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미권의 현대 청춘 영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J. 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입니다. 1951년에 나온 이 소설은, 청소년의 자의식을 긍정하고 그들의 고민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계기를 만들어 줬습니다.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위선적인 세상에 신물이 난 반항적인 청소년으로서, 이제껏 나온 숱한 청춘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가 그의 다른 버전이라고 해도 과한 말은 아닙니다.

이 영화 <레이디 버드>의 주인공 크리스틴 '레이디 버드' 맥피어슨(시얼샤 로넌) 역시 그런 캐릭터입니다. 독특한 유머 감각이 있고, 대학만큼은 고향인 새크라멘토를 벗어나 뉴욕에서 다니고 싶은 고등학교 졸업반이죠. 입시에 도움이 되는 실적을 쌓기 위해 여태껏 있는지도 몰랐던 연극반에 들어가 보기도 하고, 새로운 사랑에 빠지기도 하면서 고등학교 마지막 해를 파란만장하게 보냅니다.

또한, 여느 아이처럼 그녀도 어머니와 자주 부딪칩니다. 잔소리가 한 번 터졌다 하면 듣는 사람 속을 뒤집어 놓을 정도인 엄마가 정말 지긋지긋합니다. 하지만, 자신을 향한 엄마의 사랑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늘 애정과 미움이라는 양가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빛나는 디테일의 승리

 영화 <레이디버드>의 스틸컷. 고등학교 졸업반 크리스틴(시얼샤 로넌)은 자신이 지은 예명 '레이디 버드'로 불리기 원한다.

영화 <레이디버드>의 스틸컷. 고등학교 졸업반 크리스틴(시얼샤 로넌)은 자신이 지은 예명 '레이디 버드'로 불리기 원한다. ⓒ UPI 코리아


일반적으로 성장 플롯의 주인공은 특별한 '사건'을 겪은 끝에 성장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누구나 인생에서 겪는 생로병사의 단계일 수도 있고, 주인공의 실수나 유혹에 이기지 못해 자초한 잘못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천재지변 급의 완전히 황당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죠.

<레이디 버드>에는 이렇다 할 사건이 없습니다. 미국 고등학교의 마지막 학년이라고 하면 으레 있을 법한 소소한 사건들이 시간 순서대로 일어납니다. 가족들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사회적으로 9.11 테러의 후유증을 앓고 있고, 닷컴 버블의 후폭풍으로 중산층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가정이란 설정도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아주 특별합니다. 감정적 디테일을 뛰어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별 것 아닌 에피소드인데도 거기 깔린 풍자적인 유머 감각 때문에 배꼽을 잡게 됩니다. 영화 속 인물들의 심정이 너무 이해가 가서 가슴이 저리기도 하죠. 영화는 매우 직관적이고 감정 전달이 즉각적으로 이뤄지는 매체라서, 잘만 만들면 이렇게 섬세한 내면의 감정을 소설보다도 훨씬 더 생생하게 전할 수 있습니다.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을 맡은 배우 그레타 거윅이 이 영화에서 해낸 것처럼요.

뉴욕 기반의 독립 영화에 주로 출연하면서 입지를 다져온 그녀가 이번 작품에서 보여준 연출력은 대단히 뛰어납니다.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을 배우들이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돕고, 그것을 자연스러운 영화 언어 안에 효과적으로 녹여내는 솜씨가 상당합니다. 이 영화가 엄청난 호평 속에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 감독, 각본, 연기 등 5개 부문 후보에 오른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자기 객관화를 통한 성찰, 걸작의 이유

 영화 <레이디 버드>의 포스터.

영화 <레이디 버드>의 포스터. ⓒ UPI 코리아



작가이자 감독으로서 그레타 거윅의 훌륭한 점은 자기 객관화를 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감독들은, 특히 청춘 영화를 만드는 남성 감독들은 자기 젊은 시절에 대한 연민을 좀처럼 지우지 못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주인공이 무해하지만 투명 인간 취급받는 괴짜이거나, 알고 보면 정말 괜찮은 애인데 세상이 못 알아본다는 설정이 따라붙습니다. 혹은 비운의 가족사 같은 트라우마가 있거나요.

하지만, 이 영화 속 크리스틴은 그냥 보통 여자애입니다. 성적도 괜찮고 외모도 나쁘지 않으며, 아주 부유하지는 않지만 좋은 부모를 뒀죠. 내면의 상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부끄러워하고 자기가 사는 새크라멘토 대신 뉴욕을 동경합니다. 심지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거짓말과 악담도 서슴지 않습니다. 어떤 어른들은 '복에 겨워 배가 불렀다'는 핀잔을 주고 싶어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레타 거윅은 자기의 경험이 녹아 있는 인물인 크리스틴의 감정을 어떤 상황에서도 정당화하려 들지 않습니다. 거의 제3자의 시선에 가까운 냉정함을 유지합니다. 어른이 된 지금의 입장에서 당시의 미숙하고 아쉬웠던 모습을 똑바로 응시하지요. 그러면서 자기 연민으로 버무린 주인공 혼자만의 이야기 대신, 그녀의 삶에 관련된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함께 풀어냅니다. 이 영화에는 학교 친구들뿐만 아니라, 부모님과 오빠 커플 및 선생님들의 삶, 사회 계층의 문제까지 모두 녹아있습니다. 물론 그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어머니와의 관계입니다.
 영화 <레이디 버드>의 한 장면. 크리스틴(시얼샤 로넌)은 엄마(로리 멧칼프)와 사사건건 부딪친다.

영화 <레이디 버드>의 한 장면. 크리스틴(시얼샤 로넌)은 엄마(로리 멧칼프)와 사사건건 부딪친다. ⓒ 권오윤


미국 청춘 영화 역사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들은 언제나 젊은이의 이야기로만 시작하고 끝이 납니다. 어른이 나오긴 하지만, 결국은 사춘기 혹은 대학생 또래 젊은이들의 닫힌 계(界)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이런 영화들은 대다수 관객의 실제 경험보다 부풀려져 있어서, 조금 박하게 평가하자면 향수 가득한 추억담이나 판타지에 그치는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나마 그런 경향에서 다소 벗어나 있는 영화가 여성 감독인 에이미 해커링의 <리치몬드 연애 소동>(Fast Times at Ridgemont High)(1982)이었습니다. 카메론 크로우의 각본을 영화로 만든 이 작품은 향수를 자극하는 대신, 독특한 유머 감각과 현실적인 감정 묘사로 오랫동안 사랑받아 왔습니다. 이 영화에서 스테이시(제니퍼 제이슨 리)가 겪는 일들은 다루는 태도와 방식은 <레이디 버드>의 그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레이디 버드>는 이런 전통에서 한 걸음 더 나갑니다. 주인공의 세계를 현실적으로 그려낼 뿐만 아니라, 그녀가 자신의 세계를 유지할 수 있게 버텨준 친구와 가족, 선생님의 삶까지 보듬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인간의 삶은 언제나 세계 속에 존재하고,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명확히 합니다. 그들이 보여준 변함없는 신뢰와 사랑에 진심 어린 감사를 보내면서요. 이 점이 바로 이 영화가 걸작 청춘물 계보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이유입니다.

'잘되면 제 탓, 못 되면 조상 탓'이란 말도 있듯이, 흔히 사람들은 현재의 문제를 부모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게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거나, 부모가 물려준 타고난 재능을 가진 사람은 확실히 더 나은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하지만, 현재의 행복과 불행은 온전히 자기 자신의 몫입니다. 가진 것이 많다고 해서, 원하는 걸 손에 넣었다고 해서 곧바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크리스틴이 영화 말미에 남긴 음성 메시지에는 그런 깨달음이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어른'이 됩니다.

덧붙이는 글 권오윤 시민기자의 블로그(cinekwon.com)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레이디 버드 시얼샤 로넌 로리 멧칼프 그레타 거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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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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