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나의 이야기] 아빠와의 작은 주도권 싸움
 
그날 저녁 내내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다. 그러나 파리의 첫 일정을 미라보 다리로 잡은 것이 유쾌하진 않았다. 생각해보니 아빠는 여행 준비기 때도 미라보 다리를 얼핏 언급하셨던 것 같다.

그러나 짧은 기간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일정인데 다리 하나 보려고 굳이 다른 관광 포인트와 동떨어진 먼 장소를 찾아가는 것이 나로선 납득되지 않았다. 원하는 것을 쉽게 내려놓지 않는 우리 부녀의 같은 성격이 여행 첫날부터 마찰을 일으킨 셈이다.

아빠와는 어릴 때부터 다정하거나 친근했던 사이가 아니다. 기억의 조각을 모아보면 우리가 어렸을 때 아빠는 오빠와 내가 TV 보는 것을 너무 싫어하셨다. 우리 남매의 소원은 연말 가요대상 프로그램 같은 것을 한번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 놓고 보는 일이었다.

또 성적이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는데도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시는 아빠에게 큰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다. 대입 수능을 끝내고는 친구들과 함께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애 첫 용돈벌이를 한 것을 스스로 뿌듯하게 여겼는데, 아빠는 그 시간에 차라리 책을 읽으라며 꾸중을 주셔 의기소침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내가 아빠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기억 때문이다. 우리 가족이 지하철을 타고 있는데 내가 열차에 오르려는 순간 문이 닫혔다. 플랫폼에 나 혼자 남았다. 항상 침착하시던 아빠의 얼굴빛이 사색이 되더니 지하철 안에서 나를 향해 '지금 자리에 그대로 있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셨다. 십여 분 후 아빠가 땀에 흥건히 젖어 날 찾아오셨다. 나는 그토록 넋이 나간 아빠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 사건 이후로 내 앞에는 항상 오빠나 엄마가 배치되고 뒤엔 아빠가 따라오셨다. 심지어 겨울 등산을 할 때도 오빠를 앞장세워 길을 트게 하고 아빠는 내 뒤를 따라오곤 하셨다.

대학 때부터는 그래도 아빠와 대화를 하기 시작했지만, 그래봤자 고작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중요한 일을 의논하는 수준이었다. 둘이서만 여행을 왔다고 없던 친근감이 갑자기 생겨나는 것도 아니어서 우리 사이엔 일정 수준의 격식이 유지되고 있었고, 기내에서 꿈꾸던 다정한 부녀의 모습은 우리에겐 처음부터 무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더는 그때의 아빠가 아니다
 
메트로역에서 표를 사고 있는 손님들.
▲ 매표소 메트로역에서 표를 사고 있는 손님들.
ⓒ 강재인

관련사진보기


지금은 그저 딸인 내가 아빠에게 맞추는 게 옳다는 생각으로 짐짓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했지만 아빠는 내 속마음을 짐작하시는 눈치였다. 냉랭한 공기가 흘렀다. 다음날 호텔 근처에서 간단한 아침식사를 한 뒤 아폴리네르와 로랑생이 처음 만났다는 몽마르트르로 가기 위해 인근 지하철역에 도착할 때까지도 우리 부녀는 서로 말이 없었다.

몽마르트르는 파리 북쪽의 18구에 위치해 있다. 역 안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아빠와 나는 그곳에 설치된 매표기 앞의 사람들 줄 뒤에 섰다. 차례가 되어 일회용 표를 사려고 하자 아빠가 불쑥 말을 건네신다.

"정기권이 경제적이지 않을까?"

나는 아빠에게 뻗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우리가 파리에 있는 날이 모두 6일인데, 어제 하루는 지나갔잖아요."

"그래도."

"베르사유는 파리가 아니니까 거기서 하루를 빼면 4일. 그리고 마지막 날은 짐 갖고 공항으로 나가야 하니까 파리 시내는 정작 3일뿐이에요. 또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해야 하는 지하철만 내내 타시는 것도 무리잖아요."

"그런가?"

아빠가 한발 물러나셨다. 나는 내 고집대로 1회용 표를 두 장 샀다. 소매치기를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어 핸드백을 앞에 거는 형태로 지하철을 탔다. 파리의 메트로는 서울의 지하철보다 내부가 좀 좁아 보였다.

옆자리에 앉은 나에게 아빠가 다시 말을 건네신다.

"너하고 지하철을 같이 타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고개를 돌려 아빠 얼굴을 바라보니 땀이 흥건히 젖어 뛰어오시던 내 어릴 적 아빠의 큰 모습은 사라지고 딸의 눈치를 살피시는 노인의 모습이 스치는 것이다. 방금 작은 주도권 싸움에서 승리했던 나는 이내 후회의 물결에 휩싸이고 말았다.

'역에서 내릴 땐 아빠에게 팔짱이라도 껴드려야지.'
 
몽마르트르에 있는 아베스 역 앞 풍경. 날렵한 출입구 구조물은 1900년 파리 지하철이 개통되었을 때 아르누보의 거장인 건축가 엑토르 기마르가 설계한 작품이었다고 한다.
▲ 아베스역 앞 몽마르트르에 있는 아베스 역 앞 풍경. 날렵한 출입구 구조물은 1900년 파리 지하철이 개통되었을 때 아르누보의 거장인 건축가 엑토르 기마르가 설계한 작품이었다고 한다.
ⓒ 강재인

관련사진보기


이제까지 가졌던 마음을 버리고 완전히 달라진 상태를 심기일전이라 하던가. 나는 완전히 새로운 기분이 되어 메트로 12호선의 아베스(Abbesses)역을 아빠와 함께 빠져나왔다. 지상으로 올라서자마자 보이는 예사롭지 않은 모양의 철과 유리로 만든 날렵한 출입구 구조물은 1900년 파리 지하철이 개통되었을 때 아르누보(Art Nouveau)의 거장인 건축가 엑토르 기마르가 설계한 작품이었다고 한다.

파리에서 만난 한글... '사랑합니다'

출입구 뒤쪽 작은 공원에는 SNS에서 많이 보았던 '사랑해벽(Le mur des je t'aime)'이 있었다. 나는 아빠를 재촉해서 파리여행의 대표적인 포토존 중의 하나인 3층 건물 벽 앞으로 다가갔다. 총 250개 언어로 '사랑한다'는 말을 적어 넣은 612개의 타일들이 벽면에 붙여져 있었다. 수많은 각국 글자들 속에서 내가 발견한 한글은 벽면 오른쪽 맨 위에 있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였다. 다만 한글을 모르는 프랑스 미장이가 '나는'이란 글자가 적힌 타일을 거꾸로 붙여 놓아 얼른 눈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키 높이 중앙에서 약간 오른쪽."

이번엔 아빠가 외치셨다. 거기에 '사랑해'라는 한글이 적혀 있었고 다시 키 높이 오른쪽 맨 끝부분에 '나 너 사랑해'라는 한글이 적혀 있었다. 그렇게 벽면 위에 한글이 쓰인 곳은 모두 세 군데였다.
 
250개 언어로 ‘사랑한다’는 말을 적어 넣은 612개의 타일들이 벽면에 붙여져 있다.
▲ 사랑해벽 250개 언어로 ‘사랑한다’는 말을 적어 넣은 612개의 타일들이 벽면에 붙여져 있다.
ⓒ 강재인

관련사진보기


이웃나라의 글자를 안 볼 순 없지. 세로로 적혀 눈에 띄는 일본어는 '愛しています(사랑하고 있습니다)' '大好き(참 좋아)'와 가로 글씨의 '君が好きだ(네가 좋다)' 등 역시 세 군데였다. 그러나 벽이 설치될 때는 아직 중국인 관광객이 없던 시절이라 그랬는지 "我愛你(너를 사랑한다)"란 대만 번체가 한 군데 보일 뿐이었다.

아빠는 지금처럼 중국인 관광객이 많이 오는 시점에 저 벽이 설치되었다면 我愛你란 번체 대신에 我爱你란 간체자가 쓰였을 것이라고 추리하셨다.

잠깐 낱말 찾기 비슷한 시간을 가진 우리는 몽마르트르로 발길을 돌렸다. 방향을 알리는 표지판들이 보인다. 하지만 그걸 보지 않아도 위쪽으로 향하는 길을 택하기만 하면 어느 길이나 몽마르트르 정상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평일 아침인데도 우리 같은 관광객들이 많았다.

"언덕이네요."

"언덕이지. 산이 많은 한국에서 보자면 언덕이지만 평지인 파리에선 엄연히 산이다. 그래서 몽마르트르 앞에 산이란 뜻의 몽(Mont)자를 붙인 게 아닐까?"

"해발 129m이면 남산의 절반쯤? 역시 언덕이네요. 아빠, 힘드시면 케이블카를 타실래요?"
 
지하철의 통로 벽에 붙어 있던 ‘퓌니뀔레르’의 표지판.
▲ 안내 표지판 지하철의 통로 벽에 붙어 있던 ‘퓌니뀔레르’의 표지판.
ⓒ 강재인

관련사진보기


지하철의 통로 벽에 붙어 있던 '몽마르트르의 퓌니뀔레르(Funiculaire de Montmartre)'라는 표지판이 생각났던 것이다.

편의상 케이블카라 했지만 사실은 줄에 매달려 가는 케이블카(Téléphêrique)가 아니라 궤도를 타고 올라가기 때문에 불어로 '퓌니뀔레르(Funiculaire)'라 부르는 케이블 철도(Cable Railway)였다. 

아베스역 앞에서 왼쪽으로 난 이본느르탁로(Rue Yvonne le Tac)를 6분쯤 걸어가다가 왼쪽으로 돌아서니 케이블철도역이 보였다. 나는 아빠와 함께 그 열차를 타고 언덕을 올라갔다. 나로서는 이제부터가 진짜 파리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라 들뜬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불어로 ‘퓌니뀔레르(Funiculaire)’라 부르는 케이블 철도.
▲ 케이블열차 불어로 ‘퓌니뀔레르(Funiculaire)’라 부르는 케이블 철도.
ⓒ 강재인

관련사진보기


태그:##사랑해벽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