 스물네 명 수용하던 천막 막사에 마흔 명 이상으로 늘어나 포로들은 누울 자리조차도 비좁았다.

유엔군 측은 포로들이 계속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하는 수 없이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 옆에 새로 철조망을 치고는 제2수용소로부터 제6수용소까지 증설했다. 그런데도 계속 입소하는 포로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유엔군은 부산 근교 수영에 '제1, 제2, 제3 수용소'와 부산 가야리에도 '제1, 제2, 제3 수용소'를 증설했다.

1950년 12월 말 부산 거제리, 수영, 가야리 일대의 포로수용소에는 모두 14만여 명의 포로가 수용되어 득시글거렸다. 그러자 유엔군 측에서는 거제도에 새로 포로수용소를 짓고자 했다.

그 첫째 이유는 전장(戰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대도시 부산에 14만 명 가까운 포로가 수용돼 있다는 사실에 대한 우려였다. 그 둘째는 유엔군의 병력이 적과 싸우기도 모자라는데 막대한 병력을 포로 경비와 관리에 쓰고 있는 사실에 대한 고육책이었다.

그 셋째는 10만이 넘는 포로들의 폭동이나 탈출에 대한 사전 예방 조치였다. 만일 부산포로수용소 포로들이 폭동이라도 일으킨다면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밖에도 거제도는 육지에서 거리가 가깝다는 이점도 크게 작용했다. 아무튼 거제포로수용소는 섬이기에 경비하기도 쉽고, 포로수용소 관리비도 적게 든다는 이점 때문에 그곳에 세워지게 되었다.

1951.5. 7. 거제 포로수용소 전경.
 1951.5. 7. 거제 포로수용소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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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포로수용소

1950년 11월부터 유엔군은 거제도 고현, 수월지구 등지에 거제포로수용소를 짓기 시작했다. 거제포로수용소는 대부분 포로들이 지었다. 먼저 거제도에 도착한 포로들은 수용소 울타리 철조망 설치작업부터 했다.

그런 다음 불도저로 부지 정지작업을 한 뒤 감시 망루를 설치했다. 포로들은 정지작업을 한 부지에다가 일정한 간격으로 천막을 쳤다. 잠깐 새 거제도는 온통 천막으로 뒤덮인 섬이 되었다. 초기 막사는 천막뿐이었으나, 곧 흙벽돌 막사들도 들어섰다.

유엔군은 거제포로수용소를 60, 70, 80, 90 단위의 숫자가 붙은 4개 구역과 28개 동(棟)으로 배치했다. 중앙 계곡에는 제6구역, 동부 계곡에는 제7, 8, 9구역으로 배열하였으며, 1개 단위 구역에는 6천 명을 수용할 수 있게 터를 잡았다. 그런 뒤 유엔군은 부산포로수용소의 포로들을 거제포로수용소 공사와 함께 점차로 이송시키기 시작했다.

1951년 2월 말에는 부산포로수용소의 5만여 명 포로를 거제포로수용소로 이송시켰다. 3월 1일에는 행정본부, 나머지 부속기관과 잔류 인원도 이송하기 시작하여 그해 6월 말에 거제포로수용소 포로는 14만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자 그때부터 부산포로수용소는 거제포로수용소의 보조 역할을 담당했다. 곧 유엔군은 전투지에서 사로잡은 포로를 일단 부산포로수용소에 모은 뒤 거기서 분류 편성하여 거제도로 보냈다.

거제도포로수용소는 1950년 11월 27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한국전쟁 중 북한군 15만여 명, 중국군 2만여 명 등 최대 17만 3천여 명의 포로를 수용했던 곳이다.

- 이상 박도 지음 <약속>에서 가려 뽑음.

1950. 8. 9. 초기의 부산 임시 포로수용소로 건설 중이다..
 1950. 8. 9. 초기의 부산 임시 포로수용소로 건설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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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8. 25. 부산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이 세면을 하고 있다.
 1950. 8. 25. 부산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이 세면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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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부산포로수용소로 새로 입소하는 포로들.
 1950. 부산포로수용소로 새로 입소하는 포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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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1. 19.  부산 포로수용소에서 감시병이 포로들의 머리를 깎아주고 있다.
 1951. 1. 19. 부산 포로수용소에서 감시병이 포로들의 머리를 깎아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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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4. 부산. 임시 포로수용소에 도착한 포로들
 1951. 4. 부산. 임시 포로수용소에 도착한 포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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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1. 22. 부산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 사타구니에 DDT를 살포하고 있다.
 1951. 1. 22. 부산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 사타구니에 DDT를 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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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1. 22. 중국군 포로들이 심문을 기다리고 있다.
 1951. 1. 22. 중국군 포로들이 심문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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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1.16. 부산, 임시 포로수용소의 여자 포로들
 1951. 1.16. 부산, 임시 포로수용소의 여자 포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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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포로가 포로수용소 우편함에 자기가 쓴 편지를 부치고 있다.
 한 포로가 포로수용소 우편함에 자기가 쓴 편지를 부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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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2. 3. 20. 거제도, 중국군 포로수용소 정문
 1952. 3. 20. 거제도, 중국군 포로수용소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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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한국전쟁, #포로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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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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