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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자리한 경주 원성왕릉(사적 제26호)은 지명처럼 괘릉으로 불렸다. 괘릉의 유래와 관련해 <동경잡기>는 내부에 물이 고여 관을 허공에다 걸어두었다 해서 붙여졌다. 한때 괘릉으로 불리던 이곳이 원성왕릉으로 비정된 건 <삼국유사>의 기록이 결정적이다.

숭복사지 귀부 숭복사지 귀부, 삼국유사에는 이 귀부에 최치원이 쓴 ‘유당신라국초월산대숭복사비명’이 세워졌다고 했다.
▲ 숭복사지 귀부 숭복사지 귀부, 삼국유사에는 이 귀부에 최치원이 쓴 ‘유당신라국초월산대숭복사비명’이 세워졌다고 했다.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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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는 '토함산 서쪽 숭복사에 원성왕릉이 있다고 했으며, 그곳에 최치원이 쓴 비석이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실제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에 자리한 '숭복사지'에서 최치원이 쓴 '유당신라국초월산대숭복사비명'의 비편이 확인이 되기도 했다. 원성왕릉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신라의 왕릉 가운데 그 원형이 가장 잘 남아있고, 이후 고려와 조선의 왕릉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처럼 중요한 평가를 받는 원성왕릉이지만, 의외로 왕릉보다 더 이목을 집중시키는 건 따로 있다. 바로 왕릉 앞에 자리한 석물 가운데 하나인 호인상으로, 마치 서역인을 닮은 듯 이국적인 형태가 눈길을 끈다. 이러한 호인상의 존재는 과거 신라와 서역과의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오늘은 원성왕릉을 통해 당시의 시대와 실크로드의 흔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알천(閼川)'의 홍수를 기회로 왕위에 오른 원성왕의 시대

원성왕(재위 785~798)의 이름은 경신으로 내물왕의 12대손이다. 무열왕을 시작으로 혜공왕에 이르기까지 신라 중대는 무열왕계가 왕권을 이어왔다. 하지만 선덕왕(재위 780~785)을 시작으로 내물왕계가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이를 잘 알 수 있는 사건이 바로 원성왕의 즉위다. 원성왕의 형이었던 선덕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조정의 중신들은 무열왕의 6대손인 김주원을 왕으로 세우기로 하고 이 소식을 전하게 했다.

원성왕릉 원성왕릉, 신라의 왕릉 가운데 가장 완성도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 원성왕릉 원성왕릉, 신라의 왕릉 가운데 가장 완성도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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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김주원은 서라벌에서 북쪽 20리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소식을 듣고 입궁을 하던 김주원은 홍수로 인해 물이 불어난 알천을 건너지 못해 입궁이 지체되고 있었다. 이를 기회로 비와 홍수를 하늘의 뜻이라 주장이 제기되고, 상대등 김경신을 왕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바로 원성왕이다. 당시 김주원을 옹립하는 세력과 원성왕을 옹립하기 위한 세력이 서로 견제하는 입장이었음을 확인해볼 수 있다.

왕위에 오른 원성왕은 자신의 경쟁자였던 김주원을 '명주군왕'에 봉하고 명주 일대를 식읍으로 하사하면서 다독였다. 또한 왕권이 약화되는 상황과 귀족들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염려했던 원성왕은 그의 치세에서 중요한 업적인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실시하게 된다. 독서삼품과는 관리를 선발하는데 있어 유교 경전의 이해 정도에 따라 3등분으로 나누어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로, 독서삼품과의 도입을 통해 원성왕은 젊은 인재들을 등용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호인상에서 바라본 원성왕릉 원성왕릉의 전경, 석물과 왕릉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 호인상에서 바라본 원성왕릉 원성왕릉의 전경, 석물과 왕릉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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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원성왕 시기에 기근이나 재해에 대처하는 원성왕의 모습이 많이 등장하는데 기근이 심할 때에 곡식을 나누어주는 구휼 활동을 벌이거나 벽골제 등의 치수 제도를 보완했다. 농사가 곧 국력이었던 시기임을 감안하면 이러한 원성왕의 행적은 눈에 띄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를 진흥하고 외치에서도 당과 발해에 사신을 보내는 등 외교적으로도 무난하게 잘 대처했던 원성왕은 798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뒤를 이어 손자인 준옹이 왕위를 오르니 그가 소성왕(재위 799~800)이다.

호인상을 통해 찾을 수 있는 실크로드의 흔적

원성왕릉은 앞선 성덕왕릉과 경덕왕릉처럼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신라 왕릉으로, 현재 남아있는 신라 왕릉 가운데 그 원형이 가장 잘 남아있다. 또한 이후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는 왕릉의 조성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앞선 성덕왕릉의 예처럼 관검석인상과 석사자상이 세워진 것은 동일하지만, 원성왕릉의 경우 서역인의 얼굴을 한 호인상이 세워져 있는 것도 특징이다.

호인상 원성왕릉에 세워진 호인상, 서역인의 얼굴을 한 이 호인상의 존재는 신라가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이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호인상 원성왕릉에 세워진 호인상, 서역인의 얼굴을 한 이 호인상의 존재는 신라가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이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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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국적인 형태의 호인상은 과거 신라와 서역과의 교역이 있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른바 실크로드의 상징처럼 여겨지는데, 일부에서는 이 호인상의 모델이 '처용 설화'에 등장하는 처용이 아니냐는 견해도 있다. 이 외에도 신라가 실크로드를 통해 세계로 교역을 했음을 확인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원성왕릉은 역사 교육의 장으로 의미 있게 볼 수 있다.

경주에서 출토된 이국적인 황금보검과 봉수형 유리병 등의 로만글라스는 당시 비단길로 불린 '실크로드(SilkRoad)'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비단(Silk)'은 직물 가운데 최상위에 자리한데다, 비단 그 자체가 화폐로 취급받을 정도로 매우 귀한 대접을 받았다. 당시 비단의 주요 생산지가 중국인 까닭에, 비단의 수요가 폭증했던 유럽과 서역에서는 자연스럽게 비단을 구하기 위해 직접 '실크로드'를 개척하게 된다.

실크로드 탐험대 기념비 화성 당성에 세워진 실크로드 탐험대 기념비, 원성왕릉의 호인상을 통해 실크로드를 생각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 실크로드 탐험대 기념비 화성 당성에 세워진 실크로드 탐험대 기념비, 원성왕릉의 호인상을 통해 실크로드를 생각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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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작은 비단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실크로드는 문명사적으로 큰 기여를 했다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으며, 이 과정에서 신라 역시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이 이루어졌다. 이와 관련해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소재한 '화성 당성'의 발굴조사 결과 신라 때 쌓은 '당항성'인 것이 확실시되면서 '실크로드'의 관문으로 주목받고 있다. 실제 지난 2013년 경상북도에서 '실크로드 원정대'를 파견하면서 화성 당성을 방문해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이처럼 원성왕릉과 호인상을 통해 신라의 실크로드 교류를 생각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공간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본인의 저서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 신라왕릉답사 편>의 내용을 토대로 새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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