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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들어 남미도 점점 주목받는 매력적인 여행지로 떠오르고 있다. 워낙 멀고 땅덩이 자체가 큰 대륙이라 단기보다는 장기여행이 더 대세인 듯하다. 그래서 방학을 맞은 대학생과 퇴사한 회사원부터 퇴직금 한 귀퉁이를 들고 떠나는 이른바 '꽃보다 청춘'들까지, 여행에 대한 열정도 그 세대를 아우른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국민루트까지 있을 정도다. 보통 크게 시계와 반시계 방향으로 나뉘며 항공편이 비교적 쉬운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그리고 멕시코(정확히는 북미로 나누어진다) 등지에서 스타트를 끊는다.

나같은 경우는 시계도 반시계도 아니다. 실은 아니라기 보다는 '모른다고' 해야 맞겠다. 반감될 여행의 재미를 걱정해 처음 방문할 한두 나라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미래의 나에게 맡기기로 한 것이다. 어차피 변수가 많을 길 위의 여행이라 세세한 계획을 세우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처음 설레는 순간부터가 여행의 시작이라면 내게는 론니플래닛에서 나온 가이드북을 구입하는 순간부터가 여행의 시작이 맞을테다.
▲ 론니플래닛의 배낭여행 전용 남미 가이드북. 처음 설레는 순간부터가 여행의 시작이라면 내게는 론니플래닛에서 나온 가이드북을 구입하는 순간부터가 여행의 시작이 맞을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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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국적기의 한식이라도 기내식이 그래봤자, 하는 마음으로 큰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튜브형 약고추장이 제일을 하는지 썩 든든한 한끼 식사였다. 전주비빔밥에 그것에 비유하지는 않겠지만 자부심를 가져도 될듯하다.
▲ 생애 첫 제대로된 한식 기내식 아무리 국적기의 한식이라도 기내식이 그래봤자, 하는 마음으로 큰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튜브형 약고추장이 제일을 하는지 썩 든든한 한끼 식사였다. 전주비빔밥에 그것에 비유하지는 않겠지만 자부심를 가져도 될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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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번 남미여행에서 첫 발을 내디딜 곳은 어디일까? 이왕 마음먹은 거 허리부터 푹 찌르고 들어가기로 했다. 그곳은 바로 이 지구상에서 가장 긴 나라로 알려진 칠레다(남북의 길이가 4270km에 육박한다).

나를 그곳으로 실어나를 비행기는 호주 시드니를 거쳐야 한다. 그렇다. 환승을 한 번 해야하는 표를 산 것이다. 단언컨대 가고 싶은 날짜에 적당한 가격의 직항을, 그것도 한국에서 남미 가는 표를 구하기는 정말 하늘에 달따기, 별따기다.

웃긴 사실은 이번 첫 비행기가 시드니 직항이라는 것이다. 호주에 지난 4년 동안 살았지만 단 한 번도 그 나라를 한방에 오고 나간 적이 없었다. 오호라, 그런데 호주에 갈 일이 없는 지금, 처음으로 호주를 곧장 가는 것이다.

이번이 처음인 시드니. 호주서 살았던 4년동안에도 한번도 방문한적이 없다. 6시간동안의 길다면 긴 비행기 스탑오버 시간을 내 첫 시드니 방문으로 쳐도 될까.
▲ 시드니 국제공항 도착. 이번이 처음인 시드니. 호주서 살았던 4년동안에도 한번도 방문한적이 없다. 6시간동안의 길다면 긴 비행기 스탑오버 시간을 내 첫 시드니 방문으로 쳐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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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남미가 얼마나 우리나라에서 먼 나라인지 피부로 느껴졌다. 사실 한참 적당한 가격의 표를 물색중일 때는 유럽을 거쳐 가는 비행기도 보았다. 나는 유럽 또한 직항으로 가본 적이 없다. 지금 가고 있는 남미 대륙은 호주나 유럽을 경유지로 이용해서 가는 곳인 것이다.

'아, 내가 정말 멀리 가는구나.'

설렘과 걱정이 반죽된 감정이 썰물처럼 밀려왔다. 그 파도에 잠식 당해 가슴이 꼭 죄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오랜만에 다시 자유를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자꾸 멀리 가는 딸자식 소식이 궁금하실 부모님께 톡 하나를 날려 드리고 시드니에서 칠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내 자리는 호불호가 그렇게 많이 갈린다는 창가석이다. 처음 좌석 번호를 확인했을 때는 거의 '아싸!'라고 외칠 뻔했다. 지상에서 멀리 떨어진 상공에서 여행지의 모습을 처음으로 눈에 담는 것, 이것이야말로 여행의 첫 번째 하이라이트 아닌가.

옆자리에 앉은 호주인 노부부에게 여유 있는 눈인사를 보내고 앞자리에 꽂힌 잡지들을 뒤적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칠레에 도착할 때까지 장장 약 12시간 동안 시간은 결코 빨리 가지 않았다. 첫 비행기때 넉넉히 자서 그런지 잠은 절대 오지 않는다. 그리고 너무 피곤한 나머지 시간때우기 용으로 다운로드 받은 책이나 영화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온몸이 굳어져 가는 착각이 들었고 정신은 그저 멍-했다. 사람과 좀비의 중간에 무엇이 있다면 그건 아마 피곤에 절어 있는 그 상태의 나일 것이다. 그렇게 기록적으로 긴 비행시간이 아주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마치 헬스장에서 30분가량 런닝머신을 뛴 것 같지만 실제로는 5분 밖에 지나지 않았던 기억이 악몽처럼 떠오를 정도였다.

비행 시간이 너무 길어서 언젠가는 칠레에 도착한다는 사실조차 믿어지지 않았다.
▲ '기다림은 길고 그 끝은 달았다.' 비행 시간이 너무 길어서 언젠가는 칠레에 도착한다는 사실조차 믿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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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간 비행에는 정말 사람의 피를 말리는 무엇이 있다. 승무원들을 제외한 모두가 나와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순간에도 우리가 마치 단체로 식물인간 체험중인 자원봉사자들 같다는 상상을 해본다. 햇볕이 너무 강해서 닫은 창문 사이에서 한 줄기 빛이 아스라이 스며들었다. 그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초장부터 이런데... 얼마나 일지는 몰라도 내 남미 여행이 정말 장난 아니려다보다.'

옆자리 승객들이 아직 꿈나라를 헤매고 있어서 창문을 아주 살짝 빼꼼 열어보았다. 그리고 한 15분간 눈을 떼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솜털같은 구름이 조금 끼어 있었지만 칠레의 상공을 바라다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건 달이었다. 그건 마치 내가 늘 상상해 왔던 달 표면의 그것이었다.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새 피곤함도 싹 가신 듯했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이 공룡들이 살았던 백악기때 조산 활동을 일으킨 안데스 산맥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취침중인 옆자리 승객들 깰까봐 조금만 '빼꼼'하고 열어보았다.
▲ '빼꼼' 취침중인 옆자리 승객들 깰까봐 조금만 '빼꼼'하고 열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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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의 창밖으로 보이는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의 전경.
 비행기의 창밖으로 보이는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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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억년도 더 전에 시작한 이 지각운동은 지금까지도 이 대륙 전체에 계속되고 있다. 농경문화가 시작되기 전인 시기에 창을 던져 사냥을 하고 바구니에 과일 채취를 하는 원시 부족이 눈에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아 남아메리카...'

수학 시간이 싫어서 딴짓으로 여행기를 읽다 남미에 대한 호기심을 갖기 시작한 여고생이 있었다. 그리고 10여 년의 시간이 지난 뒤 그녀는 아주 먼 길을 지나 칠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것만으로도 한 절반은 성공적인 인생인 것 같았다. 지금 내 가슴은 열기구의 풍선보다 더 크게 부풀어 오르고 있다. 아마 높은 고도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작년 12월말,
칠레 산티아고행 비행기 안에서


태그:#여행, #남미, #칠레, #여행기, #장시간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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