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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5월 1일이면 국림묘지로 승격되는 신암선열공원의 입구. 국내 유일의 독립운동가 전용 국립묘지이다.
 오는 5월 1일이면 국림묘지로 승격되는 신암선열공원의 입구. 국내 유일의 독립운동가 전용 국립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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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5월 1일부터 대구 신암선열공원은 우리나라 유일의 독립유공자 전용 국립묘지로 승격된다. 그동안은 국가보훈처의 많은 현충시설 중 한 곳이었지만 앞으로는 국내 일곱 번째의 국립묘지로 격이 오르는 것이다. 국립묘지 승격을 앞두고 봄단장이 한창인 신암선열공원을 찾는다.

신암선열공원에는 모두 52분의 독립투사들이 계신다. 지금은 그 중 세 분을 소개하려 한다. 먼저 10번이라는 번호를 가지고 있는 박태현(朴泰鉉) 지사의 묘소부터 참배한다. 박태현 지사는 1899년 7월 14일 대구 달성에서 출생하여 1974년 4월 1일 타계했다. 3.1운동 활동으로 1992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박태현 지사의 묘소 앞 표지석
 박태현 지사의 묘소 앞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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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현 지사는 1919년 3월 8일 당시 대구 계성학교 5학년 학생이었다. 대구 '서문밖 장터(국가보훈처 공훈록의 표현)'에서 이만집(李萬集)·김태련(金兌鍊) 등이 주도하는 독립만세 시위 운동에 참가하여 10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는 높이 들고 대구 시내를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벌이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이 해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여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다시 징역 8월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20세 학생 박태현, 일본 경찰에 체포되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처음 일어난 날은 3월 1일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나라(國)의 기쁜(慶) 날(日)인 국경일(國慶日)이 5일 있는데, 3.1절, 1948년 7월 17일 제헌절, 1945년 8월 15일 광복절, 본래  음력 10월 3일이지만 양력 10월 3일에 지내는 개천절, 한글을 만든 원리와 사용법이 밝혀져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에 훈민정음을 만든 때가 1446년(세종 28) 음력 9월 상순으로 명시되어 있는 점을 기준으로 정해진 10월 9일 한글날이다.

1919년 대구에서는 3월 8일에 처음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장소는 '서문밖 장터'로, 중구 경상감영길 1에 있었던 대구읍성의 서문(달서문) 밖 일원이다. 서문밖시장은 흔히 '큰장'이라 불렸는데, 평양 장 및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강경 장과 더불어 조선 시대 3대 큰장이었기 때문이다. 3월 8일은 '대구 큰장' 장날이었고, 따라서 사람들이 많이 운집했으므로 독립만세운동을 펼치기에 아주 적격인 장소와 날짜였다.  
           
갑을빌딩이 있는 네거리에서 대구은행 북성로지점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면 도로 오른쪽에 남영사우나 건물이 있다. 건물 아래에 '달서문 터'라는 글자가 새겨진 작은 빗돌이 하나 세워져 있다. 달서문은 대구읍성의 서문을 말한다. 1922년까지는 이 달서문 앞, 지금의 오토바이 골목 일대가 서문시장이었다.
▲ 대구읍성 서문 표지석 갑을빌딩이 있는 네거리에서 대구은행 북성로지점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면 도로 오른쪽에 남영사우나 건물이 있다. 건물 아래에 '달서문 터'라는 글자가 새겨진 작은 빗돌이 하나 세워져 있다. 달서문은 대구읍성의 서문을 말한다. 1922년까지는 이 달서문 앞, 지금의 오토바이 골목 일대가 서문시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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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독립운동 유적 서문시장이 싫었다

일제는 대구의 독립만세운동 이후 서문시장을 지금의 자리로 강제 이동시킨다. 온통 늪지대였던 지금의 서문시장 일대를 매립하여 장터를 구축한 후 그곳으로 옮겨버린 것이다. 이에 대해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명성을 떨치던 서문시장은 1922년에 현재의 위치인 대신동으로 이전하였다. 그것은 장소가 좁다는 이유를 들어 대구부에 의해 식민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라고 설명한다.

이 책은 또 '1919년 대구 지방의 3.1운동은 흰옷을 입은 서문시장 장꾼들이 주도하였고, 식민주의자들은 흰옷 입은 군중이 시내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현재의 서문시장 터전은 당초에는 "성황당못"이라고 불리던 늪지대였다. 저지대를 정리하기 위해 많은 객토(客土)가 필요하였는데, 그것은 오늘날 내당동·비산동 고지대에 있던 고분군의 봉토를 실어다가 메웠다'라고 소개한다.

고분군은 뭉개고, 사적지는 공원으로 바꾸고

그렇게 일제는 대구 독립만세운동의 현장인 서문밖시장 터를 없애버렸다. 지금의 서문시장 부지를 만드느라 내당동과 비산동 일대의 고분들도 모두 뭉개버렸다. 우리의 역사와 정신을 말살하느라 여념이 없던 일제는 급기야 1905년 대구의 역사를 상징하는 달성을 '공원'으로 만들어버렸다. 아직도 달성은 국가 사적 62호의 정체성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우리나라 사람들이 1970년 이래 달성을 동물원으로 바꿔버렸으니 할 말이 없다.

방봉순 지사의 묘소
 방봉순 지사의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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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현 지사의 묘소 뒤에 11번 방봉순(方鳳淳) 지사의 묘소가 있다. 그런데 방봉순 지사에 대해 국가보훈처 공훈록은 2018년 4월 5일 현재 '생몰년도 : 1918.9.3.~1998.3.23. / 출신지 : 황해 안악 / 운동 계열 : 광복군 / 훈격(연도) : 대통령 표창(1963) / 공적 내용 : undefined'라고만 소개하고 있다. 공적 내용이 없고, 그것도 영어 단어로 써놓은 것을 보는 마음이 씁쓸하다.

이런 경우에는 독자들을 위해 현장의 비문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묘소 앞 표지석에는 지사의 사진과 함께 '훈격(연도) :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1945년 광복군 지하 공작대와 접선 활동, 동년 8월 광복군 부경 본부 입대, 광복 후 귀국'이 새겨져 있다. 대통령 표창 5년 뒤에 더 격이 높은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기록을 누락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가보훈처 공훈록은 부실하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방봉순 지사 묘소 앞의 표지석
 방봉순 지사 묘소 앞의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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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봉순 지사의 공적은 'undefined'라고?

앞면에 '애국지사 온양 방공 봉순지묘'라는 글자가 한자로 새겨져 있는 빗돌의 국한문 혼용체투 비문을 대략 우리말 발음으로 바꿔서 소개한다.

"방봉순 지사는 1918년 9월 3일 황해도 안악군 안악읍 서산리 246번지에서 아버지 방경흡(方京洽)과 어머니 곽익순(郭益順)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지사는 안악고등학교 재학 중 중국으로 건너가 운전 기술자로 활동했다. 1945년 5월 한국광복군 지하 공작원 박윤기와 접선, 광복군 제3지대 소재지인 부양으로 이동하다가 귀덕에서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공은 헌병대 영창에서 악독한 고문을 받던 중 1945년 해방으로 석방되어 그해 10월 19일 부양 본대에 도착했다."

비문 끝에 글쓴이가 권준호라는 사실도 새겨져 있다. 이런 글을 쓰는 일도 선열들의 정신과 업적을 우리 역사를 아로새기는 훌륭한 활동이라는 의미에서 그의 이름을 이 글에 담는다. 비석 옆면에는 2009년 9월 30일 부인 최우봉(崔友鳳) 여사가 소천하여 이 묘소에 합분했다는 기록도 새겨져 있다.

최태석 지사의 묘소
 최태석 지사의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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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하늘나라에서의 영생을 빌고 다음 묘소로 발걸음을 옮긴다. 최태석(崔泰碩) 지사의 묘소이다. 14번 최태석 지사의 묘소는 방봉순 지사의 묘소 뒤에 있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기록되어 있는 최태석 지사의 '공적 내용'을 읽는다.

"공적 내용 :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인 1941년 2월 15일 동교생 권쾌복(權快福)·유흥수(柳興洙)·문홍의(文洪義) 등 15명과 함께 당시 대구 대봉정 소재 유흥수의 하숙집에 모여 항일학생결사 다혁당(茶革黨)을 조직하였다. 다혁당은 앞서 결성되었던 동교의 항일결사 '문예부'와  '연구회'가 회원의 졸업으로 해체될 형편에 있었으므로, 이를 계승·발전시켜 조직을 확대·개편한 단체로서, 문학·미술·학술·운동 등 각 분야에 걸쳐 실력을 양성하여 조국 독립을 촉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또한 다혁당은 교내 조직에 국한하지 않고 대외적으로 조직을 넓혀 타교생 및 일반 사회인까지도 포섭 대상으로 하였다. 따라서 결사의 명칭도 당(黨)이라 했으며 조직으로는 당수·부당수 아래 총무·학술·경기 등 각 부서를 두었다. 이때 그는 육상 경기부 책임의 일을 맡았다.

한편 다혁당은 비밀 엄수 및 당원의 절대복종, 주2회 회합과 하급생 지도 등을 당 규약으로 정하고, 1941년 3월부터 동년 5월까지 세 차례 모임을 갖고 당의 활동 상황과 조직 확대에 관하여 협의하였고, 이때 동교 내 연습과 학생(주로 일본인)과 심상과 학생(대부분 조선인)에 대한 차별대우를 철폐시키는 방안도 토의하였다.

1941년 7월,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경의 손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도 일경에 피체되었으며 그 후 미결수로 2년여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1월에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의 항일 운동과 순국을 기리는 기념비가 경북대사대부고 교정에 세워져 있다.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의 항일 운동과 순국을 기리는 기념비가 경북대사대부고 교정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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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현, 방봉순, 최태석 지사의 묘소를 참배했다. 박태현 지사는 1919년 3월 8일 대구만세운동에 동참하였다가 일제의 감옥에 갇혔던 분이고, 방봉순 지사는 만주로 가서 광복군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악독한 고문을 당했던 분이다. 또 최태석 지사는 대구사범학교 학생으로 비밀결사체 다혁당을 결성하여 항일운동을 하다가 역시 고문을 받고 옥살이를 했던 분이다.

최태석 지사가 대구사범학교 항일운동의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이니 응당 그 학교에 가보아야 한다. 현재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에 가면 당시 학생들의 구국 투쟁과 순국을 기려 세워진 비석도 있다. 고색창연한 학교 건물도 대구시 등록문화재 5호이니 더욱 볼 만할 것이다. (계속)

덧붙이는 글 | 현지 빗돌의 비문, 국가보훈처 누리집의 '독립유공자 공훈록',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조



태그:#신암선열공원, #방봉순, #최태석, #박태현, #국립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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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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