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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에 안내판, 오른쪽 멀리 사당인 단충사가 보이는 신암선열공원 전경
 왼쪽에 안내판, 오른쪽 멀리 사당인 단충사가 보이는 신암선열공원 전경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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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신암선열공원은 '전국 유일의 독립운동가 전용 국립묘지'이다. 이곳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찾을 곳은 단충사이다. 단충사는 한산도의 충무사, 칠백의총의 중용사에 해당되는 건물이다. 즉, 사당이다. 참배 시설이므로 공원 전역에서 가장 먼저 들러 고개를 숙이는 것은 당연한 순서이다.

단충사에서 나와 왼쪽으로 가면 1번 송서룡 지사의 묘소가 가장 먼저 나타난다. 그 뒤는 51번 현영만 지사의 묘소이다. 묘소의 번호가 1에 이어 2가 아니라 51로 이어지는 데에 특별한 의미는 없다. 이 국립묘지에 51번째로 안장된 분이 현영만 지사인데, 묘터를 1번과 2번 사이에 잡았을 뿐이다.

52분의 독립운동가를 모시고 있는 신암선열공원

1번 송서룡 지사의 묘소와 51번 현영만 지사의 묘소 참배 소감은 기사 <최초의 독립운동가 전용 국립묘지, 비문은 '안습'>에 이미 밝혔다. 이제 현영만 지사의 묘소 뒤에 있는 2번 신길우(申吉雨) 지사의 묘소를 참배할 차례이다. 국가보훈처 누리집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이하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수록되어 있는 신길우 지사 관련 설명을 읽어본다.

"생몰년도 : 1924.2.11.~2003.12.5.
출신지 : 경북 고령
운동 계열 : 광복군
훈격(연도) : 애족장(1990년)


공적 내용 : 1943년 10월 일제에 강제로 징집당하여 중국 남경 지구 주둔 일본군 부대에 배속되어 있던 중 중경에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와 광복군(光復軍)이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그는 광복군으로 입대하여 항일투쟁을 하기로 결심한 뒤 1944년 4월 일본군을 탈출, 중국군 유격대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이어 1945년 4월 중경에 도착하여 우선 토교대(土橋隊)에 입대하고 광복군총사령부 경위대(警衛隊)에 배속되어 복무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봄빛이 뚜렷한 신암선열공원
 봄빛이 뚜렷한 신암선열공원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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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길우 지사가 당한 일제의 강제징용(强制徵用)은 지금도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사안으로, 특히 우리나라와 일본 두 나라 사이에는 여전히 심각한 현안으로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은 노동력 보충을 위해 조선인을 유인하거나 속여서 일본의 토목 공사장이나 광산 등지로 끌고(徵) 가서 혹사했고, 멀리 동아시아까지 잡아 가 철도 공사 등에 강제로 투입하여 부려먹었다(用).

뿐만 아니라 1937년의 중일전쟁 뒤에는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한 후 '국민 징용령'을 실시, 마구잡이로 조선인을 끌고 갔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에 의해 강제 동원된 조선인은 113만 명 혹은 146만 명이나 되는 것으로 조사되어 있다.

심지어 일제는 '근로 동원'이라는 명목 하에 국민학생(현재의 초등학생)까지 군사 시설 공사장으로 내몰았고, 1944년에는 '여자 정신대 근무령'을 발표, 12세에서 40세까지의 여성 수십만 명을 강제 징집하여 군수 공장 등에서 일을 하게 하거나 군대의 '위안부'로 보내는 만행을 저질렀다.

수십 만 명의 조선 여인들, 강제 위안부로 끌려 갔다

강제 징용된 조선인은 집단 학살을 당하기도 했다. 집단 학살의 대표 사례는 일본 영토 중 가장 북쪽 땅인 훗카이도의 동북쪽에 흩어져 있는 치시마(千島) 열도 노동자 5000여 명과 평양 미림 비행장 노동자 800여 명이 떼죽음을 당한 일이다. 일제는 강제 징용한 조선인들을 군사 시설 공사에 투입하고는 일이 끝나자 기밀 보호를 이유로 참혹하게 학살했다. 일본군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동남아시아에서 철수할 때에도 조선인들을 섬의 동굴에 집어넣어 한꺼번에 몰살하기도 했다.

일본이 저지른 더 이상 야만적일 수 없는 비인간적 강제 징용의 참사... 신길우 지사의 묘소 앞에 서서, 아직도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보상을 거부하고 있는 일본의 낯 뜨거운 철면피를 생각한다. 도대체 인간의 인면수심(人面獸心)은 어느 정도까지 지독할 수 있는 것인가! 

 맨 앞에 신길우 지사, 그 뒤로 김명천 지사의 묘소가 보이는 모습
 맨 앞에 신길우 지사, 그 뒤로 김명천 지사의 묘소가 보이는 모습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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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 신길우 지사의 묘소 뒤는 3번 김명천(金明天) 지사의 유택이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을 읽는다.

"생몰년도 : 1916.9.11.~1999.7.22.
출신지 : 함북 회령
운동 계열 : 광복군
훈격(연도) : 애국장(1990년)

공적 내용 :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에 입대하여 제2지대 대원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김명천 지사 묘소 앞 표지석
 김명천 지사 묘소 앞 표지석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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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길우 지사와 김명천 지사의 공적 내용에 연이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이 거론되고 있으므로 그 둘에 대해 알아본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의 설명이다.

"3.1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일제 패반(覇絆, 강력한 힘으로 남을 억누름)에서 독립한 정부 수립에 있었으므로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전민족 운동으로 발전하던 1919년 4월에는 민족 지도자들에 의해서 임시정부 수립을 보게 되었다. 임시정부의 수립은 국내외 곳곳에서 계획되었는데 그것은 3.1운동의 정리 작업이면서 새 국면에 대처하는 민족운동으로서 독립운동의 발전이었다.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가는 3.1운동을 주시하면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공표한다는 것은 일제에 대하여 민족의지의 결정적 표현으로서 그들의 퇴각을 촉구하는 의미로 중요했고, 또 일제가 퇴각할 경우의 과도적 총치 체제로도 생각해 볼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일제의 통치가 계속 강화될 경우에는 전민족 운동으로 나타난 3.1운동을 조직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시키는 의미에서 더욱 중요했다."

3.1운동의 목표는 독립에 있었고, 독립국가에는 필연적으로 정부가 존재하므로 1919년 당시 우리 선조들은 3.1운동 이후 민족의 의지를 모아 임시정부를 수립했다는 요지이다. 다만 임시정부가 여러 곳에 생겨났다는 대목이 의아스럽다. <한국사>는 독자의 그같은 궁금증을 미리 짐작이라도 한 듯 보충설명을 해준다.

"임시정부의 수립을 여러 곳에서 발표했다고 해서 민족의 분열에 의한 정부의 난립으로 볼 것이 아니라 3.1운동의 확대 과정에서 전 민족의 임시정부 수립을 요망했기 때문에 나타난 애국심의 발로 현상으로 보아야 할 일이다. 즉 정부 수립을 요망하는 민족의 의사를 식민치하에서 통일하여 정리할 수 없었으므로 각처(各處, 여러 곳)에서 추진 공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얼마 후에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통합 일원화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를 더 읽어본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일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마련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기념일, 언제인가?> 학술회의가 2018년 3월 26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렸다.

그 동안 대한민국 정부는 1987년 제9차 헌법을 개정하면서 전문에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명문화했고, 1989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을 4월 13일로 제정하여 1990년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을 거행해 왔다.

하지만 학계 일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일'이 1919년 4월 11일이라는 의견을 제시해왔다. 이 날 학술회의가 열린 것은 그 때문이다.

[참고] 국가보훈처가 1995년에 발간한 <알기 쉬운 독립운동사(박성수 저)>는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 의정원이 구성되고, 13일 내외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을 선포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3.1운동을 전후로 국내ㄱ외 7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상해를 거점으로 1919년 9월 개헌 형식으로 통합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되었다. 상해에 있던 시기(1919∼1932)에는 국내·외 동포사회에 통할 조직을 확대하면서 외교 활동이나 독립전쟁 등을 지도·통할하는 데 주력하였다."

3.1운동 이후 독립을 열망하는 민족의 의지가 분출되어 무려 일곱 개나 되는 임시정부가 생겨났는데, 이내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통합되었고,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나라를 대표하여 외교 활동과 독립전쟁을 종합적으로 수행하였다는 뜻이다.

임시정부, 독립군 창설하여 일제에 대항

임시정부가 수행한 독립전쟁 임무 중 하나가 광복군의 창설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0년 중국 충칭(重慶)에서 총사령관에 지청천, 참모장에 이범석을 선출한 항일 군대를 창설하고 이름을 광복군이라 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광복군은 대일본 선전포고를 했다. 광복군은 1945년 9월 국내 수복 작전을 세워 놓고 훈련을 실시하던 중 8·15 해방을 맞았다.

김명천 지사 왼쪽은 4번 박영진(朴永晋) 지사의 묘소이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을 읽는다.


생"몰년도 : 1921.3.27.~1950.6.25. 
출신지 : 경북 고령
운동 계열 :  광복군
훈격(연도) : 애국장(1993년)

 박영진 의사 묘소 앞 표지석
 박영진 의사 묘소 앞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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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 내용 : 1939년 광복군 제5 지대장인 나월환(羅月煥)이 광복군으로 모여드는 애국청년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개설한 한국청년간부훈련반에 입교하여 군사교육을 받은 뒤 졸업하였다. 1942년 5월 광복군 제1, 2, 5지대를 합하여 개편한 제2 지대의 제2 구대 제3 분대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그 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와 주중경(駐重慶) 영국 대사관 부관 측과의 여러 차례에 걸친 군사 합작 교섭이 주효하여 1943년 6월 광복군의 이청천(李靑天, 池靑天) 총사령관과 주인도(駐印度) 영국군 동남아 전구 총사령부 대표 멕켄지(Mackenzie) 정보참모 사이에 한영 상호협정이 정식 체결됨에 따라 광복군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인면전구(印緬戰區)에 출정하게 되었다. 이에 영국과의 상호 군사협정에 의거하여 주인도 영국군 동남아 전구 총사령부에 파견할 인원을 선발하였는데, 그는 공작대 대원으로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버마


1948년 1월 4일 영국으로부터 독립되었을 때에는 나라 이름을 버마Burma라 하였으나 1989년 6월 이래 미얀마Myanmar로 국명을 바꾸었다.

1943년 12월 전방 지구인 임팔(Imphal)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군 제 15군단 사령부에 도착한 광복군 인면 공작대는 세 곳으로 분산 배치되었는데, 그는 제 201부대 본부와 같이 활동하였다. 그 후 임팔 작전에서 승리한 공작대는 이곳에서 철수하여 1945년 연합군이 버마 지구의 일본군에 대한 총반격을 개시하자 공작대도 3개 반으로 나뉘어 각 부대에 배치되었다.

그는 버마 중북부 지역으로 배치되어 버마 수도 랭군을 목표로 진격하는 상륙 작전에 참전, 전과를 올리면서 동년 7월초까지 연합군의 승리에 공헌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두희 지사 묘소 앞 표지석
 김두희 지사 묘소 앞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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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진 지사 왼쪽은 5번 김두희(金斗熙) 지사의 묘소이다. 김두희 지사는 1921년 1월 4일 경북 성주에서 출생하여 2000년 2월 29일 타계했다. 일본 방면에서 독립운동을 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그 이전인 1986년에는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김두희 지사는 1939년 5월 일본 경도 입명관중학교 야간부에 재학할 때 증근 타일 주식회사의 직공으로 있으면서 이수영(李秀濚) 등과 함께 비밀결사 민족부흥회(民族復興會)를 조직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경도 지방 책임자로서 조국 광복을 위하여 활약했다. 1940년 3월경에 피체되었다가 1940년 7월 16일 석방되었다. 그 후 1940년 12월 28일 다시 피체되어 1941년 5월 7일 명고옥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의 형을 받았다.

일본군으로 강제징집 되었다가 탈출해 광복군 입대

김두희 지사 뒤는 8번 장성표(張星杓) 지사의 묘소이다. 장성표 지사는 1924년 8월 27일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1999년 1월 12일 타계했다. 지사는 처음에는 중국 호북성 신점진에 주둔해 있던 중국군 유격대에서 항일 활동을 하였다. 그 후 광복군 제1지대 제3구대에 편입되어 항일 활동을 전개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계속)

 신암선열공원 제1 묘역 전경
 신암선열공원 제1 묘역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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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 국가보훈처 <알기 쉬운 한국독립운동사>, <독립운동가 공훈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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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장편소설 <딸아, 울지 마라><백령도><기적의 배 12척> 등을 썼다. <집> 등 개인 사진전을 10회 이상 열기도 했다.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 역임, 전...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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