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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장이 있던 칼사디야 데 라 케샤(Cazadilla de la Cueza) 알베르게를 떠나며
 풀장이 있던 칼사디야 데 라 케샤(Cazadilla de la Cueza) 알베르게를 떠나며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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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중년 남자들

우려대로 비가 왔다. 비 덕분에 5시 전에 눈을 떴지만 침대에 누워서 자다깨다 했다. 날이 밝은 뒤에 출발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다들 나와 같은 생각인지 연석과 성주도 늑장을 부리고 있었다. 그래도 7시에는 길을 나서야 할 것 같아서 6시 지나서 짐을 꾸리고 밖으로 나갔더니 마틴이 벌써 짐을 다 꾸려놓고는 야외 의자에 앉아서 늦잠 자고 일어나는 순례자들을 둘러보면서 큰소리로 말했다.

"8시에 비가 그치니 그때 저는 출발합니다!"

판초우의를 입고 신발 속으로 물이 들어가지 않게 스패츠(신발 위에 차는 짧은 각반)까지 하고는 7시에 밖으로 나갔다. 거센 빗줄기가 이울어 보슬비로 변했다. 걸을 만했다.

비가 와선지 그동안 태양 아래 날 서게 보였던 풍경들이 누그러졌다. 잿빛 구름이 하늘을 입체적으로 점령했고 시원한 바람이 빗줄기와 동반했다. 연석은 창문 바로 옆에서 자서 감기 기운이 있다며 늦게 출발한다고 했고 성주는 일찍 출발했다(한국 사람이라고 같이 출발하지는 않는다. 목적지가 같아 같은 알베르게에서 만나면 반가울 뿐이다).

어제 저녁 식사를 같이했던 프랑스인 데미안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인생의 재충전을 위해서 이 길을 걷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혹시 한국 중년 남자들을 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한 번 같이 잔 적이 있는데 아주 곯아떨어지더라고(코를 심하게 골았다는 다른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했다. 그 이유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라고 했다.

데미안의 말은 이러했다. 며칠 전에 한국인 중년 남자들과 같은 알베르게에 묵었다. 그들이 와인 세 병을 가지고 알베르게에 있는 사람들에게 돌렸다. 알베르게에 있던 사람들이 와인 한 병을 나눠마시는 동안 그들은 거뜬히 두 병을 비우더라는 것이다.

나는 데미안이 한국 중년 남자들의 에피소드를 말할 때 아주 호쾌하게 웃었다. 전형적인 한국 사람들의 술 문화였기에 정겹기까지 했다. 그와 가볍게 한국 술 문화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한국 사람들은 술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혼자보다는 떠들썩하게 함께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일종의 스트레스 해소이자 친교의 한 방법이라고 했다. 데미안도 데이비드도 어제 체험을 했다. 한국사람 셋과 저녁 식사를 하느라 평소보다 더 마셨고 더 웃었으니깐. 기분 좋은 저녁 식사였다고 데미안이 말했다. 나는 데미안에게 그들을 만나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데미안은 내가 아침 식사를 하려고 바에 들어갔을 때 헤어졌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만났다. 데미안이 말한 인상착의의 한국 중년 남자 둘이 떡, 하니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들을 보자마자 절로 웃음이 터져버렸다. 서로 인사도 하기 전이었다. 나를 분명 나사 하나 빠진 여자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상관하지 않았다. 그들은 비가 와서 비가 그칠 때까지 커피를 마시면서 기다리는 참이었다.
비 오는 풍경
 비 오는 풍경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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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정확하게 8시에 그쳤다. 비가 이울기 시작했을 때 일부러 마틴 생각을 하면서 시계를 봤다. 7시 56분이었다. 그리고 4분 뒤에 비는 그쳤다.

완전무장을 하고 한 시간 정도 비를 맞고 걸었지만 흙길 웅덩이에 물이 고여서 신발이 조금 젖었다. 물집 잡힌 발가락과 발바닥이 걱정되었다. 어서 신발과 발을 말리고 싶었다. 오늘은 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무리하지 않고 느긋하게 산티아고 길을 걷는다는 한국인 중년 남자들은 여유가 있었다. 천천히 사아군(Sahagun)을 향해 걸었다. 그 중 5년 전에 처음 오고 지금이 두 번째라는 A가 말했다(한국인 중년 남자들은 자신들을 소개하지 않았다. A와 B로 편의상 지칭하기로 한다). A는 보통 키에 얼굴이 둥글고 말투가 부드러운 사교가였다. B는 마른 체형에 키가 홀쭉하니 컸다. 정년퇴임 하고 A의 조언대로 이 길을 걷고 있었다. A는 학교에서 근무하기 때문에 방학이 되어서야 B와 합류할 수 있었다. B는 일주일 먼저 왔다.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 사람이 단순해지는 것 같더군요. 저는 그 단순함이 좋아요. 예를 들면 걷다보면 몸 어느 한 군데가 아프기 마련인데 그 아픈 곳만 생각나요. 처음에는 발가락이 아파서 나았는데 그 아픔이 어느 순간 허리로 이동해 있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그 아픈 부분만 생각하기로 했어요. 그곳이 아니더라도 다른 곳이 아플 수도 있으니, 그 아픔을 소중하게 생각하기로 했죠. 전체가 아니라 부분만 생각할 수 있는 단순함의 미학이라고 할까요."

A가 내 발걸음에 부지런히 보조를 맞추면서 이야기를 했다.
사하군에 도착 하기 전, 비르헨 델 푸엔테(성모의 다리)가 있는 풍경
 사하군에 도착 하기 전, 비르헨 델 푸엔테(성모의 다리)가 있는 풍경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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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와 프란체스코

사람 좋고 술 좋아하는 그들과는 사아군(Sahagun)에 못 미처 헤어졌다. 그들의 느긋함에 내가 따라가지 못했다. 마침 '성모의 다리'에서 데이비드를 만났다. 그는 잠깐 쉬고 있었다. 그의 발가락에도 작은 물집이 잡혀 있었다. 내가 먼저 출발했는데 어떻게 그가 나를 따라잡았을까. 내가 의아해하자 데이비드는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바에 들어갔을 때인 것 같다고 했다. 그와 나는 자연스럽게 동행하게 되었다. 대부분 번화가인 사아군에서 순례자들은 멈췄다. 데이비드와 나는 한적한 곳을 원했다. 발바닥이 아픈 뒤로 번화가보다는 순례자들이 적은 시골 알베르게가 편했다. 

북적거리는 사아군에서 나는 프란체스코를 만났다. 길 위에서 한 번은 만나겠지 싶었는데, 이렇게 일찍 그 날이 올지는 몰랐다. 나는 그를 아는 체하지 않았다. 아니, 아는 체 할 수가 없었다.

사아군 알베르게를 지나서 시골길로 접어 들려고 할 때였다. 프란체스코가 넝쿨 아래 의자에서 동행들로 보이는 일행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정확히 그인 줄 몰랐다. 옆에 있는 데이비드가 저기 프란체스코가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순간적으로 프란체스코를 보고 반색하는 나를 보며 데이비드가 말했다.

"안타깝지만 너는 그를 만날 시간이 없어. 우리는 좀 더 걸어가야 하니깐 서둘러야 해."

나는 말 잘 듣는 학생처럼 데이비드를 따라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열걸음만 돌아가면 그를 볼 수 있는 거리였다. 데이비드가 그냥 가자고 말하지 않아도 나는 그에게 내 안부를 전하고 싶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반가웠으나 나는 여전히 같은 신발을 신고 있었고 물집이 낫지 않았으며 발바닥 피부가 벗겨지기까지 했다. 심지어 발톱 두 개가 빠지려고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가 너무 고마웠기에 너무 미안했다. 어떤 말을 해야할 지 알 수 없었다(그 송구스러움이 순례를 끝내고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연락을 못한 이유다, 바보처럼).

사아군(Sahagun)
 사아군(Sahag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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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데이비드가 편한 것은 아니었다. 전날 칼사디야 데 라 케샤에서는 침대를 마음대로 고를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데이비드가 바로 내 옆 침대를 사용했다. 일반적으로 침대 머리맡에 콘센트가 하나씩 있기 마련인데 그곳은 달랐다. 콘센트가 띄엄띄엄 있었다. 내 침대에서 제일 가까운 곳은 데이비드 머리맡 콘센트였다. 콘센트 구멍은 다행히 두 군데였다. 나는 휴대폰 배터리를 충전하기 위해 그것을 사용해야했다. 적당한 시간에 빼면 되겠지 싶었다. 그리고는 잠이 들었다.

다른 때 같으면 알람이 울리기 전에 일어나서 알람을 해제하곤 한다. 그 날은 새벽부터 비가 내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늦게까지 침대에 누워있었다. 한밤중에 깨어서 서성거렸던 나는 평소와 달리 늦잠을 잤다. 잠결에 알람소리를 들었다. 4시 30분. 아침잠이 많은 데이비드 침대 옆이라는 것을 알았다. 비몽사몽간 내 몸은 알람 소리를 좇아 움직였다. 난감한 상황은 휴대폰 알람을 끈 뒤에 일어났다. 내가 데이비드 몸 위에 있었다. 침대를 빙 돌아가지 않고 누워 있는 데이비드 침대로 바로 온 거였다.  

소금물에 발 담그기
칼사다 데 코토(Calzada de Coto) 입구에 있는오래된 교회
 칼사다 데 코토(Calzada de Coto) 입구에 있는오래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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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와 함께 들어간 곳은 사아군에서 5km 더 걸어간, 칼사다 데 코토(Calzada de Coto)에 있는 알베르게였다. 사람 그림자가 거의 없어서 적막하기까지 했다. 아주 한적한 시골이라 순례자들이 피해(?) 가는 것만 같았다. 기부제로 이용하는 공립 알베르게였다. 관리와 접수를 맡은 50대 후반 남자 직원이 우리를 맞이했다.

직원은 말수가 적었다. 얼굴은 근엄했고 자신의 일에 책임감이 강한 듯 꼼꼼하고 분주하게 침대 시트를 개고 다림질을 했다. 

나른한 햇살이 난무한 그곳에서 나는 어제 미처 말리지 못한 옷을 널고 양말을 빠는 등, 분주히 움직였다. 아침에 내린 비 때문에 신발이 젖어서 빨랫줄 아래에 신발을 가져다 놓았다. 데이비드도 내 신발 옆에 그의 신발을 가져다 놓았다. 나는 조리를 제대로 신지 못해서 거의 맨발로 움직였다. 왼쪽 발바닥에 물집이 생겼고 피부가 벗겨졌기 때문이다.

칼사다 데 코토 알베르게 직원
 칼사다 데 코토 알베르게 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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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걷지 못한 것을 직원이 유심히 본 모양이다. 그가 내게 발바닥을 좀 보여달라고 했다. 발바닥을 보여주자 그는 스페인 말로 뭔가를 말했다. 제대로 알아들을 리 없었다. 안 되겠는지, 그는 휴대폰으로 영어 번역을 해서 보여주었다.

'소금물에 발 담근 뒤, 햇볕에 말리기.'

나도 번역기로 '뜨거운 물에 소금을 녹여야하나요?'라고 물었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서 빨간 플라스틱 통에 찬물을 담아왔다. 그리고는 소금을 한 움큼 넣었다. 그곳에 내 발을 담그라고 했다. 그런 뒤 햇볕에 말려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직원이 마련해준 의자에 앉아 30분 동안 소금물에 발을 넣었다. 그리고는 바깥 길가에 앉아 책을 읽으면서 햇볕에 두어 시간 정도 말렸다. 다 말렸다 싶을 때 그가 나를 다시 의자에 앉게 했다. 맞은편에 의자를 두고 그 위에 신문지를 깔고는 발을 올리라고 했다. 올리자 빨간약(소독약이지 싶다)을 발라 주었다.

열어놓은 출입문 풍경이 특별할 것은 없었지만 내게는 그 순간이 아주 소중했다. 비싼 병원비를 내고 처치를 받은 것보다 더 효과가 좋았다. 그것은 '정성'과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의 힘이지 싶었다. 내 옆에 데이비드가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내가 소독을 다 끝낸 것을 보고 배고프다고 했다. 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었다. 그는 가까운 곳에 슈퍼가 있으니 먹을 것 좀 사오자고 했다.

나는 데이비드를 따라 나섰다. 여전히 조리 신기가 힘들었다. 아예 조리를 벗고 맨발로 걸었다. 절룩거리는 나를 데이비드가 부축해주었고 나는 그의 긴 다리 보폭을 맞추느라 내 발걸음을 나눠걸었다. 머릿속에서는 많은 생각들이 뭉쳤다가 풀어졌다가를 했다.

칼사다 데 코토 알베르게 벽에 붙어 있는 기부금 통
 칼사다 데 코토 알베르게 벽에 붙어 있는 기부금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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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스타 시간인지 사람 한 명 지나가지 않았다. 적막할 정도로 고요한 거리에서 나는 맥스와 걸었을 때를 떠올렸다. 뒤처지는 순례자를 두고 온 것에 대해 그가 미안해하기는 커녕 시니컬하게 말했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부담을 느낄 수가 있어. 앞서 가는 사람이 기다려주는 것이. 일종의 빚이라고 생각해봐. 마음이 편치 않을 거잖아?"

맥스의 말이 맞았다. 나는 여러 사람에게 부담을 주고 있었다. 일종의 빚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부담을 느끼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 상대방은 배려라고 하지만 당사자가 부담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부담이었다. 나는 그 무게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우선 내 마음이 편해야 했다. 나 때문에 누군가의 계획에 차질이 있어서도 안 되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미련을 가지고 계속 의지하려는 마음도 경계해야 했다. 그렇다고 내가 걷는 것을 포기하는 것도 아니었다.

생각에 빠져 있는 데이비드의 얼굴은 굳어있었다. 이제 정말 혼자가 되어야 했다. 지금이 그와 보내는 마지막 시간이 될 지도 모른다. 나는 더 이상 까미노에서 동행자를 만들지 않기로 했다. 외롭더라도. 나는 그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미련 없는 이곳이어야 했다, 사람도 장소도 그리고 내 마음까지도.  

데이비드
 데이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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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길’은 2017년 6월 13일에 걷기 시작해서 7월 12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습니다. 30일만의 완주였습니다. 그 다음 날, ‘세상의 끝’이라는 피니스테레와 묵시아까지(100km)까지 내처 걸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34일 동안 900km 여정을 마쳤습니다. 몇 십 년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34일의 여정은 짧을 수 있으나 걸으면서 느꼈던 것들은 제게 인생의 축소판처럼 다가왔습니다. 움츠린 어깨를 펴게 하고 긍정적인 미래를 내다보게 했습니다. 이곳에서 34일 간의 힘들었지만 행복했던 시간들을 도란도란 풀어놓으면서 함께 공유하려고 합니다.



태그:#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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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이자 문학박사. 저서로는 소설집 《기차가 달린다》와 《투마이 투마이》, 장편소설 《죽음의 섬》과 《스노글로브, 당신이 사는 세상》, 여행에세이로는 《자유로운 영혼을 위한 시간들》, 《물공포증인데 스쿠버다이빙》 등이 있다. 현재에는 광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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