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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소싸움과 반시 말랭이가 유명한 청도는 옛 삼한시대에 '이서국(伊西國)'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청도에서 이서국은 낯선 이름이 아니다. 지금도 행정구역 중 이서면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서국의 이름을 딴 학교와 도로명 주소 등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이서국에 대한 문헌 기록은 찾기가 어려운 실정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 이서국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서국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어떤 왕계를 지녔는지 등 자세한 역사는 알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은 청도에 남아 있는 이서국의 흔적에 대해 소개해보고자 한다.

문헌과 지명에서 찾을 수 있는 이서국의 흔적

이서국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이서국 조에서 찾을 수 있는데, 37년 신라 노례왕(=유리왕) 때 이서국이 신라의 수도 '금성(金城)'을 침공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미추왕 죽엽군'의 기록에는 유례왕 때 이서국이 금성을 침공했다는 사실과 위기에 빠진 신라군 앞에 대나무 잎을 귀에 꽂은 군사들이 나타나 함께 힘을 합쳐 이서국을 물리친 기록이 등장하고 있다. 







이후 도와준 군사들이 홀연히 사라졌는데, 미추왕릉 앞에 대나무 잎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 미추왕이 도와주었다고 해서 미추왕릉은 '죽현릉(竹現陵)'으로 불리게 된다. <삼국사기> 역시 '미추왕 죽엽군'의 내용과 동일하며, 297년 '이서고국(伊西古國)'이 금성을 침공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등장한 이서국의 금성 침공은 당시 이서국이 신라와 대등한 수준의 국력을 갖추고 있음을 말해준다. 반면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보면 신라 유리왕(=노례왕) 때 이서국을 정벌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앞선 기록과는 배치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기록의 부재는 이서국의 존재를 이해하는데 한계로 작용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청도에는 이서국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지명이 다수 확인되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은왕봉(隱王峰)'이다. 은왕봉은 청도 남산에 자리하고 있는데, <청도군지>에는 신라군이 쳐들어오자 이서국의 왕이 이곳으로 피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외에도 이서국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지명의 존재는 기록이 부족한 이서국의 흔적을 찾는데 주요한 소재인 것은 틀림이 없다. 

한편 <삼국지위서동이전>에 등장하는 진한의 12국 중 지명의 유사성을 근거로 '우유국(優由國)' 을 이서국의 전신 내지는 이칭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이를 입증할 고고학적 발견이 없기 때문에 단순히 지명의 유사성으로 '이서국 = 우유국'이라 정의하는 건 다소 신중할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청도군 편에는 신라가 이서국의 땅을 빼앗은 뒤 구도성의 경내에 있던 솔이산과 경산, 가산을 합쳐 '대성군(大城郡)'을 설치했다. 







또한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 경덕왕 때 구도를 '오악현(烏岳縣)'으로, 경산은 '형산현(荊山縣)'으로, 솔이산은 '소산현(蘇山縣)'으로 개칭이 되었으며, '밀성군(密城郡)'에 속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후 오악현과 형산현, 소산현이 합쳐져 청도군이 만들어졌으며, 청도군이 승격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서면사무소를 시작으로 주구산성에 이르는 이서국의 흔적

이처럼 청도에 존재했다고 전해지는 이서국은 기록의 부재로 그 실체를 밝히는데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보통의 경우 고분 혹은 당대의 유물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이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하기 마련인데, 문제는 아직까지 청도에서 이서국의 실체를 확인시켜줄 만한 지배자의 고분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까지 '지석묘'와 비파형 동검을 비롯해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다수 확인되기는 했지만, 이서국의 존재를 증명할 만한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이는 진한 12국 중 의성 '조문국(召文國)'과 경산 '압독국(押督國)'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된 유물로 그 실체를 인정받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현재 이서국과 관련한 대표적인 유적지는 크게 백곡토성과 주구산성(=이서산성)으로, 그 출발지는 이서면사무소에서 시작된다. 이서면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옛 이서국의 정신을 담고 있는 이서면사무소에는 이서국의 옛 터 위에 세웠다는 '이서고국(伊西古國)'의 비석이 자리하고 있다. 





  
이서면사무소에서 멀지 않은 청도군 화양읍 토평1리 산 30번지 일대는 '백곡토성(栢谷山城)'이 위치한 곳으로 지형으로 보면 청도천을 끼고 있는 넓은 평야와 낮은 구릉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토성이 자리한 백곡마을로 들어가기 전 커다란 보호수 아래 '이서국성지(伊西國城址)'가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다. 


안내문을 통해 백곡토성이 이서국의 왕성이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아직까지 이를 입증할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또한 토성의 형태는 2,3단으로 쌓은 석축 위에 판축기법으로 토성을 쌓은 형태로, 이러한 성의 형태는 충남 천안에 소재한 목천토성과 유사하다. 대개 판축기법의 토성이 백제의 성에서 흔하게 발견되는데 비해, 신라에서는 드문 경우이기에 주목해볼 만하다.





  
현재 백곡토성은 보호수가 위치한 동쪽의 나지막한 능선을 따라 일부 확인이 가능한데, 아직까지 발굴조사된 사례가 없어 정확하게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기 어렵다. 다만 이곳에서 채집된 토기류와 성의 축성 방식을 고려해 대략 5~6세기를 축조 연대로 보고 있으며, 인근에 자리한 '유등연지'와 함께 보면 좋다. 

마지막으로 이서국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곳이자, 신라에 맞서 마지막까지 저항을 했던 곳으로 전해지는 '주구산성(走狗山城)'이 있다. 주구산성은 '이서산성' 혹은 '폐성'으로 불렸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폐성에 관한 기록이 등장하고 있다. 





  
기록에는 군의 동쪽 7리에 자리하고 있고, 동서 모두 석벽으로 되었다고 했다. 기록에 등장한 모습은 주구산성의 모습과 유사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입지를 보면 청도천과 송금리에서 시작된 하천을 끼고 덕절산(=주구산)의 절벽에 축조가 된 성이다. 
  
지금도 고속도로와 철도가 지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중요한 교통로이기에 충분히 전초기지로서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또한 청도천은 자연 해자의 역할을, 절벽은 방어에 이점을 가진 공간이라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현재 성의 내부에는 '덕사(德寺)'를 비롯해 덕절산 자연생태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성의 내부에서 어렵지 않게 기와와 토기 파편을 볼 수 있다. 







이곳 역시 추후 발굴조사를 통해 이서국의 또 따른 면모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되는 곳 중 하나로, 백곡토성을 이서국의 왕성지로 볼 때 이곳은 전초기지이자 왕성을 방어하는 기능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분명 실제 했다고 전하지만, 그럼에도 대형 고분이나 유물 등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이서국은 신기루처럼 허상만 보일 뿐, 그 실체를 아는 것은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남은 파편들을 모아, 아직 찾지 못했거나 발굴되지 않은 문화재 등에 관심을 쏟는다면 향후 베일에 싸인 이서국의 실체를 규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첨(李詹)의 시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당시예악이서국(當時禮樂伊西國)"
당시 예악은 이서국에 있었고, 오늘날 정기(旌旗)는 원수(元帥) 가는 곳에 있네

태그:#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이서국, #이서고국, #청도 이서국,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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