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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줄 아는 게 그거밖에 없어서 했다고 봐야지요. 그냥 이렇게 살았어요."

동그란 안경알 너머로 눈이 반짝인다. 거뭇한 콧수염 아래로 다부지게 다물고 있던 입이 열리면서 소박한 감회가 뉘엿뉘엿 흘러나온다. 쉰을 넘긴 남자의 삶이 여기에 있다. 어떻게 살면 '그냥'이라는 담백한 단어로 자신이 살아온 궤적을 말할 수 있을까? 서울 종로구 인사동 G&C광주전남갤러리에서 오는 10일까지 열리는 조정태 개인전에서 들은 첫마디다.

 夢幻-한 여름 밤의 끔.  조정태.  193.9x520.0cm.  Mixed media.  2016
 夢幻-한 여름 밤의 끔. 조정태. 193.9x520.0cm. Mixed media. 2016
ⓒ 김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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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줄 아는 게 없어서'라는 말은 아마도 그림을 제일 좋아하고 잘해서 일 것이다. 그래서 그림을 그렸다니 참으로 부럽다. 그것이 조정태 작가의 전부가 되고, 그것이 삶으로 오롯이 남았다.

관객들을 만나는 조정태 작가의 뒷모습을 눈으로 따라가려니 대나무가 생각이 난다. 대나무는 속이 비어 있다. 꺾이지 않고 하늘로 쭉쭉 뻗어 올라가기 위해 제 몸에 마디를 만든다. 한 번 뻗어 올라 마디를 만들고, 또 뻗어 올라 마디를 만들고.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가는 자신을 받치는 일임과 동시에 자기점검일 것이다.

- 그림 그릴 때는 뭘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세요?
"내가 뭘 그리려고 할 때의 감정 상태? 그게 가장 컸던 거 같아요. 대상이나 사건을 보면서 내가 느꼈던 진솔한 감정. 혼자 심연으로 가라앉은 듯한 그림을 그렸다가 때로는 화산처럼 폭발하는 느낌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어요. 그래서 그런지 작품들을 걸어 놓고 보니 딱히 뭐 주제가 일관성 있어 보이지는 않네요."

 좌 : 군상 2.  조정태.  130.5x160.0.  혼합재료.  2013
우 :  군상 1.  조정태.  130.5x160.0.  혼합재료.  2013
 좌 : 군상 2. 조정태. 130.5x160.0. 혼합재료. 2013 우 : 군상 1. 조정태. 130.5x160.0. 혼합재료. 2013
ⓒ 김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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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작가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 전시장의 작품들을 곁눈질한다. 서정적인 풍경화, TV 드라마 같은 연작, 스냅사진 같은 자화상,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주는 작품뿐 아니라 역설과 비꼬임이 엿보이는 작품도 있다. 그의 내면에는 참 많은 것들이 있는데, 그걸 이제 열어서 조금씩 보여 주겠다는 거다.

"그림의 사이즈가 크더라도 그냥 일기지요. 그냥 일기 쓰듯이 그림을 그린 것 같아요. 그래서 감정 기복이 심한 그대로 그림에서 보이니 좀 두서없이 보일 수도 있어요. 내가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를 표현한 것 같은데 아직 내 안의 것은 잘 모르겠어요. 보이는 것을 대상화시켜서 그렸어요. 물론 그릴 때 어차피 내 안의 것들이 시켜서 했겄지만. 되도록 안 속이고 그리려고 했는데 그림이니까 속이는 대목들도 있겄지요."

그는 광주 출신이다. 졸업 후 그림을 통해 사회참여적인 활동을 해왔다.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 광주민예총, 민족미술인협회 광주지회장을 맡아왔다. 환경조형물이나 벽화운동 같은 공공미술분야에 꾸준히 참여해 온 지역의 성실한 활동가로도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전만 7번째다. 열정과 노력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위 :  천하도.  조정태.  162.1x260.6cm.  Mixed media.  2014
아래 : 신 천하도.  조정태.  336x193cm.  Mixed media.  2014
 위 : 천하도. 조정태. 162.1x260.6cm. Mixed media. 2014 아래 : 신 천하도. 조정태. 336x193cm. Mixed media.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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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천하도'라는 작품도 참 좋네요. 무등산인가요?
"지리산. '천하도'는 한동안 단체 활동을 접고 '그림 그릴 거야' 하면서 혼자서 작업실에 처박혀 그리 작품이에요. 가부좌 틀고 앉아 있으니 좀 차분한 느낌의 그림이 나오더라고요. 지리산을 좀 더 큰 사이즈의 캔버스에 그리고 있었는데 그때 세월호 사건이 터졌어요. 감정이 북받치더라고요. 그건 국가부도사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들은 죽어 가는데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고... 가슴에서 불이 나니 그냥 그리던 산을 불태운 거죠. 그때 내 감정이 저랬던 거죠. 싹 태워버리고 싶었어요. 그때 그 심정을 그린 게 저쪽에 있는 '신 천하도'예요. 그날 화가 많이 났으니 그냥..."

그때 정말 많이 화가 났던 모양이다. 평소 때와는 달리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평소와는 잠시 다르다. 다시 목소리가 평온하게 돌아온다. 다시 대답도 짧아진다.

그는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운영하는 '북경창작센터' 제8기 입주 작가 출신이기도 하다. 제 자랑도 좀 하면 좋을 텐데 싶다가도 역시 그림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 딱 '작가'구나 싶다.

일기처럼 그림 그리는 이유

 좌로부터 차례대로 게으른 자화상.  회의1. 회의2. 회의3. 일부분
 좌로부터 차례대로 게으른 자화상. 회의1. 회의2. 회의3. 일부분
ⓒ 김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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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 작가님의 자화상 시리즈도 저는 재미있더라고요. 작가님 성격대로 까칠하고, 어딘가 좀 불량스럽기도 하고, 의심도 많은 것 같고.
"자화상은 진짜로 일기여. 꼬마 때부터 계속 그려왔는데 사람들이 재밌다고 해요. 어떤 때는 장난스럽게, 어떤 때는 진지하게 그려보는데 작은 즐거움? 자신을 들여다보는 작업을 하게 되는 거니까 자주 하게 돼요."

- 중국창작지원센터에 가 있는 동안 그린 응시도 재밌더라고요. 마치 '그거는 진짜야?'하고 물어보는 것 같은 표정? 뭐랄까, 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거 가짜지?'하고 묻는 거 같더라고요.
"중국에 갈 때 어쩌면 그쪽 사회에서의 리얼리즘 미술에 대해 기대를 너무 많이 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가보니까 달라요. 역시 그림은 그 사회를, 그 땅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나오는 거구나 싶더라고요. 떠나 보니까 내가 서야 할 자리를 알겠더구먼요. 이제 다시 마음을 다잡고 안 팔리는 그림 제대로 한 번 그려볼라혀요."

 응시2.  조정태.  227.3x181.8cm.  oil on canvas.  2016
 응시2. 조정태. 227.3x181.8cm. oil on canvas. 2016
ⓒ 김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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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쁜 그림도 많고 눈길을 끌 만한 그림도 많은데 초대장에는 저 그림을 쓰셨죠? 제가 안 예쁘다고 표현한.
"'몽환 – 한여름 밤의 꿈'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제목을 따왔는데 잠깐, 순간적으로 확 덮치는 짜증? 악몽 같은? 그런 느낌을 표현하려고 했죠. 조직생활을 오래 하면서 공동체나 이상, 꿈 그런 것들이 다는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실체의 삶, 실현되지 못하는 이상을 정해놓고 사는 구호와 같은 삶, 나 자신도 완벽하게 해내지 못하면서도 교과서 같은 이야기만 할 때 나 자신이 위선적으로 보였죠. 그런 것들을 작정하고 그렸어요. 그렇다고 지나간 삶을 후회하는 건 아녜요. 자양분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별이 된 사람들.  조정태.  65.1x99,9cm.  oil on canvas.  2012
 별이 된 사람들. 조정태. 65.1x99,9cm. oil on canvas. 2012
ⓒ 김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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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구나. 그 그림을 처음 접했을 때 느낀 알 듯 모를 듯한 그 감정, 내 속에 있는 것들이 끈적끈적하게 내 발목을 붙잡는. 죽어라 달렸는데 목적지는 보이지 않고, 달려온 길은 희미해지고, 그렇다고 갈 수도 안갈 수도 없는 입장에서 '나는 뭐지?' 싶을 때 덮쳐오는 그것. 그러나 그것이 나의 살아온 시간들을 계속 지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 여름 밤의 꿈은 때로는 달달하고, 허무하기도 하며, 순간 최고조로 증폭된 짜증이기도 하다. 그래도 꿈은 깨어날 수 있으니 다행이다.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그림을 그릴 때 내가 느낀 것, 내가 생각하는 방식에 집중해왔는데 제가 좀 삐딱해요. 삐딱하게 바라보고, 삐딱하게 얘기해 온 방식들이 과연 관람자와 소통의 방식으로 알맞았는지 다시 의심도 해보고요. 개인적으로는 기록도 같은 그림들을 더 그려보고 싶어요. 지금까지 일기를 쓰고, 악다구니를 해왔다면 규모 있는 소설을 한번 쓰고 싶어요. 소설가들이 소설을 쓰듯이 플롯을 하나 잡아서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을 캔버스라는 화면 속에서 섬세하게 그려보고 싶어요."

 0429-1603-39-121.  조정태.  세월호 아이들의 유품을 그린 연작 앞에 서 있는 조정태 작가. 지난 3월 15일 4인 4색 동행전에서 찍은 사진.
 0429-1603-39-121. 조정태. 세월호 아이들의 유품을 그린 연작 앞에 서 있는 조정태 작가. 지난 3월 15일 4인 4색 동행전에서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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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이렇게 살았어요"라고 이야기하는 조정태를 만났다. 그의 삶에는 그림이 있었고, 그림 속에는 그의 나이가 겪었던 80년대부터 촛불혁명까지 작은 역사드라마가 있었다. 화가는 그리는 사람이다. 대상을 자신만의 눈으로 보고 자신만의 느낌으로 새로운 그 무엇으로 그려낸다. 그저 잘 그리는 것이 아니라 진짜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을 하고, 진짜를 그리고 싶어 한다. 그것에 호흡이 긴 이야기를 담으려고 한다.

전시장 밖 바람이 차다. 4월인데도 활짝 핀 벚꽃 위로 눈이 내려 눈꽃이 핀 날이다. 보이는 게 다는 아니다. 진짜를 보는 눈. 그건 아마도 밑바닥까지 가라앉아 버릴 것을 다 버리고 난 후에 제 속을 텅텅 비운 대나무가 되어서야 다시 마디를 만들고 한마디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들고 오를 것이다. 그가 마디를 만들고 다시 작품들을 들고 돌아올 때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벌써 기다림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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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