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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수업을 다 마친 어느 저녁, 어머니에게 안부를 물으려 전화를 했다. 말이 좋아 안부지 통장잔고가 결국에는 '0'이 되었다는 알림에 가까웠다.

통화 말미, 어머니는 오늘 하루 힘들게 한 영업 이야기를 하시며 "엄마 나쁜 사람들이랑 안 엮이게 기도해 줘"라고 하셨다. 농이라도 어머니께 "일 그만해 아들이 용돈 줄게!"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 학기를 다니며 취업을 준비하는 피부양인일 따름. 그래서 그 말이 너무도 당차고 허황된 말이라 입 밖에 꺼낼 수 없었다.

대신 "고마워요, 아껴서 쓸게"라고 했다. 이 정도는 내가 해도 되는 말이다. 어머니와 통화가 끝나고 찝찝함이 어디엔가 남았다. 그래서 오래간만에 경제활동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책상에 책들이 보인다. 미니멀리즘이 대세라던데 나도 책장을 비우자고 생각했다.

이미 다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 책이나 한 번 읽고 책장에 박아 둔 시집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평소에는 좀처럼 펼쳐보지도 않던 책들. 중고서점에 보낸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없던 애착이 뿜어져 나오기도 하고 책과 얽힌 추억이 샘솟기도 했다.

이 책은 군 휴가 때 대전의 모 서점에서, 저 책은 친구와의 약속 전 강남의 교보문고에서... 책들마다 각자 내 삶의 어디쯤엔가 나타나 기다림을 채우고 생각을 채웠다.

"책이 다시 보고 싶어지면 도서관에서 빌리자."

마음을 고쳐먹고 큰 종이가방에 색색의 책을 담았다. 책 6권이 담긴 종이가방은 생각보다 무겁다. 족히 2~3kg은 되는 것 같은데 딱 킬로당 만 원이면 좋겠다. 비를 뚫고 시내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6권 책을 다 팔고 나니 딱 손에 만 원이 놓였다.
 6권 책을 다 팔고 나니 딱 손에 만 원이 놓였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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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고 가봤던 중고서점인데 마음이 어딘가 싱숭생숭해졌다. 그때는 누군가가 보던 책을 사러 왔는데 오늘은 내 책을 누군가에게 보내러 가는 길이라 그런 것일까. 길고 긴 계단을 내려가 번호표를 뽑았다. 곧 주황색 종이가방 안, 책들과 이별한다.

"회원이신가요?"
"네."

짧은 문답이 이어지고 책들을 판매대에 올려놓았다. 책을 깨끗하게 보는 터라 아마 제값의 절반 정도 받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랬는데 아니 웬걸. 6권 중 한 권은 상태 불량으로 판매 불가다. 상급 책은 2권이었다. 나는 깔끔하고 깨끗하게 봤다 생각했는데 언젠가 배낭 속에서 생채기가 났던 모양이다. 나한테나 귀한 책이지 사는 사람에겐 흠결 투성이었다. 다 팔고 나니 딱 손에 만 원이 놓였다.

왼손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다지도 가벼워도 되는 걸까 싶었다. 소장도서 검색대에서 책을 살펴봤다. 꼭 사야 하는 참고서가 만 팔천 원에 팔리고 있었다. 중고인데 왜 이리 비싸단 말인가.

아까는 내 책이 싸게 팔려 서럽다가 남의 책이 싸게 팔리길 바라다니 고얀 심보다. 인터넷으로 또 중고가를 살펴본다. 원래 삼만삼천 원짜리 책이라 그나마 이 가격이 가장 싸다. 책을 사기로 했다. 결국엔 돈 벌러 와서 돈을 더 써버리고 말았다.   

돌아오는 버스 안, 비가 더 거세졌다. 빗물이 달라붙는 버스 창을 보며, 나는 유행에 안 맞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언제 읽을지 모를 책과의 이별일 뿐인데도 어딘가 허하고 씁쓸했다. 그냥 책을 쌓아둘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머니에게도 그냥 고맙단 말 대신 용돈을 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태그:#사는이야기, #중고도서,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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