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포스터

▲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포스터 ⓒ jtbc


언젠가부터 드라마를 보지 않는다. 드라마의 설정이나 내용이 거의 비슷비슷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드라마를 30년 넘게 봤더니 이제는 한 회만 봐도 다음 전개를 예측할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굳이 봐야할 필요가 있을까.

대부분의 방송이 그렇지만 특히 드라마는 성역할 고정관념이 참 잘 드러난다. 드라마 속 엄마는 항상 가정주부이고, 아빠는 직장에 다니며, 엄마만 아빠에게 존댓말을 한다. 그리고 여자 주인공은 보통 집안형편이 어렵지만 밝고 씩씩하고, 남자 주인공은 사회경험이 더 풍부하고 집안형편도 좋으며 여자가 힘들 때마다 항상 도와주는 재주가 있다.

이 틀에서 벗어나는 드라마를 찾는 건 쉽지 않다. 특히 로맨스 드라마는. 게다가 요즘엔 이상하게 여자의 나이는 갈수록 어려지고, 남자의 나이는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tvN 드라마 <도깨비>도 그랬고, 또 지금 방송 중인 tvN <나의 아저씨>는 여자 주인공이 21살, 남자 주인공이 45살로 큰 나이차 때문에 한차례 논란이 있었다.

아무리 드라마는 판타지라지만 도대체 공감하기가 힘들다. 나에게는 위기의 상황마다 귀신같이 알고 나타나주는 사람이 없어 지지고 볶든 어쨌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한다. 부모님은 두 분 다 각자 일을 하시며 서로 존대를 하지 않으신다. 주변에 남녀의 나이 차이가 10살씩 나는 경우는 흔치 않으며 대부분 그리 잘 살지 않는 평범한 집안에 평범한 직장인이고, 하루의 대부분을 일하느라 보내고, 주말 아니고는 데이트할 시간도 없다.

대리만족도 어느 정도 공감이 가야 하는 것이지, 현실과는 별개로 구름 위에 둥둥 떠있는 드라마는 쓴웃음만 짓게 할 뿐이다. 그런데 참으로 오랜만에 볼만한 로맨스 드라마를 만났다. jtbc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말이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주인공 윤진아(손예진 분)은 35세로 커피회사 가맹운영팀 대리이다. 직장생활 경험이 적당히 쌓여 일 처리는 물론 상사 잘못 떠안기, 회식 자리에서의 성희롱 참고 넘기기, 후배 챙기기 등의 사회생활도 능숙하게 해낸다. 남자친구는 어린 여자와 바람이 나서 자신을 곤약에 비유하며 이별을 통보했고, 엄마는 왜 남들처럼 번듯한 곳으로 시집가지 못하냐며 매일 잔소리다. 그저 그런 매일을 평범하게 보내며 살아간다.

남녀 성역할 등 기존 틀에서 벗어나

 주인공이 회식자리에서 상사와 러브샷을 하고 있다.

주인공이 회식자리에서 상사와 러브샷을 하고 있다. ⓒ jtbc


이 드라마는 주인공이 일을 열심히 한다는 것부터 다른 드라마와 다르다. 특별한 사명감이나 열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직장이니까 그저 한다. 상사가 부당한 요구를 해도 감내한다.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 나타나는 백마탄 왕자님이 없다는 것은 당연하기에 그냥 묵묵히 일한다. 그러다보면 왕자님은 나타나지 않아도 믿음직한 여자선배 정영인(서정연 분)이 도와주기도 한다.

주인공이, 그것도 여자 주인공이 팍팍한 일상 속에서 일하는 모습을 이렇게 오랫동안 묘사한 드라마가 있었나 싶다. 로맨스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그저 이름으로써의 직업만 있었을 뿐 대부분의 시간을 우연히 만나고, 부딪히고, 사랑에 빠지는 데 보냈다. 하지만 인물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에 대한 이해 없이 그들의 사랑에 공감하기는 쉽지 않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서 손예진이 회사에서, 사회에서, 가정에서 겪는 일상의 구질구질함들은 여성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평범한 직장인으로서의 애환에, 여성으로서의 애환까지 함께 공감하다보면 어느새 손예진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있고 이제는 드라마 속 로맨스에 빠질 준비가 된 것이다.

이 드라마는 로맨스에 있어서도 지금까지의 드라마와 다르다. 우연한 만남이 반복되면서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지는 것도 아니고, 단지 상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사랑에 빠지지도 않는다. 평소 알고 지내던 친구의 남동생을 다시 보게 되어 호감을 느끼고, 가끔 데이트를 하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남자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화를 내며 손목을 잡아 끌고 나가지 않고, 상대의 의사와 상관없이 갑자기 입술을 들이밀지도 않는다. 여자는 좋아하지만 모르는 척 미소만 짓고 있지도 않는다. 드라마 속 손예진은 부끄러워하지만 남자의 집에 찾아가기도 하고, 손을 잡을까 말까 망설이기도 한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서준희(정해인 분)의 손을 잡아 둘은 연인이 된다.

현실에 발붙인 '현실 드라마'

 손예진이 정해인의 손을 잡은 후 맥주를 마시고 있다.

손예진이 정해인의 손을 잡은 후 맥주를 마시고 있다. ⓒ jtbc


지극히 평범한 내용인데, 지금껏 이토록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자신의 삶을 살며 사랑에 적극적인 여자 주인공은 볼 수 없었다. 이제야 내가 사는 세상을 드라마에서도 볼 수 있다.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때로 나의 의견을 표현하며, 사랑할 때 가만히 미소만 짓고 있지는 않은 나의 평범한 삶이 드디어 드라마에 나온다. 이제야 나는 공감할 수 있다.

이런 드라마를 원했다. 드라마 장르가 로맨스든, 추리든, 의학전문이든 뭐가 됐든 내 삶이, 나의 시선으로 본 세상이 표현된 드라마가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한국을 살아가는 수많은 평범한 30대 여성 중에 한 명이니까 말이다. 

드라마는 여성들의 전유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왜 많은 드라마가 남자들의 세상과 그들의 시각만 반영되어 있는지 항상 궁금했다. 재벌 2세가 나오는 것, 못하는 게 없는 왕자님이 등장하는 것, 여자 주인공을 방해하는 악녀가 나오는 것, 여자주인공이 어리고 예쁘지만 위기 대처 능력은 없는 것 모두 여자 시청자들이 원해서라고? 지금 말한다. 아니다. 나는, 30대의 평범한 직장 여성 시청자인 나는 이것들을 원하지 않는다. 여성들의 삶이 반영된, 여성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이 나오는, 현실에 발붙이고 있는 현실 드라마를 원한다.

그런 의미에서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등장은 정말로 반갑다. 이런 반가움은 시청률과 화제성으로 증명되고 있다. 물론 손예진은 말할 것도 없고 남자 주인공인 정해인이 신드롬을 예고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으며 이들의 연기 덕분에 드라마가 잘 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배우의 매력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이 드라마가 기존의 식상한 설정을 반복했다면 과연 정해인이 지금과 같은 인기를 얻을 수 있었을까. 현실을 잘 반영한 내용 속에서 배우들의 연기가 더욱 돋보였고 그 결과 드라마도, 배우도,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

아직 드라마 초반이라 앞으로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의 성공을 예감하고 있다. 드라마 제작자들은 이 드라마가 왜 인기가 있는지, 지금의 시청자들이 어떤 드라마를 원하는지를 제대로 살펴봐야 할 것이다. 뻔한 내용과 고정된 성역할, 관계 설정은 이제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시청자는 2018년 지금을 반영한 현실적인 드라마를 원한다. 드라마 제작자들은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를 보고 배워야 한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손예진 정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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