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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느껴졌던 겨울이 지나고 거리엔 벚꽃이 만발했다. 지난 5일 사당동 한 카페에서 자신을 '잉여작가'라고 소개하는 임하(본명 임정화) 작가를 만났다. 그녀는 2011년 한국산문에서 <늪에 머리를 풀고>로 등단했고, 2015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 <그림 속에서 보다>로 당선한 작가다. 수필집으로 <가면의 꿈>(2015)와 <세상의 별을 세는 법>(공저, 2017) 등이 있고, <삐딱한 임하 씨의 삐딱한 일상> 출간을 앞두고 있다.

자신을 '잉여작가'라고 소개한 임하 작가
 자신을 '잉여작가'라고 소개한 임하 작가
ⓒ 유병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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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을 '잉여작가'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있나.
"과거와 달리 요즘은 작가가 많아요. 책도 엄청나게 나오고 있죠. 스마트기기에 독자를 빼앗긴 이유도 있지만, 너무 많은 책이 출간되기 때문에 나 같은 무명작가의 책은 주목조차 받지 못하는 실정이죠. 저는 읽히지도 않는 소설을 쓰는 '잉여작가'인 셈이죠."

- 그래도 하나의 관문을 통과한 사람이 아닌가. 많은 소설가 지망생들은 신춘문예 당선을 위해서 노력한다. 등단 전과 후의 변화는 없나.
"글쎄요. 이렇다 할 만한 차이는 없었던 것 같아요. 훌쩍 글을 잘 쓰게 된다든지, 누군가 내가 작가라는 사실을 알고 청탁을 해온다든지 하는 일도 없었으니까요. 하나의 산을 넘으니 더 큰 산이 기다리는 느낌이랄까요."

- 그러면 지금 소설을 안 쓰나.
"쓰긴 쓰죠. 그런데 단편소설로는 여기저기 투고해도 되지도 않아요. 주변에서도 그래요. 지방지로 등단해서 아주 특출하지 않는 이상 어디다 비비겠냐는 소리를 듣기도 하죠."

- 이야기를 들어보니 요즘 젊은이와 닮아있는 것 같다. 한때 '지여인'이란 말이 유행했다. 지방대 출신 인문계열 여자는 취업이 어렵다는. 결국 자신이 잘하는 일, 혹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보다 돈을 벌기 위해 취업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정말 안타깝다. 신춘문예 당선을 목표로 하는 사람도 많은데, 지방지 등단은 의미 없는 것인가.
"꼭 지방지만 그런 것은 아니에요. 주요 일간지도 마찬가지죠. 신춘문예 자체가 그런 것 같아요. 신춘문예로 당선된 소설가 중에 잘 된 사람은 3년에 한 명 정도 나올까 말까죠. 신춘문예 당선자라고 단편소설을 가지고 가서 소설집 내달라고 하면 출간해주는 출판사가 얼마나 될까요? 오히려 연예인이 소설을 썼다고 하면 잘 내주지 않을까요?"

- 그러면 작품을 어떤 방식으로 세상에 소개하려고 하나.
"수필을 열심히 쓰고 있어요. 제 수필이 주목을 받을 수 있다면 소설도 세상에 소개할 기회를 얻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에요. 제가 쓴 소설들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가 없어요. 그렇다고 자비로 소설집을 출간한들 누가 읽겠어요. '잉여작가'의 '잉여작품'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돈을 벌어서 자비로 수필집을 내고, 조금이라도 주목받을 수 있다면 제 소설들도 조금은 주목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 소설을 소개하기 위해 수필을 열심히 쓴다는 말이 뭔가 출발점이 다른 사람 사람들이 겪는 고통처럼 들린다. 등단하고도 전업 작가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게 씁쓸하다.
"전업 작가란 말을 들으니 얼마 전 친구와의 대화가 생각나네요. 무슨 대화를 하던 중이었는데 저더러 팔자 좋은 며느리라더군요. 평소라면 웃고 넘어갈 말이었는데 그날은 뭐라고 했어요. 내가 팔자가 좋은지 모르지만 주 직업이 며느리는 아니라고. 친구는 며느리가 직업인 사람이 어디 있냐고 하더라고요.

제 생각엔 시댁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은 주 직업이 며느리이고, 자식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은 주 직업이 부모이고, 회사이야기를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은 직장인이라고 했어요. 나는 글에 관한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하니 내 주 직업은 작가라고 했어요. 물론 주 직업이라고 말하려면 이걸로 생계도 유지하고 그래야 하지만."

- 주 직업이 작가인데, 소설을 쓰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 하고, 유명하지 않아서 다른 글을 또 써야 한다니. 마치 지방대 출신의 취업준비생이 자격증 따려고 공부해야 하고, 공부하려면 돈을 벌어야 하고, 같은 조건으로는 경쟁력이 없으니 뭐라도 하나 더 해야 하는 것 같다.
"어떤 땐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은 아닌가 생각될 때도 있어요. 평소 책을 가까이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꾸만 부담을 떠넘기는 꼴은 아닐까 하고요."

- 그런 생각까지 하면서 글을 써야 하나? 왠지 취업 못한 청년이 '저 밥을 먹어도 되나요?'라고 말하는 기분이다. 그러면서도 왜 글을 쓰는가?
"성공한 작가가 되지 못하는 이유 중엔 제가 가진 것이 턱없이 부족한 탓이 클 테지요. 지금은 성공이라는 단어를 제 앞날에서 지워버렸어요. 그보다는 글을 쓰며 얻는 것을 생각합니다. 글뿐이 아닐 거예요. 누구나 무언가를 하며 살아가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의 공을 세우지 못한 사람은 탈락자가 되기 일쑤이지만 그렇더라도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구원을 생각하며 살 수밖에 없잖아요. 죽은 뒤의 구원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의 구원 말이에요. 한 가지 기준으로만 모두가 억압 받고 살아가야만 한다는 건 불행이에요. 제게 있어 글쓰기는 살아 있는 시간 동안의 구원을 이루는 하나의 길입니다. 삶을 증명하는 길 말이지요."

<삐딱한 임하 씨의 삐딱한 일상>
 <삐딱한 임하 씨의 삐딱한 일상>
ⓒ 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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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삐딱한 임하 씨의 삐딱한 일상> 이번 수필집 제목이 재미있는데 특별히 이렇게 지은 이유가 있는가.
"'삐딱하다'는 한쪽으로 기울어지거나 바르지 못하고 엇나간 상태를 말하지만 저는 세상을 보는 시선의 각도를 삐딱하게 잡기로 했달까요. 저는 '바르다'는 것을 대열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것, 이탈하지 않는 것, 큰 무리에 섞여 그 속에 잘 녹아드는 것이라고 정의했어요. 그래서 좀 다른 각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필요했던 거지요. 오래전 별명이 '투덜이 스머프'였어요. "넌 왜 그렇게 인생에 불만이 많냐?"는 소리도 적잖이 들어봤고요. 그런 제 성정과도 맞는 부분이 있어서 삐딱함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그리고 별 볼 일없는 사람이 살아가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좀 재미있게 써보고 싶었고요."

- '작가와 노동', '예술가의 삶', '대중문화와 문학' 등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다 쓸 순 없을 것 같다. 인터뷰를 마치며 한 마디 부탁한다.
"오디션 프로가 인기를 끌고, 경쟁이 곧 생존인 것마냥 여겨지는 세상에서 최소한 내가 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삶을 산다는 건 정말이지 답도 없고 끝나지도 않을 과제에 다름 아닐 거예요. 기대치가 높고, 남과 경쟁하거나 비교한다면 더욱 그렇겠지요. 잉여작가인 나는 오롯이 내 길을 걷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상당히 쓸쓸할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아요. 꼭대기에서 비상하는 사람들보다도 저 같은 수많은 사람들이 낸 저마다의 무수한 길들이 탄탄한 땅을 이루거든요. 옆을 보면, 앞과 뒤를 보면 함께 걷고 있는 사람들을 아주 쉽게 볼 수 있어요. 같이 걸어가는 거지요. 잉여작가인 나는 또한 상생의 작가이기도 한 셈이죠."

"왜 쓰는가?" 질문을 받고 고민하는 임하 작가
 "왜 쓰는가?" 질문을 받고 고민하는 임하 작가
ⓒ 유병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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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한 임하 씨의 삐딱한 일상 - 임하 콩트에세이

임하 지음, 북인(2018)


태그:#잉여작가, #임하, #삐딱한 임하, #등단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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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에 회사에 다니고 주말에 글을 쓰는 주말작가입니다. 다양한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좋은 기사를 쓰고 싶습니다. https://brunch.co.kr/@yoodluffy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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