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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생 박준호님에게

제가 준호님을 처음 본 것은 2014년 8월 국회의사당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이 노숙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당시 세월호 특별법을 제정하라는 국민적 요구에 당시 박영선 대표가 수사권 기소권을 포기한 '조사권'만 가지게 된 특별법에 합의해 독단적이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을 때였죠. 광화문에서는 한 아버지가 곡기를 끊고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지고 있었고요.

노숙을 하던 중에 국회본청 박영선 의원사무실에서 '특별법 합의 무효화해야한다는 절실한 외침과 함께 '우당탕탕'... 사람이 지르는 소리, 벽에 무엇인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어요. 밖에 있던 우리는 심장이 내려앉는듯했어요. 목소리와 손이 떨리고 대체 안에서 무슨일이 일어났나 들어가보려했지만 이미 당시에는 본청이 원천봉쇄되어있어 방법이 없었어요.

조금 시간이 지난 후 준호님과 함께한 스크럼을 짜고 있던 대학생 10명 정도가 옷이 찢겨진 채로 절규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경찰에 의해 밖으로 끌려 나왔어요(관련 기사 : 대학생들 국회 진입 '박영선 대표 독단적 합의 철회' 요구).

대학생들
▲ 저 안에 있었던 대학생들
ⓒ 윤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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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해요. 밖에 있던 세월호 유가족 엄마 아빠들도, 또 님들도 모두 통곡했죠. 그렇게 서럽고 답답했어요. 우리 그때 말이에요. 그런 상황에서 또 연행하러 온다는 소식에 엄마 아빠들이 열 명 남짓의 준호님과 동료들을 한두 명씩 따로 당신들 돗자리에 앉혀놓고 말씀하셨죠.

"얘네들 내 자식들이야!"

상처 난 곳에 연고도 발라주고 물도 주며 도닥여주었지만, 준호님의 분노에서 나오는 흐느낌은 멈추지 못했어요. 국회의사당인데, 국회의원도 싸워주지 못하고 님들보다 한참 나이 많은 우리도 하지 못한 것을 님들이 했어요.

그해 겨울 광화문 문화재에서 구석에서 도시락을 먹고 있는 대학생 자원봉사단 사이에서 준호님을 보았고 서로 눈인사를 나눴지요. 그때 생각했습니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큰 힘이었던 대학생들이 50대가 된 지금, 우리는 '지금 1990년대생 준호님과 같은 대학생'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구나.  어른들이 미안해'"하고요. 세월호 참사 초반에 가장 많이 썼던 말이었는데 조금 더 어른인 우리들이 한창 젊은이들에게 또 미안한 짓을 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아주 많이 하고 살아왔네요.서투를 수는 있어도, 더 치열하고 멋있게 세월호의 시간을 채워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무척 큽니다.

어쩌면 우리 세월호에서 희생된 단원고 아이들의 몇 살쯤 형인 준호님에게서 '아이들이 살았다면, 조금 더 살았다면 저런 모습이겠지, 그 아이들도 이런 일이 있다면 저렇게 울분을 삭이지 못하겠지.' 그것이 제가 지난하던 세월호 진실을 위한 집회 최전방에서 준호님을 세 번째 보게 되었을 때 다가가서 이름을 묻게 된 이유에요.

참사 4주기가 다가오면서 안산에서는 합동 영결식이 있을 예정이고 분향소도 철거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오롯이 추모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4월 16일이 지나고 나면 언론에서 세월호는 또 구석진 곳으로 밀려나겠죠.  그동안 준호님은 그동안 어떻게 살았어요? 취업을 준비하나요?  군대에 갔을까요? 아니면 어디에선가 세월호를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오는 15일(일요일) 오후 2시 서울시청 지하 2층 바스락홀에서 제가 속한 304 목요포럼에서 오는 열린 토론회를 열어요. 그때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라진 것들, 내놓지 않는 것들을 제외한 자료들을 분석하면서 고군분투하긴 했지만 몇 가지 사실들을 정리할 수 있었어요.

특히 수난구호법에는 제2조 정의에 따라 선박 등의 침몰, 좌초, 전복, 기관고장 등으로 인하여 사람의 생명과 신체 그리고 선박 등의 안전이 위험에 처했다는 것이 국가에 인지된 그 시각부터 탑승객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주체는 선원이 아닌 해경 즉 국가로 귀속된다고 명시되어있습니다. 세월호 참사는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55분 강원식 1항해사가 국가 기관인 제주VTS로 신고함과 동시에 세월호는 조난상태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국가가 국민에게 다해야 할 책임은 무엇인가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 토론회는 유명한 정치인이나 연예인이 오는 자리는 아닙니다. 우리 304 목요포럼은 그다지 유명하지도, 힘이 있지도 않습니다. 지난 주 처음 시작한 토론회에서는 거리에서, 전국에서 세월호를 지켰던 몇 명의 시민들이 자리를 채워주었습니다. 그냥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세월호 참사에 함께 분노하는 작은 모임입니다. 궁극적으로 알고 싶은 것은 네 가지입니다.

첫 번째, 왜 구하지 않았는가?
두 번째, 왜 구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가?
세 번째, 왜 구하기 위해 도와달라는 요청을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세월호 4년이 지나면서 저희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확신에 가까운 마지막 네 번째 질문. 왜 일부러 구하지 않기 위해 모든 면에서 노력했는가?

이 4가지는 구조 '0'명에 대한 풀리지 않는 원통한 마음에서 비롯되며 결국 '제대로 구조하지 않은 국가 기관 관련자들은 왜 처벌받지 않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버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준호님, 광화문 집회현장에서 마지막 보았을 때 저는 당신의 눈빛에서 깊은 실망감과 회의감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만나보고 싶습니다. 작고 조촐하지만, 이 자리에서 어떻게 분노하고 어떻게 나아갈지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전국의 모든 1993년 박준호님, 세월호를 기억하는 여러분이 함께하기를 기다리겠습니다.

15일 일요일 2시 서울시청 지하2층 바스락홀
▲ 그런데 세월호는요? 15일 일요일 2시 서울시청 지하2층 바스락홀
ⓒ 윤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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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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